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임이어스 모델X
고가의 제품들과 제조사들은 소위 있어보이는 단어들을 사용하는 것을 선호하는 것 같습니다. 레전드, 엠파이어처럼 멋진 의미를 가진 단어나 신화 속 인물이나 유명한 여주인공을 제품명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흔합니다. 이와는 달리 개발자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고요. 아무래도 가격에 걸맞는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드러내고 싶은 마음일 겁니다. 그런데 오늘 소개할 이어폰 브랜드는 이런 면에서 브랜드명이 신선합니다. 라임이어스 모델X입니다. 요리에 종종 사용하는 그 라임 맞습니다. 이어폰 한쪽 플레이트에 깔끔하게 단순화시킨 라임 로고가 새겨져 있지요. 일종의 파격이랄까요.
리뷰를 작성하기 전까지 라임이어스는 제게 생소한 브랜드였습니다. 제품 수령 후 듣는 과정에서도 처음에는 리뷰 진행 여부에 대한 고민도 있었습니다. 남에게 소개할 만한 가치가 있는 제품인지, 제가 잘 소개할 수 있는 제품인지 판단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거든요. 그런데 이리저리 만지다보니 모델X라는 이어폰이 제법 흥미롭습니다. 본인에게 맞는 소리를 만들어가는 맛이랄까? 이 리뷰는 제가 모델X를 가지고 제 취향의 소리를 찾아가는 여정을 기록하는 일종의 기행문입니다. 자, 출발하십시다!
중저역 조절 스위치, 그리고 각별한 보어(Bore) 설계
올 초, 출시된 지 1년 만에 라임이어스의 상위 두 모델인 모델X와 에테르가 옷을 바꿔 입고 다시 등장했습니다. 한정판이라는 마법의 단어를 목에 걸고 말입니다. 다행스럽게도 한정판에 어울리는 멋들어진 외관 버프는 장착한 대신 가격 상승이라는 디버프는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한정판이라면 언제나 환영입니다. 짙은색 목재 무늬의 플레이트였던 기존 모델X는 귀여운 라임 로고가 새겨지기에는 조금 중후했습니다. 한정판 모델X는 투명했던 쉘을 짙은 회색톤의 반투명 쉘로 교체했고 플레이트는 카본으로 마무리했습니다. 그리고 양쪽 플레이트 중앙에 녹색으로 각각 라임과 리본을 닮은 x 형상을 새겨두었지요. 덕분에 브랜드명에 걸맞는 세련되고 상큼한 디자인으로 재탄생했습니다.
모델X는 플레이트에 위치한 스위치로 두 가지 소리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요 몇 년 새 유행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장점이라면 하나의 이어폰으로 둘 이상의 다른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점, 매칭 혹은 곡의 장르에 따라 골라 듣는 맛이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리 선호하는 방식은 아닙니다. 적어도 저의 경우에는 이어폰이 제공하는 복수의 소리가 모두 저의 기호에 맞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기 때문입니다. 어디까지나 일종의 취향 문제이지만 저는 다양한 소리를 들려주는 제품보다는 하나라도 제대로 튜닝된 제품을 더 좋아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스위치의 장점이라면 대중적인 측면에서는 보다 다양한 사람들이 해당 이어폰을 통해 만족감을 느낄 가능성이 높다는 것, 개인적인 측면에서는 특정 장르에 감초처럼 사용할 만한 하나의 카드가 마련된다는 것 정도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모델X 역시 두 모드 모두 제 입맛에 들어맞지는 않습니다. 다행인 것은 둘 중 하나가 마음에 들었다는 점이죠. 소리에 대한 평은 뒤로 미루도록 하고 우선 모델X의 두 모드를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제조사측 설명에 따르면 모델X의 스위치는 800Hz 이하 대역을 약 6dB 조절하는 역할을 합니다. 스위치를 위로 올렸을 때가 6dB 부스팅된 모드입니다. 6dB이면 상당히 큰 차이인지라 내렸을 때와 올렸을 때의 소리차가 분명히 인지됩니다.
지난 엠피리언 리뷰에서 잠시 언급했었는데 공교롭게도 라임이어스에서도 스위치의 기능에 대한 설명 중 하나로 등청감 곡선을 제시합니다. 낮은 볼륨에서 상대적으로 작게 들리는 저역의 양감을 스위치를 통해 보강할 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모델X는 실제로 스위치를 조절해보면 단순히 저역을 보강해주는 역할뿐 아니라 보컬의 표현력까지도 달라질 정도의 차이가 느껴집니다. 따라서 등청감 곡선에 의한 조절이라기보다는 성향에 맞는 음색 조절 용도로 활용될 가능성이 훨씬 높을 것입니다.
