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화를 정의하는 법
둥근 와인 잔에 삼분의 이 정도 담겨 있는 당신을 향한 사랑이 넘치지 않게 까치발을 들고 온갖 장애물을 아슬아슬하게 비켜간다. 두 손으로 꼭 쥔 와인 잔을 놓치지 않고 도착했을 땐, 그대는 이미 다른 이의 와인 잔을 들고 해갈하는 중이었다. 나는 그것을 다시 조심히 들고 와 가장 잘 보이는 창에 올려 두었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고 겨울이 와도 와인 잔을 치울 줄 몰랐다. 너무 바빠 잊기도 했지만 가끔씩 들여다보며 지나간 사랑을 곱씹었다. 허나 내가 어른이 됐을 땐, 와인 잔에 있던 사랑이 말라버려 흔적조차 없었다. 그렇게 첫사랑은 세월의 풍화를 이기지 못하고 희미해졌다.
“와인 잔. 첫사랑. 풍화. 키워드가 좋네. 김화인, 네 생각은 어때?”
-더위를 피해 집에서 공부합니다-라는 명분으로 한 달간의 땡땡이를 칠 수 있는 시간 중 일부를 다시 학교 활동으로 보낸다. 내가 속한 영화 동아리는 그럭저럭 학기 때도 잘 해왔지만 학업과 별개로 집중할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취지에서 4박 5일 캠프를 진행하게 되었다.
“좋아. 여운도 있고 메시지도 확실하고. 연출만 힘써주면 단편으로 잘 나오겠다.”
지원 선배의 물음에 화인 선배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공들이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원 선배의 도움으로 대학교 합숙과 촬영을 허가받았고 선배는 같이 작업하는 친구를 데려와 메인 촬영을 돕도록 했다. 아삭아삭하고 끈적하고 모순되도록 차가운 계절에 우리의 영화 제작이 시작됐다.
에어컨이 시원한 작업실에서 여름이 실감 나는 복도로 나왔다. 정수기에서 냉수를 받는데 트레이닝복의 사부작대는 소리와 밑창 두꺼운 슬리퍼를 질질 끌고 오는 발소리에 옆을 보니 화인 선배가 카메라를 들고 오는 중이었다. 뷰파인더에 눈을 대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기분이 좋아 보였다. “지영아, 찍어도 돼?” 적당한 거리까지 오고 내게 물었다. 영상이 아닌 사진 모드였나 보다. 아직도 카메라를 내리지 않는 화인 선배에게 얼른 답했다.
“찍으면, 핸드폰 배경화면 해놓기.” 내 말에 선배는 동요 않고 “자연스럽게.”라는 말만 연발했다. 장난도 안 받아주네, 싶어 심술이 나 입꼬리에 힘을 잔뜩 주고 컵에 물을 마저 채웠다.
“같이 안 가?”
“갈래요. 더워.”
호기롭게 ‘배경화면 해놓기’라고 말한 것이 민망해 도망치듯 작업실로 와버렸다. 시원한 공간에 왔음에도 부끄러움은 가라앉을 줄 몰랐다.
*풍화 : 물을 포함한 결정체가 공기 속에서 수분을 잃고 가루가 됨. 또는 그런 현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