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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높은구름 Jun 02. 2024

밀양 무봉사에서

시간(時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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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도 없는 욕심들에, 또 한없이 헛된 바람들에 스스로를 지치게 만드는 날들이 많아지고 있다.


나이 들어가면 조금씩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 하건만 어리석은 이의 마음은 작은 것도 내려놓지 못함이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계절의 변화에도 이제는 조금씩 둔해지는 걸 보면 그만큼 나이 들어가는 게 느껴져 두렵기도 하다.


계절은 이렇게 열심히 여름 준비 중인데도 말이다.

영남 알프스

그런 둔함 속에서도 생활의 작은 변화에는 크게 휘둘리며 심하게 흔들려 예민해지니 한참을 멀었다는 걸 새삼 더 깨닫게 되고 만다.


, 이제라도 그 둔함과 예민함의 의미라도 알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희망은 남아 있으니 다행이기는 하다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는 삶의 무게가 무겁다.


그 무게가 감당하기 어려운 것도 아닌데 한없이 약해지는 걸 보면 조금씩 더 나이 들어가는 게 맞나 보다.


일찍 잠에서 깬 일요일 아침은 그 넉넉함에서 오는 뿌듯함으로 인해 괜히 평일보다 더 일찍 집을 나게 된다.


덤으로 주어진 시간 같아 그냥 흘려보내도 되는데도 더 아껴 보내고 있으니, 시간이란 게 참 묘한 존재인  틀림이 없다.


사람을 나이 들게도 만들면서, 슬픔도, 기쁨도, 아픔도, 두려움도, 그리움까지도 다 잊어버리게 만드는 힘이 그 시간 속에 있다.

그러니 시간이라는 것의  힘 정말 대단다.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지만, 짧게도 또 한없이 길게도 느껴지게 할 수 있는 걸 보면 또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시간은 대체 누가 발견하고, 누가 정의 내렸을까 하는 답도 없을 것 같은 질문에도 빠져 들어 또 한참을 망상(妄想)에 사로 잡 때쯤 하얀 나비 한쌍이 조용히 날아 지나간다.


일요일 이른 아침, 꼭 오고 싶었던 곳에 오게 만든 시간의 흐름을 조심스럽게 생각해 보다가 여유 속에서 조급한 설렘으로 달려 이곳에 도착한다.

육지장전(六地藏殿)에서 바라본 밀양시내

여기는 작은 도시의 고요함과 여유로운 강흐름을 오롯이 혼자서만 독차지할 수 있는 낮은 언덕의 밀양(密陽) 아동산 무봉사(衙東山 舞鳳寺)이다.

춤추는 봉황의 터에 자리 잡은 오래된 사찰이다

무봉사(舞鳳寺)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나라를 세우기 전 태극(太極) 문양의 날개를 가진 나비가 때를 지어 여기 이곳 무봉사에 날아와 사람들이 길조(吉兆)라 기대할 때쯤, 결국 혼란스러웠던 나라는 고려가 건국되고 나서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또 1945년 일제로부터  광복하던 그 해에도 태극문양의 나비 떼들이 이곳에 나타났다고 하,  몇 해 후에는 그때의 그 나비들이 우표로도 소개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여러 좋은 일들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

태극 문양을 날개를 가진 나비들이 또 예쁘게 내려앉았으면 좋겠다.

무봉사 태극 문양 나비

비구니스님의 법회(法會) 속 불경소리는 크지도 작지도 않게 끝도 없이 맑게 흐르고, 옅은 안개도 딱 그만큼 있어줬으면 하는 만큼 일요일 오전 일상의 무게에 짓눌린 이의 마음을 가볍게 적신다.


크고 작은 아픔은 늘 그렇듯 조금만 떨어져서 보면 옅은 안갯속 이 절 아래 마을들처럼 작아져 고요해지는 걸 안다.


  조금 더 떨어져 보는 것,  그게 어디 그렇게 쉬울까 싶어 조금은 안타깝고 또 조금은 원망스러워진다

늘 변화하고 머무르지 않는 게 세상 이치임에 틀림없건만 왜 이렇게 그 순간순간들에 집착하는지는 분명 아직도 한참을 멀었음이 틀림없안타까울 뿐이다.

무봉사 석조여래좌상(舞鳳寺 石造如來坐像,대한민국 보물)

한참을 대웅전 앞 의자에 앉아 활짝 문 열린 전각 안 돌부처님과 눈을 마주치니, 이런저런 걱정은 이제 하지 말고, 그냥 시간에 맡겨두고 기다리며 받아들이라 하시는 것 같다.


보이지도 잡히지도 들리지도 않는 시간과 그 시간의 흐름은 여전히 강력하게 주위를 감싸고 언제나 그렇듯 지우고, 잊게 하고, 또 지나가게 하면서 제뜻을 다하고 있다.


모든 것을 전부 다 어떻게든 해결해 줄게 분명한데 보이지도 들리지도 잡히지도 않으니, 언제나 지금은 힘들 뿐이라 여기 잠시동안의 고요한 순간이 오히려 더 고맙게만 느껴진다.

그렇게 그 순간도 지나가는 시간 속의 작은 단위지만 고요한 순간이었기에 위로의 느낌은 길게만 느껴져 다행스럽다.


순간의 고요를 깨뜨릴까 싶어 그 부드러운 날갯짓도 숨죽이며, 이 절 이야기 속 태극 날개 그 나비는 아니지만 작은 나비 한 마리 주위를 맴돌다가, 단 한 명의 중생이라도 깨달음을 이루지 아니하면 나는 성불하지 않겠다고  대원(大願)을 세운 육지장전(六地藏殿)의 여섯 지장보살(地藏菩薩)앞 언덕아래 작은 풀잎에 앉아  더 깊은 명상에 잠긴다.

태극 문양의 그 나비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 하얀 나비들이 줄 지어 지나가는 걸 보면 아마 작지만 좋은 일들이 생길 것 같아 기대된다.

이제 시간에 맡기고 기다리면 되는 거다.


짓눌린 일상의 무게를 전부 시간에 맡겨 보내니 이제 한결 가벼워져 절집 내려오는 걸음이 여유롭다.

밀양 영남루(密陽 嶺南樓,대한민국 국보)

얼마 전 국보로 승격된 절집 밑 영남루(嶺南樓) 높은 곳에 앉아 또 한참을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다 문득 바라보니 언덕 위 절집의 그 들은 온데간데없고, 한 마리 까치만 음으로 연신 지저귀며 저 위 절집의 고요를 시기하고 있다.


아무렴 어떠리,  고요도 고요가 아님도 다 제뜻이 있지 않을까 싶어 마음 놓이기는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돌에 새겨진 부처의 깊은 깨달음을 다 이해할 리 만무하지만 쳐다보는 것만으로 마음 놓이는 걸 보면 깨닫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위로해 본다.

언젠가 시간이 흐르면 깨닫지 못하더라도 아주 조금은 느껴지지 않을까 싶어 그 또한 기대된다.


시간이 다 해결해 줄 것 같다.

시간은 그렇게 제 뜻을 다 하고 있었다.


영남루 아래 밀양강이 느릿느릿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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