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끼를 정의하는 법
생애 할애하는, 너를 친애하는 낯에 꽃이 핀다. 학생은 단조로운 교복을 입어도 해사하다는 것이 이해됐다. 줄리와 함께하는 내 모습이 그랬다. 나는 멈춰서 들꽃을 봤고 줄리는 흩날리는 꽃잎을 봤다. 그는 금방이라도 그 잎을 따라 날아갈 기세였다.
“이번 방학에 뭐 할 거야, 줄리?”
고등학교 3학년 여름 방학을 앞두고 있다. 다들 가족들과의 여행이나 자기개발을 위한 학습 계획을 주제로 담화를 나눴다. 나는 방학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 없다. 몇 주간 실시하는 보충 학습 때문에 평소처럼 학교를 등교했고 집에 있을 때는 평소처럼 집안일을 도왔다.
아, 작년엔 카메라 하나 들고 선유도공원에 간 적이 있다. 혼자 뭘 해야겠다 생각하지 않고 갔지만 꽤 만족스러운 당일치기 여행이었다. 내 여행은 이게 다다. 선유도공원에서 찍은 사진은 아무도 없는 숲에서 찍은 한 장뿐이다.
“계획 없으면 나랑 여행 갈래?”
짧은 고민을 끝내고 신나게 그러자고 할 줄 알았다. 하지만 줄리의 얼굴은 점점 수괴처럼 찌푸려졌다. 처음 보는 무섭고 못난 표정에 나는 어쩔 줄 몰랐다. 내가 큰 잘못을 했나 싶어 눈물이 흐르려던 차였다.
“그건 너무 위험하잖아. 만약에 네가 물에라도 빠지면 내가 구해줘야 하는데 나는 못해. 우리가 인적 없는 곳에서 괴한이라도 만나면? 내가 널 데리고 도망가야 하는데 나는 못해. 나는 너랑 2인 이상 입장해야 하는 곳도 갈 수 없고 놀이기구 옆자리도 탈 수 없고 솜사탕도 나눠먹을 수 없어. 나랑 무슨 여행을 가. 그런 상상하지 마 로라. 나한테 의지하는 거야?”
줄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벌써 졸업을 염두에 두고 거리 두기를 하려는 건가 싶었지만 여행 이야기가 마무리되니 어제의 줄리와 다르지 않았다. 혹시 여행을 싫어하나? 그럴 리가. 줄리는 성인이 되면 자유로운 여행가가 될 거라고 나와 엄마 앞에서 호언장담하는 것을 여러 번 들었다. 혹시 나와 가는 게 싫은 건가? 그럴 리가. 해외여행도 아니고 사흘씩이나 갈 것도 아닌데 저렇게 거절할 필요까진 없다.
나는 이후 여행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가끔 줄리가 했던 말을 곱씹었다. 물에 빠진 나를 구하지도 못하고 나를 데리고 도망가지도 못하고 나란히 앉을 수도 없고 나눠먹을 수도 없다, 아주 이상한 말이었다. 나는 그에게 친구가 아니었던가. 등교하자마자 줄리가 있는 교실로 갔다. 무슨 뜻으로 말한 건지 명확히 알고 싶었다. 다시 그가 같은 말로 겁을 준다면 그 이유까지 묻겠다.
줄리는 아직 등교하지 않았는지 없었다. 나는 줄리 자리에 앉아 그를 기다렸다. 종이 치기 5분 전 앞에 그림자가 져 고개 드니 모르는 학생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 자리야.”
자리를 바꿨나 보다. 머쓱하게 일어나 교실을 둘러보고 줄리에게 전화했다. 지각이면 놀림당할 준비하시지. 한 번, 두 번, 통화 연결음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다 끊고 다시 걸었다. 불안이 엄습했다. 뛰어오는 중인 거지?
눈이 번쩍 떠졌다. 아직 컴컴한 밤이었고 보름달이 인공조명처럼 휘영청 떴다. 창으로 들어오는 달빛이 너무 강해 트루먼 쇼가 아닐까 생각하고 피식 웃었다. 다시 눕자니 이미 잠이 다 깨버렸다. 줄리는 오늘도 진통제를 맞고 잠에 들었을까. 상상하기 싫은 괴로운 줄리의 모습을 잊으려 몸을 일으켰다. 또 어떤 걸로 줄리를 즐겁게 해줄까 생각하다 사진을 모아둔 파일을 찾았다. 자주 들여다봤기 때문에 내려앉은 먼지라곤 없었다.
고급스러운 질감의 표지를 넘겼다. 무대조명처럼 달빛이 내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췄다. 덕분에 형광등을 켜지 않아도 사진이 세세히 보였다. 보관을 잘한 덕에 번지거나 왜곡된 곳 없이 깔끔했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어느 사진에도 줄리가 없다. 다시 첫 장으로 되돌아가 사진을 다시 살폈지만 사람 형체라곤 없는 풍경뿐이었다.
그럴 리가. 학교 정문에서 나를 기다리는 줄리를 찍은 사진에서 줄리는 없었고, 새벽녘 벚나무 아래에서 피어난 것 같은 줄리를 찍은 사진에서 줄리는 없었고, 유치하게 화려한 내 가방을 메고 달려가는 줄리를 찍은 사진에서 줄리는 없었다. 인화가 잘못된 것이라고 하기엔 너무 멀쩡한 사진들이었고 내 기억은 분명했다. 분명히 줄리를 찍었는데…
꿈인 건가? 악몽인가? 단 한 번도 악몽의 내용은 바뀐 적 없었다. 항상 섬뜩하고 두려운. 직감적으로 꿈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꿈이길 바라고 있다. 무엇이 잘못된 걸까. 잠이 조금 깨면 줄리가 다시 보이려나? 생경한 기분에 찬바람을 쐐야겠다 생각했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로 숭덩 지나가고 인위적인 한색이 도드라지는 풍경을 넋 놓고 바라봤다.
저기 원래 목련나무가 있었던가? 기이하게 백목련이 활짝 피었다. 지금은 입김이 진해지는 초겨울이다. 목련이 피어서는 안 될 날씨다. 등골로 긴장이 서려왔다. 갈증이 느껴져 몸을 숙여 자리끼를 마시고 다시 창문 밖을 보는데 목련이 어느새 이팝나무로 변해있었다.
*자리끼 : 밤에 자다가 마시기 위해 잠자리의 머리맡에 준비하여 두는 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