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처럼 깨끗한
굴지의 하이파이 스피커 제조사, 회장님 스피커로도 불리는 그랜드 유토피아의 제조사인 포칼은 2016년 자사의 최고급 라인에 붙이는 유토피아라는 명칭을 그대로 가져온 헤드폰을 내놓으면서 순식간에 헤드파이 분야 최상위에 올랐다. 출시한 지 벌써 3년째에 접어들었지만 포칼 유토피아는 여전히 많은 이들이 최고의 다이내믹 드라이버 헤드폰 중 하나로 주저없이 꼽을 만한 대단한 작품이다. 하지만 성능에 걸맞는 높은 가격 때문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인데 포칼 역시 이를 염두에 둔 듯 상대적으로 저렴한 오픈형 제품 일리어를 함께 선보였다. 유토피아의 파급력이 워낙 강해 이슈화가 덜 된 면이 있으나 일리어 역시 뛰어난 가성비를 뽐내며 중고급기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하며 오랫동안 인기를 이어갔다.
가장 최근 출시한 밀폐형 플래그십 스텔리아까지, 어느새 포칼의 인도어 헤드폰 라인업도 빈 자리 없이 풍성하게 채워졌다. 오픈형 두 제품이 먼저 포문을 연 가운데 각각의 등급에 대응하는 밀폐형 제품들이 짝을 이룬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아직 글에서 언급하지 않은 포칼의 오픈형 제품이 하나 있다. 오늘 소개할 클리어 (프로페셔널)이 바로 그것이다. 2017년 말 홈오디오 용도의 클리어가 먼저 출시되었고 얼마 뒤인 2018년 초 스튜디오에서 사용할 목적의 클리어 프로페셔널이 연이어 소개되었다. 용도에 맞게 동봉되는 구성품이 다르고 제품의 색상 차이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사운드는 두 제품이 동일하다고 한다. 따라서 이 글은 클리어 프로페셔널을 기준으로 쓰여지지만 사실상 클리어 전 제품의 리뷰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제품을 접하기 전 가장 궁금했던 점은 유토피아와 일리어, 그리고 클리어 프로페셔널 사이의 관계였다. 유토피아와 일리어의 관계야 출시 당시부터 정해진 것이지만 뒤늦게 출시된 클리어는 과연 어느 위치에 설 만한 제품으로 개발된 것일까. 제품을 받아들고 머리 위에 얹은 뒤 첫곡을 재생한 순간 바로 느낌이 온다. 이 제품은 체급이 작은 유토피아다. 자세한 이야기는 지금부터 하나씩 풀어가보자.
포칼의 오픈형 삼 형제
포칼 오픈형 세 제품은 M자형 돔 드라이버, 코일의 형태를 지탱하는 내부 심을 제거한 포멀리스 코일, 니어필드 스피커에 가까운 입체감을 전달하기 위한 드라이버의 규격과 각도 등 기본적인 구조를 공유한다. 다만 세부적으로 각 부품에 사용된 재질이 다를 뿐이다. 맏형인 유토피아는 드라이버의 소재로 포칼이 자랑하는 베릴륨(Beryllium)을 사용했고 드라이버를 구동하는 마그넷 역시 강력한 자력의 빨간색 플라워 마그넷을 장착하여 구동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면, 동생 일리어의 경우 포칼의 중보급형 스피커 트위터에 사용하는 알루미늄과 마그네슘 합금 소재 드라이버와 일반적인 마그넷을 사용하는 식이다.
클리어 프로페셔널은 제품 구조만 놓고 보자면 두 제품 중 일리어쪽에 더 가깝다. 색상만 다를 뿐 이어컵의 전반적인 외관이나 드라이버의 소재 등 두 제품의 상당수가 같은 스펙으로 만들어졌다. 구체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마그넷 역시 일리어와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클리어는 새롭게 제작한 구리 소재의 보이스 코일을 사용하여 전반적인 해상력 상승 효과를 노렸고, 보다 꼼꼼하게 살펴보면 일리어와 클리어 모두 페브릭 이어패드가 장착되었지만 클리어의 패드만 유토피아처럼 패드에 일정하게 타공되어 있다는 점 정도의 차이를 찾을 수 있겠다.
