한참 늦게 작성하는 사용기
아마 2016년이었을 겁니다. 코드에서 휴고 시리즈의 발전판인 새로운 플래그십 DAC가 출시됐습니다. DAVE, Digital to Analog Veritas in Extremis. 극한의 진리라니 이름 참 거창합니다. 모바일 조이, 테이블 탑 등 코드사의 작명 센스는 기기 개발 실력만큼이나 센스와 자신감이 넘칩니다.
데이브는 출시 이후 국내에서도 꽤나 주목을 받았습니다. 당시 제가 헤드파이에 주력하던 시기였기에 헤드파이 유저들 사이의 분위기를 주로 접했는데, 데이브와 좋은 헤드폰 하나면 헤드파이 종결급 시스템이라는 이야기가 왕왕 들릴 정도로 소리도 인정을 받았습니다.
헤드파이와 하이파이는 서로 다른 분야이지만 다름에서 오는 차이를 이해한다면 두 분야의 소리가 결국 추구하는 길은 같은 방향이라 생각합니다. 세밀한 표현력 등을 파악하는 데에는 헤드폰이 강점이 있기도 하지요. 몇 년 전부터 하이파이와 헤드파이를 겸하면서 헤드파이에서의 소리가 하이파이에서 이어지는 것을 경험하면서 이런 생각이 더 굳어졌습니다. 헤드파이에서 충분히 가치를 인정받은 데이브라면 하이파이에서도 한가닥 할 만한 여지가 충분할 것 같았고, 실제로 그랬습니다. 오히려 소리를 넓게 펼쳐서 들려주는 데이브의 표현력 덕분에 스테이징이 넓은 하이파이에서 보다 제 실력을 발휘하기 좋아 보이기도 합니다.
어쩌다보니 코드사의 휴고 시리즈 이후의 DAC들은 모두 사용해보았습니다. 유명한 이야기지만 코드 기기들은 사용되는 기술력의 근간이 같습니다. 형으로 갈수록 그 체급이 커질 뿐이지요. 그래서인지 어느 기기를 사용하더라도 코드 특유의 담백함과 청량감이 느껴집니다. 다만 제가 생각했을 때 이러한 개성이 제대로 발휘되려면 코드의 제품 중에서도 어느 정도의 체급 이상은 되어야 합니다.
첫 번째 휴고1은 제가 듣기에 청량감이 너무 과한 편에 속합니다. 물론 당시 포터블 분야에서 휴고1이 가지는 의의는 대단합니다. 마치 거치형 기기를 포터블로 줄여놓은 듯한 사이즈와 지원 단자, 그리고 그에 걸맞는 성능의 기기였습니다. 이후 휴고 시리즈가 출시될 수 있게 해준 장본인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저는 휴고1보다 한 체급 작은 모조의 소리가 더 마음에 듭니다. 휴고1보다 시원한 맛과 공간감은 줄었지만 해상력과 온도감의 밸런스를 참 잘 잡아서 만들어진 기기라 평가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포터블 DAC/AMP이자 출시한 지 몇 년이 지났음에도 소리에서만큼은 동 가격대 적수를 찾기 어려운 기기입니다. 몇 가지 사용상의 불편한 점, 그리고 날개를 달아주기 위해 전용 액세서리로 출시된 폴리가 바짓가랑이를 붙드는 결과를 초래한 게 아쉽기만 합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데이브는 휴고 시리즈의 세 번째 출시 제품입니다. 이후 최근 TT2까지 출시됐지만 여전히 최고의 자리는 데이브 몫입니다. 일찌감치 맏형을 만들어놓고, 이후 형의 기술들을 활용해서 잘난 동생들을 탄생시킨 셈입니다. 그러는 바람에 데이브는 이제 연식이 좀 된 기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요즘 시장에 나오는 중고가도 제법 내려갔더군요. 기기 가격과 소리 평가가 비례하는 경향이 있다보니 옛날보다 데이브에 대한 평이 조금씩 내려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네요.
