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큰빛 일상
나는 도전하는 것을 좋아한다.
하고 싶은 것이 많아서 그런것인지도 모르겠다.
욕심이 많아서일까? 이것을 해보다가 저것도 해보고 싶어지면 일단 해본다.
고등학생 시절 이름 모를 홍대 공연장에서 어떤 밴드가 멋지게 공연하는 모습에 반해
취미로 밴드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때 내가 선택한 파트는 베이스였는데 그 이유는 대다수 사람들이 연주하는 6줄짜리 기타보다는 4줄짜리 베이스의 묵직한 소리가 뭔가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고등학생 시절 친구들과 함께 용돈을 모아 공연장을 빌려 연주를 했던 것이 내겐 소중한 추억이자 경험이다.
대학에서는 치과기공을 전공하게 되었다. 경제, 방송에도 관심이 있었지만 치아 보철물을 제작하는 것이 뭔가 특별하게 보였다. 사람에게 중요한 치아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보철물을 만드는 과정이 재미있고 보람되었다. 군대를 가야 할 시기가 되었을 즈음 공군 의무병과 육군 치과병 중 선택을 해야 했었다. 육군 치과병원에서 경험을 쌓을 생각으로 육군에 입대했는데 군 병원이 아닌 강원도 산골 작은 의무부대로 배정받게 되었다. 훈련소에서 표창장을 받을 만큼 열심히 했는데도 불구하고 예상과는 다른 뜻밖의 결과를 얻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치과버스를 타고 강원도 산골 곳곳에 치과진료를 다녔던 경험은 내 인생에 가장 소중한 경험이자 이후 내인생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전역을 하고 치과기공실에서 인턴실습을 하던 중 알코올램프에 있던 불이 손에 옮겨 붙어 왼손 전체에 큰 화상을 입게 되었다. 붕대를 칭칭 감은 손을 보며 의사 선생님은 흉터가 생길 수 있으니 관리를 잘해야 한다고 걱정하셨다. 그렇게 몇 주간 손을 못쓰게 되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직업에 대한 걱정과 고민을 하게 되었다. 다행히 운 좋게도 상처는 깨끗이 아물었지만 마음속 고민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러던 중 친한 친구로부터 약대입시에 도전해 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조언을 받게 되었다.
고등학교 문과생이라 화학, 물리에 관한 지식이 전무했지만 도전하기로 결정했다. 만약 손을 다친다 해도 의료인으로서 사람들에게 도움을 둘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당시 치기공학과에 재학 중이었기 때문에 수업이 끝나면 타학교 타 학과에서 생물, 물리, 화학을 수강했고 모든 강의가 끝나면 오후 9시가 되었다. 그때 처음으로 정말 하기 싫어했던 혼밥도 도전하게 되었고 너무나도 멋진 경희대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며 공부의 재미를 조금씩 느끼게 되었다.
약대입시를 위해선 갖추어야 할 것이 너무나 많았다. 학점 관리, 영어성적, 필수과목 이수 등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았고 그걸 혼자서 알아보다 보니 종종 시행착오를 겪기도 했다. 주변에 나와 같은 케이스가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로는 공부를 하는 동안 지난 군대에서의 봉사경험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뭔가 욕심이 생겼다. 이왕 도전하는 거 치과 지식과 경험을 활용할 수 있는 치의학 전문대학원 입시에 도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부랴부랴 학사 자격을 갖추기 위해 생명공학과에 편입하게 되었다.
3년제의 전문대에서 치과기공사라는 면허를 따고 군대까지 다녀왔던 터라 편입 후 학비는 내게 부담이 되었다. 또한 지난 학교에서의 학점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던 터라 학점관리도 필요했기에 장학금을 타야겠다는 목표에 도전하기로 했다. 과연 문과출신인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두려움도 있었지만 결국 졸업 때까지 단 한 번도 성적우수 장학금을 놓치지 않았다. 그런데 산 넘어 산이라고 했던가. 좁디좁은 의대 합격의 문 앞에 전국의 많은 수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원하는 결과를 얻기란 쉽지 않았다. 주저앉아만 있을 순 없었다. 지난 나를 되돌아보며 내가 잘할 수 있는 것 하고 싶은 것에 대해 고민해 보았다.
다행히 대학시절 외국인 친구와 룸메이트를 하며 함께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내게 해외영업이란 직무에 도전하게끔 만들어주었다. 해외에 나가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지만 그동안 열심히 영어공부를 한 덕택에 치과 의료기기 해외영업직으로 취업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맡은 지역은 중동 아프리카 지역이었는데 당시 테러와 팬데믹 등으로 해외출장 등 업무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해외 유명인사들을 국내로 초청하는 심포지엄 등을 진행하며 해외영업의 갈증을 조금 해소할 수 있었다. 추가로 무역업무를 맡게 되면서 무역공부에 도전하게 되었고 무역관리사 자격증까지 취득하게 되었다.
그런데 눈앞에 마주하는 사람들이 의사여서인지 지난 공부에 남아 있던 미련들이 가끔씩 떠올랐다. 회사원으로 일하면서 얻는 보람에 대해서도 조금씩 의문이 들기 시작할 즈음 퇴사를 선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