참고로 클리어와 클리어 프로페셔널의 차이를 살펴보면 우선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제품의 색상이다. 클리어는 제품 전체를 밝은 회색톤으로 처리한 반면 클리어 프로페셔널은 검정색 바디에 빨간색 이어패드와 헤어밴드로 포인트를 주었다. 검정/빨강 조합은 클리어 프로페셔널 외에 모니터 용도의 제품 리슨 프로페셔널에도 그대로 사용되어 앞으로 포칼 프로 라인업의 정체성으로 꾸준히 사용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나머지는 동봉되는 구성품의 차이인데 클리어는 1.2m의 3.5mm 케이블, 각각 3m의 6.3mm와 4핀 XLR 케이블로 총 세 개의 케이블을 두둑하게 챙겨주었다면 클리어 프로페셔널은 XLR 케이블을 제외하고 6.3mm 케이블을 나선형으로 꼬아진 5m 길이로 제공하여 헤드폰을 착용한 채 보다 여유롭게 공간을 활보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빠진 케이블 대신 여분의 이어패드를 추가하여 균형을 맞추었는데 아무래도 직업적으로 오랜 시간 사용할 수밖에 없는 엔지니어들에게 맞춤형 액세서리를 챙겨준 모양새이다. 다만 필자의 사용 환경에서는 조금만 멀어져도 팽팽한 장력이 생기는 나선형 케이블이 조금은 불편하게 느껴졌다.
사실 지금까지 설명한 스펙만으로는 굳이 일리어 이후 클리어를 출시한 이유가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 적어도 필자가 파악한 차이라고는 보이스 코일 하나 달라진 정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제품의 소리를 들어본 이라면 단번에 두 헤드폰이 전혀 다른 기기라는 것임을 깨달을 것이라 백 퍼센트 확신한다. 두 제품의 소리는 그야말로 천지 차이다. 도저히 같은 기술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기 힘들다. 여기에 유토피아까지 포함시킨다면 다시금 포칼이 원래 스피커 제조사였다는 사실이 머릿속에 새겨진다. 세 제품은 마치 동 브랜드의 서로 다른 스피커 라인업을 보는 것과 유사하다.
마치 고성능 스탠드마운트 스피커처럼
스피커 브랜드의 일반적인 라인업 구분을 생각하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우선 가격대별로 몇 개의 큰 라인업이 나뉘어진다. 각각의 라인업 속에는 스피커의 체급차 등으로 다시 세분화되는 식이다. 가령 포칼의 스피커들을 놓고 따져보자면 크게 플래그십 라인 유토피아(Utopia)를 필두로 그 뒤에 소프라(Sopra)와 칸타(Kanta), 아리아(Aria) 등이 이어진다. 그리고 유토피아 속에는 다시 체급에 따라 그랜드 유토피아, 스텔라 유토피아 등의 플로어스탠딩 스피커와 디아블로 유토피아와 같은 스탠드마운트 스피커가 포함된다.
이제 다시 헤드폰으로 돌아오자. 헤드폰 유토피아가 역시나 플래그십 라인으로 자리를 지키는 가운데 일리어는 그 아래 라인업에 위치한다. 본 글에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밀폐형인 스텔리아와 엘레지아는 각각 유토피아 라인업과 일리어 라인업에 포함시킬 수 있을 듯하다. 마지막으로 이 글에서 가장 중요한 클리어 프로페셔널은 필자 기준으로는 유토피아 라인업에 편입시키는 것이 적당하다.