유닛당 4개의 BA 드라이버가 저역 2개, 중역과 고역 각각 1개씩 배치된 3웨이 구성인 모델X는 드라이버부터 노즐까지 세 개의 보어를 통해 소리가 전달됩니다. 라임이어스에서 ‘VariBore’라 칭한 서로 다른 직경의 보어는 고역 신호가 전달되는 보어의 직경을 더 크게 설계한 것입니다. 이를 통해 한층 부드러운 고역 재생력을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밖에 ‘PAR(Passive Acoustic Resonator)’라 해서 보어 중 하나를 공명기와 같은 기능으로 사용하는 등 라임이어스는 보어에 상당히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 같습니다. 보다 정확한 설계를 위해 노즐 부위를 알루미늄 재질로 제작한 것도 그 일환입니다.
V자형 밸런스, 타이트한 질감을 만드는 것이 관건
이제 모델X를 들어봅시다. 저는 코드 모조폴리와 함께 사용했습니다. 모델X를 착용한 뒤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스위치를 올릴 것이냐 내릴 것이냐 결정하는 것입니다. 어느 쪽이 되었든 둘 중 하나를 결정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앞서 말했듯 두 소리 사이차가 크기 때문입니다. 800Hz라 하면 보컬 영역까지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 대역입니다. 스위치를 내려서 들었을 때의 보컬은 간결하고 담백합니다. 솔직히 말해 제가 듣기에는 건조한 수준입니다. 그리고 저역의 두께감도 모자라게 느껴집니다. 라임이어스의 설명을 토대로 따져본다면 모델X 스위치의 존재 목적은 저볼륨에서 모자란 저역을 채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라임이어스가 제시하는 기본 소리의 기준은 스위치를 내린 상태라고 유추해도 되겠지요. 하지만 적어도 제 기준에는 적정 볼륨에서도 스위치를 올려서 듣는 쪽이 훨씬 매력적입니다.
그렇다고 스위치를 올렸을 때의 소리가 모두 다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닙니다. 건조했던 보컬에 약간의 살집이 붙음과 동시에 윤기가 도는 점은 긍정적입니다. 사실 이 부분이 제가 스위치를 올려서 들을 것을 권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다소 빈 것처럼 느껴졌던 공간감이 저역이 확보됨으로써 비로소 채워집니다. 모델X는 이어폰치곤 제법 넓은 공간 속에서 소리를 표현하는 편입니다. 스위치를 내린 상태로는 공간에 비해 소리가 빈약해서 제대로 채워주지 못하던 것이 스위치를 올리니 내가 언제 그랬냐는듯 정반대의 모습을 보입니다. 문제는 이제 반대로 저역의 세기, 그리고 울림이 과하게 느껴집니다. 양감도 양감이지만 보다 단단하게 잡아줄 필요가 있습니다.
라임이어스의 국내 수입사인 소리샵은 모델X를 구매자에게 자사가 수입하는 또다른 브랜드 파이널의 이어팁을 추가로 제공 중입니다. 우연인지 철저하게 계산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파이널 이어팁 제공은 아주 조금 과장해서 신의 한 수에 가깝습니다. 아마 판매 결정 과정에서 관계자 분들이 청음 후 고심 끝에 결정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모델X와 파이널 이어팁의 궁합이 굉장히 잘 맞습니다. 원래 모델X에 동봉되는 이어팁은 스핀핏입니다. 저도 평소 애용하는 이어팁이기도 한데, 모델X에는 그리 잘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스핀핏에서 파이널 이어팁으로 바꾸었을 뿐인데 다소 풀린 감이 들던 저역 음선이 탄탄하게 윤곽 잡힌 소리로 변모합니다.
이 정도까지만 해도 가격이 아쉽지 않은 만족스러운 소리입니다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지요. 넓은 공간감, 중고역의 뚜렷한 존재감과 매력적인 음색, 저역 비트의 리듬감 모두 수준급인데 뭔가 음역대 밸런스가 살짝 아쉽습니다. 어떻게 보컬은 이대로 둔 채로 저역만 아주 살짝 줄여줄 순 없을까 다시 고민에 빠집니다. 스위치를 통해 저역을 두 단계로 조절해 줬더니 이제는 그 중간 단계의 저역을 원하는 꼴이니 제작자가 봤을 때에는 진상 고객으로 찍힐 판이지만 어디 한번 계속 가봅시다.
이제 건드릴 부분은 케이블 정도겠군요. 워낙 많은 커스텀 케이블이 시중에 판매 중이고 그 중 분명 더 잘 어울리는 케이블이 여럿 존재하겠지만 제 환경 속에 한정해서 만져볼 수밖에 없는 점 미리 양해 바랍니다. 저는 평소 밸런스가 전혀 다른 두 개의 케이블을 기분에 따라 골라서 사용 중입니다. 하나는 V자형 음색의 저역 울림이 좋은 케이블이고 다른 하나는 전반적인 음선을 보다 단단하게 잡아주는 유형의 케이블입니다. 사실 듣기 전부터 마음 속으로는 승자를 정한 상태였습니다. 결과도 벗어나진 않았습니다. 두 번째 케이블을 물렸더니 다소 뭉뚱했던 저역의 윤곽이 잡히면서 체감상 해상도가 좋아집니다. 기본 케이블에 비해 토널 밸런스가 살짝 올라가는 대신 음역대 밸런스는 보다 잘 맞습니다. 재밌는 것은 첫 번째 케이블 역시 다른 방향으로 기본 케이블보다 좋은 결과가 도출된다는 점입니다. 저역의 양감은 거의 바뀌지 않고 고역의 개방감이 살아납니다. 역시나 이번에도 해상력 상승을 동반합니다. 아무래도 모델X의 성능을 기본 케이블이 온전히 받쳐주지 못하는 듯합니다. 청음샵에서 모델X를 들어볼 기회가 있으신 분들은 이왕이면 커스텀 케이블과 함께 들어보시는 것을 권합니다.
