눕지 않고 침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불콰하다를 정의하는 법

by 에디터 Rii


그럴 때마다 구미가 당겼다. 무화과의 과즙과 향을 베어 물었다. 꼴도 보기 싫게 손바닥을 타고 줄줄 흐르는 것을 그대로 두었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조각낸 하몽을 얹어 먹었다. 소복소복 눈이 내리기 시작하자 적당히 달큰한 화이트와인과 페어링 하기로 마음먹어버린다.


온 집안은 어두웠다. 노트북에 띄운 영화 역시 밝지 않았다. 싸구려 와인 잔에서 일렁이는 고가의 와인이 선물해 준 이를 초라하게 했다. 벌써 무화과를 다 먹어버렸다. 6알에 만 오천 원에 팔더라. 헛웃음이 나왔다. 취했나.


불콰한 얼굴을 잠재우려 베란다 창을 열었다. 건조한 공기가 순식간에 숨에 섞였다. 눈은 아직도 왔다. 크게 숨을 몇 번 더 쉬고 문을 닫았다. 내일은 또 다른 소란으로 몇 번이고 밭은 숨을 쉬어야 할 테니. 각자가 치르는 전쟁 속 나의 전쟁은 얼마큼의 소란을 이루고 있을지.


병마로 하루의 절반 이상을 눈 감고 있는 엄마를 간호하던 중 부장님의 결혼 소식을 들었다. 앞뒤 맥락은 기억나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설명할 일이란 건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의지대로 흘러가게 두지 않을 테니까.


침대에 누워만 있던 엄마는 자식들이 마련해둔 관 속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길로 나 역시 자리를 옮겼다. 부장님과 악수를 하고, 결혼 축하 인사를 건네고, 갈 수 없을 거라는 나만 아쉬운 말을 전하고, 다시 악수를 하고, 사회적인 웃음이 오고 가고, 3주 뒤 나를 대신할 젊은 사원이 들어오고, 나는 영영 지워질 일만 남은 순간을 두고 일어났다.


아빠의 텃밭을 찾았다. 정확히는 아빠의 소유였던 텃밭을 찾았다. 아빠의 쉼터였던 텃밭을 찾아왔다. 세월따라 황무지가 돼 버린 텃밭은 나를 반길 힘도 없이 메말라있었다. 공기가 달큼했다. 익숙한 향. 맡을 수 없을 줄 알았던 따끔한 무화과 향. 지금 보니 겨우 12보폭 정도 되는 이곳이 참 커다란 기억으로 남았다. 이제는 내 키보다 한 뼘 위에 있을 무화과나무를 올려다봤다. 아빠는, 우리 아빠는 이렇게 꼭지를 반 마디 남겨놓고 자르는 걸 좋아했다. 보기도 정갈하다며. 때 되면 채집해 주던 무화과를 매번 먹어치웠다.


이따금씩 어른거리는 무화과 향이 아빠의 얼굴과 함께 흩날렸다. 그럴 때마다 구미가 당겼다. 먹지 못해 물러버린 녀석을 손으로 꽉 쥐어 반죽했다. 온 집안에 떠도는 향. 안정을 얻었다. 술을 마시지 않아도 잠이 잘 왔다. 밤새 불특정 다수의 품에 들어갈 향기를 시샘으로 끙끙 앓으며.





*불콰하다 : 얼굴빛이 술기운을 띠거나 혈기가 좋아 불그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