플로어스탠딩 스피커와 스탠드마운트 스피커의 차이 중 하나로 공간 장악력을 꼽을 수 있다. 스피커를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본인이 스피커를 사용할 환경에 맞는 유형의 제품을 선택하는 것이다. 아무리 크고 좋은 제품일지라도 그에 어울릴 만한 공간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제 실력을 반도 발휘하기 어렵다. 만약 좁은 공간에 두고 사용해야 한다면 오히려 스탠드마운트 스피커를 선택하는 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
물론 스피커의 체급에 따른 태생적인 차이도 분명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아래까지 깊숙히 떨어지는 저역 재생 능력이다. 어지간한 스탠드마운트 스피커로는 플로어스탠딩 스피커에서 뿜어져 나오는 저역의 쾌감을 따라잡기 힘들다. 반면 중고역의 또랑또랑한 질감이나 보컬의 농밀함 등에서는 동 가격대 제품으로 치자면 플로어스탠딩 스피커보다 스탠드마운트 스피커쪽이 강점을 보이기도 한다. 따라서 결국 원론적인 이야기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오디오 기기를 선택할 때에는 본인의 환경과 본인의 성향에 맞는 제품을 선택하는 것이 최선이다.
일리어와 클리어 프로페셔널은 마치 플로어스탠딩 스피커와 스탠드마운트 스피커의 관계와 매우 유사하다. 클리어 프로페셔널은 포칼이 유토피아와 일리어를 통해 보여준 사운드 성향과는 지향점이 다르다. 강력하고 웅장한 저역이 대폭 줄어들어 보다 깨끗하고 깔끔하게 떨어지는 방향으로 튜닝되었다. 클리어라는 제품명와 너무나 잘 어울리는 사운드이다. 그와 동시에 일리어와의 어감까지 잘 맞으니 누가 지었는지 몰라도 기가 막힌 작명 센스임이 분명하다.
필자가 앞서 두 제품의 등급에 차등을 둔 이유는 중고역 해상력에 있어서 클리어 프로페셔널은 일리어보다는 분명 한 수 윗급으로 평가했기 때문이다. 해당 음역대만 놓고 본다면 유토피아와 비교해도 크게 뒤진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만큼 훌륭하다. 이 점에 초점을 맞춘 결과 일리어는 전반적인 성향은 비슷하나 질적인 면에서 유토피아에 미치지 못하므로 하위 라인업의 대형기에 비유했고, 클리어 프로페셔널은 해상력은 상급기에 속할 만큼 뛰어나지만 상대적으로 공간 장악력이나 저역의 존재감이 빈약한 상위 라인의 스탠드마운트 스피커에 비유한 것이다.
같은 곡을 두고 클리어 프로페셔널과 유토피아로 번갈아 들어보았다. 먼저 일 년만에 신보를 내놓은 유로피언 재즈 트리오(EJT)의 <The Year After>를 CDP 트레이에 올렸다. 듣기 편안한 연주로 이미 국내 재즈 마니아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이들이 이번에는 선곡까지 국내 유저들에게 익숙한 가요를 들고 돌아왔다. 김광석부터 아이유까지 세대를 넘나드는 곡들의 공통점이라면 누구나 한 번 쯤은 들어봤던, 아니 좋아했던 곡들이라는 점이다. 익숙한 선율이 EJT 풍 재즈 연주로 바뀌었을 때 요즘처럼 선선한 날씨(미세먼지만 아니라면) 저녁과 참 잘 어울리는 곡으로 재탄생했다.
이번 앨범은 마이크를 악기와 가까운 위치에 세워두고 녹음한 듯하다. 이전 앨범과는 달리 공간을 타고 부드럽게 울려퍼지는 확산음보다는 각 악기의 직접음에 보다 초점이 맞춰진다. 수록곡 중 개인적으로 7번 트랙 ‘1994년 어느 늦은 밤’이 가장 마음에 든다. 원곡의 분위기와는 달리 EJT의 늦은 밤은 애절함보다는 담담함에 가깝다. 곡 전반에 걸쳐 이어지는 약음의 드럼 심벌이 무대 뒤편에 위치한 가운데 베이스는 곡의 중심을 잡아주고 피아노는 편안하게 주 선율을 이끌고 나간다.
