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본위너 Dec 25. 2023

밀푀유나베 아니야. 꽃다발이야

25년 만에 아무 일정 없는 크리스마스 날

작년에 시드니에서 보내던 것과는 새삼 다른 크리스마스. 부모님과 함께하는 크리스마스다.


나가서 화려하게 외식하고, 여행 가고, 시끌벅적한 크리스마스가 아닌 아프신 아빠를 바라보게 된 크리스마스.


성인이 되고, 부모님과 함께하는 크리스마스는 처음인 듯하다. 매번 이브날이 되면 스케줄을 짜기 바빴고, 결혼 후에는 아이가 좋아하는 일을 찾느라 분주했는데, 세월이라는 이름은 또 이렇게 새로운 크리스마스를 갖게 만들어 버린다.

수술 후, 물과 죽으로 몇 주간을 버티시면서 나보다 몸무게가 덜 나갈 정도로 변해버리신 아빠. 손녀를 보고도 웃을 힘을 못 내는 아빠. 그리고 지칠법하지만 초긍정 마인드로 버티는 엄마.


병원에서 나오는 죽이나 누룽지를 잘 드시지도 못하지만, 보기도 싫다 하시는 친정아빠는 이틀 뒤면 다시 병원에 입원을 하셔야 한다. 크리스마스라고 음식을 사도, 만들어도 드실 수가 없으니 의미가 없고, 도대체 무슨 음식을 드시면 좋을지 생각하다가 밀푀유나베를 선택해 봤다.


깻잎, 알배추. 샤브샤브 소불고기, 버섯, 육수만 있으면 되니 30분도 시간이 안 걸려서 정말 간단한데, 그에 비해 비주얼은 나쁘지 않다.

별 입맛 없다고 본 듯 만 듯하시며 

식탁 앞에 앉을 힘도 없어 쉬시던 아빠께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국물이나 조금 가져다 달라고.

그러더니 한 번만 더 드셔보겠다고 하신다.

조금 후에 몇 숟가락 더 먹어볼게라고 하신다.



이제 밀푀유나베 하면, 친정아빠가 생각나게 생겼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크리스마스라 2023년의 크리스마스는 쉽게 잊히겠지 싶었는데, 어쩌면 가장 기억에 남을 크리스마스가 될지도 모르겠다.




25년 만에 아무 일정 없는 크리스마스는,

25년간의 다른 크리스마스는 다 잊어도

잊을 수 없는 크리스마스가 되고도 남겠다.



밀푀유나베가 우리 가족의 생기 있는 날들을 위한 꽃다발처럼 보이는 날이기에.










매거진의 이전글 5월이 가기 전, 15만 조회수 알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