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망을 정의하는 법
이런 식으로 이름을 숨기면 내가 모를 줄 알았나 봐, 조이.
정말이지.. 넌 그런 게 있다고 믿어?
그렇대도 별 수 없어.
이 세계는 수많은 거짓과 새로운 돌연변이들로 가득하니까.
너도 겪어봐서 알잖아.
기망하는 자들의 삶을.
벗어날 수 없다는 걸.
그 끈적이고 벗어날 수 없는 쥐덫에서 허우적댔잖아, 조이.
멀리 되돌아올 뿐이라는 걸.
내가, 조이, 그러니까 JOYI를 아는 체 했던 날은 법적 생일이었다. 가짜 신분으로 사느냐고 대외적은 생일은 겨울이었지만, 실은 봄이었다. 사기 치기 제일 싫은 계절. 그냥 이 싱그러움에 녹아 사라지고 싶은 마음뿐이다.
조이는 보란 듯 내 앞에서 물건을 떨궜다. 그리고 보란 듯 피아노 전공 책을 가장 늦게 주웠다. 보란 듯 난감한 얼굴을 피워냈고, 보란 듯 나와 눈을 맞췄다. 전공 책은 깨끗했다. 어제 산 것처럼. 이름도 학번도 펼쳐본 흔적도 없었다.
‘초짜네’
피아노를 친다기에 손톱이 불필요하게 화려했다. 핸드폰이 연달아 번쩍번쩍하는 것이 파트너 따위가 실태 보고를 바라는 것 같아 보였다.
‘봄이라고 별게 날아다니는구나’
나는 작은 날파리를 박수 쳐 잡았다. 여자는 내가 멀뚱히 자신을 바라만 보는 게 민망하고 못마땅했는지 입을 비쭉댔다. 양손 가득 짐을 풀고 뒤돌아가려던 차에 뭔가를 결심했는지 옆자리에 풀썩 앉았다. 향기가 펄럭였다. 서툴고 티 나는데 그게 밉지 않았다.
‘선수 잘 뽑았네’
말도 안 걸었다간 진짜 가버릴 것 같아서 먼저 입을 열었다.
“전공이 피아노에요?”
꼬고 있던 다리 위로 턱을 괴고 물었다. 여자는 맞다 아니다로 대답하지 않고 애매하게 굴었다. 나이가 뭐냐고 물어도 어디 사냐고 물어도 이름이 뭐냐 물어도.
“언젠가 이 이름으로 유명해지고 싶어서 지었답니다? 손 줘봐요 조..이.. 철자가 이상한데, 그냥 조이가 되긴 싫잖아요. 난 제이 오 와이 아이가 될 거예요.”
조이는 전화를 받더니 한달음에 사라졌다. 그녀는 제대로 생일선물 노릇을 했다. 봄엔 꽃을 봐야 한다며 온갖 꽃을 보러 다녔다.
‘작업을 핑계로 그냥 하고 싶은 거 하나 보네, 애는 애다.’
마음껏 하도록 맞춰주었다. 안주하도록. 여름에는 이 아이가 나와 무엇을 계획하고 있을까 기대도 됐다. 망했네. 이런 아마추어한테 넘어가다니. 깨달았지만 관계를 멈출 수 없었다. 조이는 예뻤다. 매일 사랑해란 말이 혀끝에 맴돌았다. 조이는 그런 날 눈치채기라고 했는지 잘도 내뱉었다.
“사랑해. 사랑해요. 티 나지? 티 날걸~ 사랑해, 많이.”
한 계절 동안 사랑스러운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나는 바보처럼 조이를 사랑하게 된다. 그러다 심연에 버려둔 내 주제를 잊게 된다. 더러운 본성이 조이를 탐했다. 조이의 핸드폰을. 이 행동은 조이를 사랑하는 것과 별개다. 본능이 시키는 일이다. 잠깐만 보면 된다. 화장실 간 조이의 핸드폰을 손쉽게 풀고 연락처를 뒤졌다. 평범한 이름들뿐. 그중 가장 자주 보이는 이름이 있었다.
[윤진아]
익숙하다, 익숙…. 그래.
이름이 차츰 머리에 자리를 잡음과 동시에 뒷골에 소름이 돋았다. 윤진아와의 문자메시지를 뒤졌다. 맞구나. 그 진아가 맞다. 몇 해 전 내가 수백을 뜯은 진아가 맞다. 조이는 선수가 맞다. 진아의 복수를 위한 선수였다. 조용히 핸드폰을 닫았다. 고요가 덮쳤다. 과오가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나는 조이를 어떻게 마주해야 하나. 이제 조이와 멀어지면 될 일이다.
“사랑해.”
하지만 눈앞에서 사랑한다 말하는 조이를 무슨 수로 뿌리친단 말인가. 나는 알면서도 조이를 사랑했다. 그러다 마침내 내 입에서 사랑해란 단어가 나왔을 때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조이는 결국 내 곁을 떠났다. 기어코 알아챈 나의 진짜 생일을 축하해 준 다음 날.
수백을 인출해간 빈 카드와 사랑스러운 글씨체로 적은 편지를 남겼다. 나는 우리의 끝을 알면서 외면했다. 어쩌면 조이가 마지막 매듭을 짓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미친 희망고문을 스스로에게 했던 걸지도 모른다.
조이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게다. 내가 나를 구렁텅이로 빠뜨린 날처럼 조이의 인생에도 오늘을 기준으로 진흙탕이 될 것이다. 저주가 아니다. 경험에 따른 확신이다. 나는 아무도 읽지 않을 답장을 썼다. 기망하는 삶에 제 몸을 던진 조이라는 여성에게.
*기망 : 남을 속여 넘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