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잔에 담은 사랑 #2

수렴을 정의하는 법

by 에디터 Rii


“야 김화인. 네가 지영이랑 작업해야겠는데? 콘티 짜는데 우리끼리 카메라 구도 잡기가 애매하네.”

나랑 콘티 작업을 하던 지원 선배의 한 마디로 나는 불구덩이에 집어 던져졌고 화인 선배는 노트북을 하던 중에 나와 눈이 마주쳤다.

“금방. 스캔만 하고 갈게, 지영아.”

빨리 오라는 재촉이 아니었지만 금방 온다는 말에 내심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작업을 하기도 빠듯한 시간이었기에 사적인 대화를 나눌 시간 없이 집중하기 바빴다.


“선배. 여기 타이트하게 하나만 더 찍어요.”

나는 콘티를 들고 현장의 왕 노릇을 했다. 감독 정도의 권한을 가졌다는 것이다. 연기자 팀과 제작진 팀의 호흡으로 마지막 밤을 남기고 촬영이 아슬아슬하게 끝났고 편집 팀을 맡은 사람들은 밤새 고통을 겪어야 했다. 나는 편집 프로그램을 만질 줄 몰랐지만 편히 잘 수 없는 이상한 불편함에 편집 팀과 같이 밤을 꼬박 새웠다. 결국 피곤에 찌든 얼굴로 아침 식사를 했다. 선배들은 우리와 늘 함께 먹던 아침을 거절했다. 섭섭했다. 여름 땡볕에서 고생한 탓에 영상은 좋았다. 나는 아쉬운 마음 반, 미칠 듯이 아쉬운 마음 반.


마지막 인사는 해야겠다 싶어 지원 선배에게 전화했다. “소극장으로 튀어오기!”하고 소리치는 선배의 외침에 우리는 신나게 달려갔다. 극장은 불이 꺼진 채 에어컨이 틀어져있어 서늘했다. 곧 영상기가 틀어지며 커다란 빛이 생기고 우리 영화가 재생됐다. 큰 화면으로 보니 두근거림이 배가 됐다.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지자 짙은 레드 와인빛 커튼 뒤에서 먹을 것이 잔뜩 올려진 이동식 테이블을 하나씩 밀며 지원 선배와 화인 선배가 나왔다. 술 대신 주스로, 안주 대신 다과로 차려진 작은 파티가 시작됐다. 다들 신났지만 나는 하나도 반갑지 않았다. 어쩐지 늘어진 트레이닝복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화인 선배가 연한 청바지에 나풀거리는 흰 셔츠를 입은 모습을 보니 심장이 두근거려 미칠 것 같았다.


주스가 담긴 와인 잔을 부딪치며 남은 시간을 즐겼다. 나는 어쩌다 테이블에 있던 화인 선배의 휴대전화에 눈길이 갔고 정수기 앞에서 찍은 내 사진을 배경화면으로 설정해 놓은 것을 봐버렸다. 봐선 안 될 것을 본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손에 힘이 풀려 와인 잔을 놓쳐버렸다. 깔끔하게 뻗어간 쨍그랑 소리에 모두가 놀라 나를 쳐다봤고 화인 선배가 빠르게 와인 잔을 치웠다. "괜찮아 지영아."


나는 그에게 한 번 더 반했고 거꾸로 완전히 용기를 잃었다. 괜찮다며 나를 달래는 선배의 우물진 보조개에서 마법이 나왔나 보다. 그를 보는 나의 마음이 존경심인지 사랑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그땐 ‘우상’이라고 생각했다. 더 나아가 ‘신’처럼 느껴졌다. 신은 인간을 사랑할 수 있지만 인간은 신을 사랑할 수 없다. 감히.


내 첫사랑은 벌꿀이 놓친 단내처럼 훅- 왔다 갔다. 많은 건 바라지 않는다. 내겐 충분히 특별한 사람이었기에. 그에게 나의 존재가 0에 수렴하는 무의미한 인연만 아니었길 바란다.





*수렴 : 수열에서, 어떤 일정한 수의 임의의 근방에 유한 개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항이 모여 있는 현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