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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보경사에서

가을

by 높은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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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熾烈)했던 여름의 기운이 완전히 물러가고,

이제는 그 열기조차 기억 속에서 희미해졌다.


햇살은 부드럽고, 바람은 말없이 잎을 스친다.

붉게 물든 단풍잎 하나가 바람결에 흔들릴 때마다

시간이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흘러가고 있음을 안다.


사라지는 것은 늘 아름답다.


잎이 붉어질 때, 그것은 이미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그렇게 자신이 맡은 계절을 다하고,

흙으로 돌아가 다시 뿌리의 기억이 된다.


노란 은행잎도, 지천(至天)에 피어난 코스모스도

자신의 짧은 생을 빛으로 완성해 간다.


하늘은 오늘도 유난히 높다.

그 위를 천천히 떠가는 구름이 마치 오래된 시구(詩句)처럼 느리게 번진다.


그 하늘 아래에 서 있으면 말로 다할 수 없는 설렘이 가슴을 맴돌고, 그 속 깊은 묵음(默音)이 살짝 깨어나는 듯하다.


일상(日常)은 여전히 빠르게 흐르고 그 흐름 속에서 자주 지쳐가지만,

문득 발끝에 닿은 낙엽 한 장이,

바람의 냄새 하나가,

묵은 마음을 흔들어 깨우곤 한다.

이런 작은 것들이 준 위로(慰勞)는 생각보다 오래 남는다.

그건 언젠가 잃었던 감정의 잔향(殘響)이기도 하다.


살아온 시간이 길어질수록 시간의 속도는 더 빨라지는 듯하다.

어릴 적에는 계절 하나가 영원처럼 길었는데 이제는 아쉬움 가득한 짧은 시절로 바뀌어버린다.


그래서일까,

짧게 머무는 이 계절이 더 애틋하다.

또 이토록 사랑스럽다.


오늘은 오래 품어왔던 마음을 따라 경상북도 포항(浦項)의 내연산(內延山) 자락에 올랐다.


그곳에는 천년의 숨결이 깃든 보경사(寶鏡寺)가 있다.

내연산 보경사(內延山 寶鏡寺)

신라(新羅)의 승려 지명(智明)이 창건하고 고려(高麗), 조선(朝鮮)을 지나오며 이어져온 절집.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모신 적광전(寂光殿),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의 대웅전(大雄殿),

그리고 명부전(冥府殿)과 팔상전(八相殿)이 고요히 산의 품 속에 안겨 있다.

이곳에는 이 즈음 간절한 이의 낮은 기도소리가 들려오고, 그 소리는 묘하게 따뜻하다.


마음속 먼지들이 그 소리의 파동에 조금씩 가라앉는다.


시간이 멈춘 듯한 이곳에서 그만큼의 시간 동안 흘려보낸 계절들을 되짚어본다.

보경사 천왕문(寶鏡寺 天王門)

며칠 후면 수능(修能).

전각(殿閣)마다 부모들의 기도가 깃들어 있다.

촛불 위로 번지는 불빛이 그들의 간절함을 닮아 떨 리고 있다.


기도하는 손끝마다 사랑의 무게가 있고, 그 간절함이 바람에 섞여 절집 안을 천천히 돌고 있다.


가을의 공기 속엔 그런 기도들이 있다.


말보다 깊은 온도, 눈물보다 조용한 빛.

그 마음들을 방해하지 않으려 단풍이 물드는 소리조차 삼가며 걸었다.


기도의 바람은 천천히 스며 이 절의 돌담을 감싸고, 애처롭게 스치는 이의 마음 한 켠에도 내려앉았다.


들의 간절한 기도가 모두 닿기를,

오늘 그들의 바람들이 꼭 이루어지길 또 한 번 더 빌어본다.

차분히 내려앉은 이 계절에 한참을 크지 않은 전각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는 이 시간이 더없이 소중하다.


참 좋은 계절의 중심에 나는 지금 잠시 멈추어 서 있다.


내 마음의 가장 고요한 곳에, 아직 지지 않은 빛 하나정도는 남아 있음을 느끼면서 말이다.

보경사 적광전(寶鏡寺 寂光殿)

계절이 짧아질수록 마음은 길어진다.

짧은 하루에도 오래 머물고 싶은 순간이 있다.

그곳이 오늘은 보경사(寶鏡寺)이다.

천왕문(天王門) 처마 위로 작은 구름 하나가 걸려 있다.

햇살에 스며든 그 구름이 유난히 예쁘다.

가을 참 좋다.

그 작은 구름조차도 설렘으로 만들어버리니 말이다.


지나가는 바람에도 마음이 흔들리고, 그 흔들림 속에서 잠시 머문다.


여전히 전각 안에는 애틋한 바램들이 조용히 흐르고 있다.

그 간절함들이 먼 훗날 좋은 기억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그런 기억들을 위해 이 계절에 이렇게 또 잠시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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