어느 정도 소리 만들기 작업을 마쳤으니 결과 확인을 위해 요즘 많이 듣는 노래 몇 곡을 들어봅니다. 먼저 클린 밴딧과 마리나, 루이스 폰시가 함께 부른 ‘Baby’를 들었습니다. 어마어마한 세 가수가 모이니 어마어마한 곡이 만들어지는 건 당연합니다. ‘Despacito’야 전세계에서 안 들어본 사람이 더 적을 정도로 유명한 곡이지요. 뭐라고 하는지 전혀 모르고 들어도 신나는 루이스 폰시의 스페인어가 라틴 스타일의 ‘Baby’에서도 역시나 감초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싱어송라이터 마리나의 보컬을 오랜만에 들을 수 있어서 더 좋은 곡이기도 합니다. (깨알같이 덕질을 하자면 이제 곧 마리나의 새 앨범도 나온다고 하니 관심을... 죄송합니다.) 곡의 시작부터 등장하는 저역 비트를 비롯한 리듬감이 잘 살아나는지, 마리나와 루이스 폰시의 보컬이 평소 익숙한 음색으로 표현되는지 집중해서 들으려 했는데 굳이 신경써서 들을 필요 없이 초반부만 들어도 어깨가 먼저 반응합니다. 특히 널찍한 공간 속에서 표현되는 리듬감이 발군입니다. V자형 음색인 만큼 평소보다 보컬의 집중도가 조금 떨어지긴 하지만 이는 다른 이어폰들과의 상대적 비교 결과일 뿐 모델X 자체만 놓고 본다면 과도하게 음역대 밸런스가 치우쳐졌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다만 보컬에 포커스를 맞춰서 감상하시는 분들에게는 아쉽게 느껴질 순 있겠습니다.
장르를 바꿔서 이번에는 쿠법사, 테오도르 쿠렌치스가 지휘하는 차이코프스피 교향곡 6번 ‘비창’ 3악장을 듣습니다. 비창이라는 소제목이 어울리지 않는 발랄한 선율이 빠르게 진행되는 악장입니다. 곡 해석에 있어서 호불호가 분명한 쿠렌치스이지만 앨범 레코딩 품질이나 다소 과장된 다이나믹스 등 오디오파일들이 본인 시스템 실력을 파악하는 데에는 잘 어울립니다. 마치 영화관의 대형 스크린으로 현란한 CG를 보는 것 같아서 듣는 재미가 있습니다. 이런 재미를 제대로 살려주려면 넓은 공간 표현력이 필수입니다. 악기의 질감도 잘 살아나야 하고요. 모델X는 이 곡의 특성을 온전히 살려주는 몇 안 되는 이어폰 중 하나입니다. 쿠렌치스 스타일의 다이나믹한 진행과 모델X의 찰진 저역과 고역 표현의 궁합이 참 잘 맞습니다. 넓은 무대 역시 대편성 곡을 듣기에 적합합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여전히 조금은 무딘 저역의 질감인데 이 부분까지 모델X에 바라는 것은 욕심이 아닌가 싶습니다.
서두에서 다소 거창하게 소리를 만드는 기행문이라 표현했지만 사실 어느 이어폰을 사용하든 한 번 쯤은 거쳐야 하는 일련의 과정들일 뿐입니다. 좋은 소리는 있어도 완벽한 소리는 없습니다. 보다 좋은 소리를 만들기 위해 기본이 되는 이어폰 자체의 성능이 받쳐주어야 하는 게 당연하지만 이후 함께 사용하는 액세서리들의 선택을 통해 조정 과정을 거친다면 이전보다 몇 단계 높은 수준의 만족도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모델X 정도의 이어폰 구매를 고려하는 분이라면 그 만한 열정은 있으실 것이라 믿습니다.
모델X는 잘 만들어진 이어폰이 가지는 특징들을 고루 갖춘 기본기 탄탄한 이어폰입니다. 어느 정도의 조정 과정을 거친 모델X의 소리는 듣는 재미와 음악성 모두 좋은 점수를 받을 만한 이어폰이었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저역과 고역에 조미료를 살짝 가미한 듣는 재미가 있는 쪽에 가깝겠습니다. 참고로 저는 스위치를 올린 소리를 선호했지만 모델X를 들은 제 지인은 J-팝의 경우 스위치를 내린 쪽이 더 잘 맞는다는 평을 내리기도 했으니 다른 분들 중에는 분명 스위치를 내린 깔끔한 소리를 선호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여러분도 편견 없이 본인에게 맞는 소리를 찾아보시는 것은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