클리어 프로페셔널의 표현은 보다 가볍다. 드럼 심벌의 찰랑임이 부각된다면 상대적으로 베이스의 무게감이 조금 부족하다. 메인 선율을 이끄는 피아노의 타건 또한 힘에 덜 실린다. 모든 것은 곡을 표현하는 스케일의 차이로 이어진다. 소편성 연주라 해도 대형기가 재생하는 스케일과 소형기의 것은 다를 수밖에 없는데 클리어 프로페셔널과 유토피아가 딱 그렇다. 하지만 가격대를 감안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다. 유토피아는 스스로가 가진 능력을 한껏 뽐내며 무대를 꽉 채우는 스타일이라면 클리어 프로페셔널은 본인의 개성은 줄이면서 시스템의 성향을 드러내가 위해 여유를 두는 스타일에 가깝다. 그리고 악기간의 분리도만 놓고 보자면 보다 선명한 사운드의 클리어 프로페셔널이 더 명확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분명 있다. 하지만 얇은 음선으로 인해 고역이 다소 날카롭게 표현되는 편이다.
이번에는 아예 스케일이 큰 곡을 재생해본다. 쿠법사라 불리는 테오도르 쿠렌체스가 지휘하는 무지카 에테르나 연주 말러 6번, ‘비극적’이다. 현대 가장 핫한 젊은 지휘자를 꼽으라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쿠렌치스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내놓은 앨범마다 파격에 가까운 본인만의 곡 해석을 선보이는데, 다르게 생각하는 분들도 많겠지만 개인적으로는 클래식에 막 발을 들이는 사람들이 먼저 쿠렌치스의 앨범들을 선택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보다 현대적인 해석과 그에 어울리는 현대적인 사운드로 마스터링되어 무겁고 진중한 맛은 떨어져도 확실히 듣는 재미가 있다. 쿠렌치스로 입문해서 과거 거장들의 연주들로 하나씩 거슬러 올라가는 것도 즐거운 감상 방법이 아닐까.
사실 이 곡은 듣기 전부터 클리어 프로페셔널에게 불리한 시합이 될 것이라 예상했다. 소형 스피커가 가장 소화하기 어려운 유형이 바로 대편성 곡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이 앨범은 영화로 치자면 화려한 영상미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 아이맥스를 찾아가는 것처럼 곡을 충분히 소화할 만한 스케일을 갖춘 시스템으로 들었을 때와 그렇지 못했을 때의 쾌감 차이가 크다. 예상대로 앞선 곡에 비해 두 헤드폰의 격차가 더욱 크게 느껴진다. 전반적으로 넓고 다이나믹스가 강조된 스타일의 레코딩이기 때문에 저역이 중심을 잡아주지 않으면 자칫 소란스럽게 들릴 여지가 있다. 이는 질감보다는 양감의 문제이다. 클리어 프로페셔널의 경우 디테일한 표현에 있어서는 누구와 겨루어도 밀리지 않지만 토널 밸런스가 다소 높다는 점이 약점이다. 만약 밀도 높은 진득한 성향의 진공관 앰프에 물려서 들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좋은 평가를 내렸을 듯하다.
어느 성향이든 포칼로 해결된다
이름에 걸맞게 포칼 클리어는 이제껏 등장한 포칼의 홈오디오 헤드폰 중 가장 날렵하고 깨끗한 사운드를 지향한다. 덕분에 포칼 특유의 웅장한 저역은 사라졌지만 대신 깔끔하게 떨어지는 보컬과 시원한 고역 재생 능력을 챙겼다. 여기에 적절한 매칭만 갖춰진다면 두고두고 회자되는 명기 LS3/5처럼 보컬 표현으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매력적인 헤드폰으로 사랑받을 만한 제품이다. 이로써 포칼은 소비자에게 보다 넓은 선택지를 제시해 주었다. 박력과 웅장함을 선호한다면 일리어를, 선명함과 정확한 표현력을 선호한다면 클리어를 눈여겨보자.
프리미엄헤드폰가이드 4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