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괴 탈, 인어 목소리

긴요하다를 정의하는 법

by 에디터 Rii


분명히 토마토가 있었다. 오늘이 여름인지 겨울인지, 아침인지 밤인지 모르겠다. 온통 알 수 없는 시간들이 흐르고 허망함에 울기를 반복했다.

여름이 다가오면 길에선 수박 향이 났다. 아주 달큰하지 않은 초록색 수박 향이 나다가, 날다가, 사람들 콧잔등에 앉아 여름을 예고하다가 또 날아가 다시 제 몸을 찾아 들어갔다. 나는 꼬박 한여름을 기다리던 아이였다. 지금은, 분명 눈앞에 있던 토마토를 빼앗긴 아이에 불과했다.

얄궂은 친구의 손목을 타고 흐르는 토마토 즙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다지 화가 나진 않았지만 친구의 뽀얗고 투명한 손목이 토마토 즙에 비치며 나는 홀린 듯 그것을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원장님의 그림자가 아니었다면 정말로 친구에게 달려들었을 것 같다. 주변에선 토마토를 빼앗겨 광분한 것으로 비쳤겠지. 내가 그 아이의 손목을 노린 것도 모르고.


처음엔 알지 못했다. 알 수가 없었다. 언젠가 우리 센터에 기초 한자 수업을 하러 주 2회 정도 찾아오는 키 큰 형을 만났다. 형은(선생님이라고 하는 게 맞지만 형이 편하게 부르라고 했다) 남자인 내가 객관적으로 봐도 잘생긴 편에 속했다. 특히 코가 아주 으뜸이었다. 옆으로 푹 퍼지지 않고 오똑한 콧볼. 부드러운 인상에 잘 어울리는 콧대까지. 나는 형을 외모만 보고 좋아했다. 수업 방식이나 목소리나 태도 따윈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다 형의 비밀을 알아버린 날이 와버렸던 것이다.


원장실 양옆으로 여자 탈의실과 남자 탈의실이 있었다. 형은 탈의실에 들어갈 일이 없다. 수업하다가 옷이 더러워지거나 다 같이 체육복으로 갈아입어야 하는 시간이 있으면 사용하는 공간이었다. 가끔 어른들 몰래 과자 먹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형은 그러지 않아도 되는 어른이었는데. 자주 그곳을 들락거렸다. 처음엔 원장실에 가는 줄 알았는데 보다 보니 남자 탈의실이었다. 궁금했다. 형이 저길 왜 들어가는지. 들어가서 무엇을 하는지. 무엇을 하길래 가벼운 걸음으로 나오는지. 나오면서 입가는 왜 휴지로 훔치는지. 휴지는 꼭 주머니에 챙겨가는지.

아 그렇지, 나는 남자다. 저 탈의실에 따라 들어가도 상관없잖아?

형을 관찰하다가 탈의실 쪽 복도로 걸어가는 걸 눈으로 좇았다. 이젠 청력에 온 신경을 쏟고 탈의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걸 확인한다. 괜히 애들은 그런다. 일어나서 움직이면 될 것을, “아, 화장실.. 화장실.. 빨리 가야겠다..” 되려 주목을 부르고 자리를 뜬다. 쓸데없는 입을 놀려선, 자책하며 탈의실 손잡이를 쥐고 문을 살짝 열어 내부를 엿봤다.


헉. 허억. 크흡.


그날 이후 형을 피했다. 티가 나게 피하고 무서워했다. 그날의 형을 묘사하자면, 흑마법사 같았다. 눈동자가 붉게 일렁였고 평소보다 입이 좀 더 컸고 손톱이 까맣게 물들었고 내 친구 세진이를 양팔로 꼭 붙잡았고 세진이의 어깻죽지를 커다란 입으로 세게 물었다.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리다가 폭발해버릴 것만 같았다. 이상한 점은 세진이였다. 세진이는 그런 일 따위 당한 적 없다는 듯 평소 같았다. 나만 이토록 두려움에 떨었다.


기초 한자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꾀병을 부려 수업을 빠지려 했지만 방금까지 시소를 열심히 탄 탓에 꼼짝없이 수업에 출석할 수밖에 없었다. 기분 탓인가? 오늘 유독 형이랑 눈이 자주 마주쳤다. 형은 입으로는 수업 내용을 줄줄 읊었지만 한 번씩 내 눈동자를 응시하며 눈맞춤 저 너머를 바라보는 듯했다. 그럴 때마다 발가벗겨진 기분에 황급히 눈을 피했지만 “세진이랑 친한가 보구나.” 때가 왔다. 나는 대충 얼버무렸다. 형은 긴요하게 할 얘기가 있다며 10분 뒤에 탈의실에서 보자고 했다. 세진이 꼴이 날까 싶어 혀가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가지 않으면 더 큰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형은, “우리 같은 사람들은 흥분하면 위험해. 드러나버리거든.” 하고 손에 든 커피를 한 모금 호로록 마셨다. 커피 향이 긴장감을 더했다. 나는 그날에 대해 물었다. 그리고 형에 대해 물었다.

“세진이는 보다시피 무사해. 그리고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해. 내가 기억을 조작시켰거든.” 형은 다시 커피를 마셨다. “음, 내가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지? 나는,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뱀파이어. 좀 다르게 표현하면 피로 영생을 사는 사람. 내가 볼 땐 너도 그런 사람이야. 하얀 피부가 자꾸 아른거리지? 그렇게 태어나서 그래. 오늘 수업이 다 끝나면 어디 같이 가지 않을래?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꼭 같이 가줬으면 좋겠어. 앞으로의 인생이 달라질 거야. 날 위해서가 아니라 널 위해서.”

나는 형의 제안을 무시할 수 없었다. 앞으로의 인생이 달라질 거라는 말. 그렇게 태어난 거라는 말. 나도 형과 같은 사람이라는 말. 달콤한 유혹이었다.


분명히 토마토가 있었다. 바깥이 추운지 더운지 모르겠다.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오늘도 나는 눈물을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형이 나를 택한 이유를 아주 나중에 알게 됐다. 세진이를 흡혈한 날, 형은 내가 그 광경을 목도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허나 누군가 황급히 도망쳤다는 직감이 들었다고 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던 나를 떠봤더니 옳다구나, 잡았다. 잡혔다.

나를 이곳에 잡아온 까닭도 분명했다. 세진이처럼 최면을 걸어 기억을 조작할 수도 있었지만 분명 그것이 가능한 기한이 있었다. 나는 그 기한을 한참 지나쳤고 형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던 게다.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로 현혹한 뒤 날 이곳에 가둬 죽지 않을 만큼씩 피를 뽑아갔다.


형은 참 잔인했다. 나는 아무리 인간의 피를 마셔도 영생을 할 수 없는 일반적인 아이였다. 형은 날 꾀어내기 위해 새빨간 거짓말을 했다. 입에 돋아나는 가시를 참아가며 인어의 노래를 흘렸다. 나는 토마토만 먹을 수 있었다. 그래야 피가 맑아지고 비린내가 나지 않는다고 했다. 형은 내 피를 참 맛있게도 먹었다.

지금이 여름인지 겨울인지 낮인지 밤인지 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기묘한 토마토만 반짝거렸다.





*긴요하다 : 꼭 필요하고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