요즘 좋은 평가를 받는 파워 케이블들을 차례로 대여받아 듣고 있습니다. 제겐 참 좋은 경험인 것이 솔직히 파워 케이블이 이 정도의 소리 차이를 만들어낼지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와서야 데이브 이야기를 작성하는 것도 최근의 신선한 경험들 때문입니다. 종종 지금까지 내가 데이브의 성능을 반도 끌어내지 못한 채 쓰고 있었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데이브는 이론적으로도, 청감상으로도 코드가 추구하는 소리를 가장 잘 표현하는 기기입니다. 롭 와츠가 항상 주장하는 완벽한 타이밍의 소리, 그로 인해 혹자는 소리가 딱딱하거나 차갑게 들릴수도 있다고도 말합니다. 휴고2 등의 기기에서는 세팅을 통해 2차 필터를 끈 상태인 ‘warm’ 모드로 들을 수 있지만 저는 왠지 완벽한 밥상을 차릴 수 있는데도 굳이 삼첩반상만 꺼내먹는 꼴 같아서 그리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데이브에는 그런 기능 자체가 없는 것으로 압니다.(혹시 제가 못 찾았을지도?) 굳이 만들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게, TT2 이상의 기기에서는 제가 듣기에 딱히 딱딱하다거나 혹은 너무 차갑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정도의 온도감은 파워케이블을 통해서도 조절이 가능합니다.
일정 탭 수 이상으로 넘어가서일까? 아니면 아날로그단의 품질 차이 때문일까? 아마 둘 다 영향이 있지 않을까요. 휴고2와 TT1을 비교하면 탭 수는 휴고2가 높음에도 들었을 때의 자연스러움은 휴고2쪽이었습니다. 다만 해상력 측면에서는 휴고2의 우위였고요. 휴고2와 TT2의 비교에서는 오래 들을 것도 없이 TT2의 압승이었습니다. 해상력과 자연스러움 모두 TT2가 눈에 띄게 좋았습니다. 그렇다면 TT2와 데이브는 어떨까요? 휴고2와의 차이만큼은 아니지만 금세 데이브의 손을 들어주게 되더군요. 그래도 TT2 리뷰 당시에는 가격대비 TT2의 성능이 굉장히 뛰어나다고 평했습니다. 신품가가 650만 원으로 데이브 신품가의 절반에 미치지 못하니까요.
그런데 최근의 경험들을 통해 데이브에 대한 제 생각이 너무나 달라졌습니다. 제가 데이브를 과소평가했던 것이죠. 아직 끌어낼 수 있는 능력이 아직 많이 남았었습니다. 이제야 어느 정도 남들에게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끌어내느게 아닌가 싶습니다. 굉장히 좋네요.
여전히 (별도의 필터류를 달지 않은) 케이블이 기기에서 만들어낸 소리에 무언가를 더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중입니다. 사실 이것도 요즘에는 의문이 들긴 합니다만.. 이러한 전제 하에 기기의 성능을 최대한 끌어내는 것이 좋은 케이블의 덕목으로 꼽는다면, 최근 제가 들은 데이브의 소리는 데이브가 가진 잠재력을 이끌어낸 결과물이라 봐도 될 것 같습니다.
A 케이블을 끼웠을 때, 데이브가 만들어내는 소리의 입자감이 극도로 미세해집니다. 아주 얇은 비단을 쭉 펼쳐놓은 듯한 고급진 질감이라든지 속까지 보일 듯한 해상력이라든지, 그러면서도 그 모든 것들을 안정적으로 펼쳐놓을 수 있는 무대까지 정말 매력적이었습니다. 다만 넓이에 치중한 나머지 깊이감이 부족하고, 질감에 비해 타격감이 아쉬운 세팅이었습니다. 반면 B 케이블을 끼웠을 때, 지금껏 데이브 소리의 무게 중심이 살짝 높다고 생각한 것이 잘못이었다고 외치는 듯 깊이 있게 떨어지는 저역이 일품입니다. 깨끗함 속에 묵직한 한방이 있는 소리를 바라는 이라면 추천하고 싶은 세팅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대적으로 좌우 표현의 한계가 느껴지고 맑고 넓게 퍼지는 잔향이 줄어듭니다.
