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살의 첫번째 데미안

보자 카인의 증표를

by 일반토마토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그것을 단순한 문학적 비유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삶에서 몇 번의 힘든 순간을 지나고 나니 그 말이 조금씩 다르게 들리기 시작했다. 힘든 일을 마주하거나 과거의 어려움을 떠올려 보면, 나는 나름의 투쟁을 통해 한 겹 한 겹 껍질을 벗겨내고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생각은 때때로 스스로를 위로하게 만든다. 내가 겪었던 일들이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어쩌면 하나의 세계를 깨고 나오는 과정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로운 세계는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다. 어렵게 껍질 하나를 깨고 나오면 마치 태양을 마주한 것처럼 밝은 무언가가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 그 형체가 조금씩 선명해질 때쯤이면 그것이 태양이 아니라 또 다른 껍질의 경계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새로운 세계는 끝이 아니라 다음 세계의 시작일 뿐이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서 주인공 싱클레어가 처음 마주하는 ‘알’은 동네의 한 살 많은 소년 크로머였다. 크로머는 싱클레어의 약점을 붙잡고 돈을 요구하며 그를 괴롭힌다. 그때 싱클레어 앞에 나타나는 인물이 데미안이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크로머를 두려워하지 말고 맞서야 한다고 말한다. 심지어 세상이 정해 놓은 규율이나 도덕조차 두려워할 필요 없다고 말하며, 그 협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이겨내야 한다고 말한다. 심지어 크로머를 죽여서라도 말이다. 그의 말은 단순한 조언이라기보다, 싱클레어가 세상을 바라보는 틀 자체를 흔드는 질문처럼 들린다.

우리는 보통 세상을 밝은 것과 어두운 것으로 나누어 이해한다. 선과 악, 정의와 부정의 같은 구분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려 한다. 그러나 데미안은 그런 이분법적인 세계를 의심하게 만든다. 밝은 것 역시 세계의 일부이고, 어두운 것 또한 세계의 일부라는 사실을 직면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려는 의지는 그 어두운 부분을 외면하지 않고 바라보려는 용기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생각을 하다 보니 예전에 보았던 정치 서바이벌 프로그램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가 떠올랐다. 서로 다른 정치적, 사회적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사회를 만들어 가는 프로그램이었다. 참가자들은 투표를 통해 리더를 선출하고, 그 리더는 새로운 규칙을 만들며 공동체를 운영한다. 하지만 그 시스템 안에는 언제나 누군가가 탈락해야 하는 장치가 존재한다. 흥미로운 점은, 처음에는 모두의 생존과 공동체의 선을 이야기하던 사람들조차 그 상황에 놓이면 결국 누군가를 탈락시키기 위해 투표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빛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던 사람들도 생존의 문제 앞에서는 어둠과 마주하게 된다.

데미안은 이런 사람들을 ‘카인의 표식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한다. 성서 속에서 카인은 자신의 동생을 죽인 악인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데미안은 그 이야기를 다르게 해석한다. 카인이 특별한 표식을 받은 이유는 그가 악인이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 해석은 선과 악이라는 단순한 기준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인간의 복잡함을 떠올리게 만든다.

어쩌면 세계는 애초에 정해진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은지도 모른다. 특히 지금처럼 모든 것이 빠르게 공유되고 서로의 삶이 쉽게 비교되는 시대에서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린지에 대한 기준이 더욱 단단하게 굳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조금만 거리를 두고 생각해 보면,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우리가 어떻게 바라보고 선택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좋은 것과 나쁜 것, 의미 있는 것과 무의미한 것 역시 어느 정도는 내가 정의해 가는 것일 수 있다.

어제 밤 10시, 회사에서 마지막으로 불을 끄고 문을 닫고 퇴근하던 순간이 떠오른다. 하루 동안 내가 좋아하는 일에 몰입해 있다가 문을 잠그고 밖으로 나오는 순간, 갑자기 설명하기 어려운 작은 행복감이 느껴졌다. 그 순간만큼은 다른 생각 없이 일에 집중했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길 위에서 조용히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그 짧은 순간에는 낮의 분주함과 밤의 고요함, 빛과 어둠이 함께 존재하고 있었다.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즐거움도 분명 소중하다. 하지만 가끔은 아무에게도 설명할 필요 없는, 혼자만이 느낄 수 있는 조용한 만족이 있다. 그런 순간을 마주할 때 나는 문득 깨닫는다. 세상에는 이미 정해진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걸어가며 만들어 가는 세계가 있을 뿐이라는 것을.

그래서 오늘의 글을 마치며, 올해 마음에 남았던 허준희 교수님의 축사의 일부를 덧붙이고 싶다.

“여러 변덕스러운 우연이, 지쳐버린 타인이, 그리고 누구보다 자신이 자신에게 모질게 굴 수 있으니 마음 단단히 먹기 바랍니다. 나는 커서 어떻게 살까, 오래된 질문을 오늘부터의 매일이 대답해줍니다.

취업 준비, 결혼 준비, 육아 교육, 승진, 은퇴, 노후 준비를 거쳐 어디 병원의 그럴듯한 일인실에서 사망하기 위한 준비에 산만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례와 혐오와 경쟁과 분열과 비교와 나태와 허무의 달콤함에 길들지 말길, 의미와 무의미의 온갖 폭력을 이겨내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길, 그 끝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는 낯선 나를 아무 아쉬움 없이 맞이하길 바랍니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각자의 알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떤 날에는 조금씩 그 껍질에 금을 내며 밖으로 나아가고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세계가 얼마나 크거나 화려한가가 아니라, 내가 스스로 깨고 나왔다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작가의 이전글토마토의 출사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