베스트는 A + B인 텐데, 이게 쉽지는 않아 보입니다. 가령 어느 게임에서는 유저가 원하는 방향으로 캐릭터의 능력치를 부여할 때 모든 능력치를 꽉 채우기에는 주어직 스탯이 부족한 때가 있습니다. 체력을 꽉 채우면 마나가 부족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고요. 전사로 키울 건지 마법사로 키울 건지 선택해야지요. 가끔 모든 스탯이 훌륭한 캐릭터를 만나기도 하는데, 그러한 캐릭터의 대부분은 '현질'로 만들어졌습니다.
데이브보다 상급의 기기로 간다면, 혹은 제가 아직 찾지 못한 최상의 세팅을 찾는다면 A와 B의 장점만을 모아놓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어느 쪽이 되었든 모두 더 오랫동안 음악을 듣고 싶게 만드는 소리였습니다. 맛있는 음식이 꼭 한 가지 맛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매운 맛도 좋지만 또 담백한 맛이 끌릴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슨 맛이 되었든 기본이 잡혀 있지 않다면 맛이 살지 않을 텐데, 데이브는 그 기본이 잘 잡혀 있는 제품 같습니다. 좋은 케이블을 연결하면 케이블의 특징들을 쏙 빼서 잘 들려줍니다. 같은 곡임에도 기기를 바꾼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다수의 기기를 보유한 채 상황에 맞게 골라서 사용하는 분들도 많이 계실 텐데, 몇 가지 케이블을 곁에 두고 그날 그날 골라서 듣고 싶은 욕심이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데이브의 전원을 켜고 첫 곡을 재생시켰을 때, 드물지 않게 샘플링 레이트 오류를 경험했습니다. 가령 재생한 음원의 샘플링 레이트는 24/96인데 데이브의 표시창에는 24/88로 뜬다든지.. 보통 오류가 나면 데이브에서는 24/88로 인식하는 듯합니다. 그럴 경우 제대로 재생되지 않고 잡음과 함께 뚝뚝 끊겨서 재생됩니다. 음원 재생 프로그램을 다시 껐다 켜면 간단히 해결되는 문제이긴 하지만 귀찮습니다. 데이브를 사용하면서 겪은 거의 유일한 문제이자 단점입니다.
데이브를 끝으로 사실상 코드 DAC 탐방기 1단원은 마친 셈입니다. 이제 남은 일은 데이브에 블루 mk2 혹은 TT2에 M스케일러를 붙여서 들어보는 것입니다. 롭 와츠가 그렇게 외치던 백만 탭의 위력이 과연 어떨지, 궁금하긴 합니다. 사용하시는 분들 대부분이 데이브 단독으로 사용했을 때와는 또 한 단계 다른 수준의 소리라고 말하시던데 저도 그럴 거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16만 탭과 백만 탭의 차이이니.. 그리고 가격으로 따지자면 데이브 단독과 TT2 + M스케일러 조합이 얼추 비슷한데, 탭수를 높힌 TT2가 맏형인 데이브를 추월할 수 있을지도 관심이 갑니다. M스케일러가 TT2 단독으로 비교했을 때 모자랐던 30%를 매꿔줄 만한 기기인지.. 하지만 또 거기에 맞는 파워케이블 추가까지 생각하면 데이브 단독 운용이 더 저렴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앞으로 데이브보다 상급의 타 브랜드 DAC들도 경험해볼 생각입니다. 앞으로 소리를 평가할 때 이번 경험이 많은 도움을 줄 것이라 확신합니다. 경험할 DAC들 대부분이 아마도 데이브보다 좋은 평가를 받는 제품이 될 겁니다. 기기 자체의 성능만 놓고 본다면요. 하지만 실제 세팅 후 들었을 때 제가 기억하는 데이브의 좋은 소리 이상을 듣기 위해서는 그 DAC들에 맞는 어느 정도의 세팅이 필요할 테지요. 그러한 세팅을 찾아가는 여정이 더 기대가 됩니다. 갈수록 기기 자체보다는 함께 사용할 합을 구상하는 쪽에 관심이 커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