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신히 삼계탕을 피한 나는 부침개를 집어 먹으며 조용히 있었다. 가능한 안 보이고 싶었다. 하지만 내 자리는 안 보이기 힘든 중앙이었다. 정사각형의 4인용 교자상을 두 개 이어 붙인 직사각형의 자리에는 부엌과 현관문 쪽으로 언니와 동호, 형부가 앉았고 부엌과 가까운 쪽에 안사돈 어른이 아빠 맞은편에 바깥사돈이 계셨다. 엄마와 아빠의 중간에 낀 나는 원치 않게 가장 중앙에 위치하게 되었다. 부부행세를 할 것 같으면 연기라도 제대로 하든가, 다른 부부처럼 옆옆이 앉으면 좋을 텐데 엄마는 그렇게까지 열심히 하고 싶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런 면에서 아빠는 탁월한 배우이거나 아니면 지금 이 순간을 진실로 믿는 것이 분명했다. 아빠는 말끝마다 '우리 세나 엄마는'이라고 했고 그럴 때마다 엄마의 인상이 미묘하게 일그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세나 엄마'는 꽤 오랜 전부터 우리 가족의 뜨거운 감자였다. 부부싸움의 단골이슈였으며, 엄마의 분노 버튼이었고, 세 자매에게는 편을 나누는 금이었다. 가끔 아빠가 그 호칭을 엄마의 요구대로 바꾸었다면 지금 아빠는 여전히 엄마 옆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엄마가 '세나 엄마'를 꺼려했던 이유는 하나와 두나 언니는 아빠의 친자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엄마가 지금의 아빠를 만난 것은 첫 번째 결혼을 실패하고 두 언니들을 혼자 키울 때였다. 아마도 엄마는 다시 결혼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외로웠던 것 같다. 엄마처럼 치밀한 사람이 왜 그런 실수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엄마는 나를 임신하는 바람에 아빠와 혼인신고를 했다. 아빠랑 싸울 때마다 한숨처럼 내뱉는 말이 있었다. '저거 임신만 안 했어도. 어휴.' 그 '저거'는 콕 집어 말하지 않아도 나였다. 하지만 아빠의 나이를 정확히 모르는 사람들은 대충 우리가 모두 아빠 자식이라고 생각했다. 엄마가 의도한 것 같지는 않지만, 아빠와 엄마의 전남편은 성이 같았다. 그래서 우리 딸 셋은 성이 같았다. 엄마의 유전자가 엄청 강력했는지 귀신같이 딸들이 모두 엄마를 닮아서 나와 언니들이 이복자매라고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아빠가 '세나 엄마'라고 하는 순간 엄마와 아빠 공동의 딸은 오직 나뿐이라고 규정하는 것 같았다.
아빠에게 나는 '우리 세나'였고, 언니는 '하나', '두나'였다. 그렇다고 아빠가 언니들을 특별히 차별하거나 미워했던 것은 아니었다. 공평하게 큰 관심이 없었고 그다지 해가 되는 행동도 하지 않았다. 아빠는 우리의 성적에도 관심이 없었고 이를 안 닦는다고 잔소리를 하지도 않았고 밤에 왜 늦게 오냐고 닦달한 적도 없었다. 그러니 공부를 못한다고 혼날 일도 없고 자식들에게 큰 기대나 책임감이 없으니 우리가 반항할 일도 없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데 아빠는 자식들과 박수칠 생각이 없었다. 언니들이 어릴 때는 아빠가 없었으니 잘 모르겠지만, 내가 아빠의 친딸이라고 아빠가 나와 더 놀아줬던 것도 아니었다. 아빠는 낮에는 나갔고 집에 오면 밥 먹고 텔레비전을 보다 잤다. 주말에는 친구를 만나서 술을 마시거나 취미생활을 했고 집에 오면 역시 또 텔레비전을 봤다. 어느 누구도 아빠의 정해진 삶을 깨지 못했다. 엄마가 난리를 치면 잠깐 하는 척했을 뿐 다시 원래의 방향대로 돌고 돌았다. 엄마와의 갈등이 극에 달했던 나의 초등학교 시절, 아빠는 엄마의 잔소리를 조금이라도 피하기 위해 꼼수를 썼다. 아빠의 꼼수는 외박을 하고 낚시를 가고 싶을 때 엄마의 매서운 눈길을 피하기 위해 나를 데리고 가는 거였다. 아빠와 낚시 여행을 함께 간 것. 내가 더 받은 혜택은 딱 그 정도였다. 그 무렵 언니들은 이미 성인이 된 후였기 때문에 아빠가 써먹을 수 있는 딸은 나뿐이었다.
아빠는 그랬다. 결코 바뀌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럴 만한 이유가 있고 나는 그래서 이렇게 살겠다고 엄마나 우리를 설득한 것도 아니었다. 왜 꼭 자신을 '세나 엄마'라고 하고 세나만 '우리 세나'라고 하느냐는 엄마의 질문 같은 비난에 아빠는 언제나 '그럼 세나 엄마를 세나 엄마라고 하지 뭐라고 해.'라고 답했다. 엄마의 잔소리가 계속되면, '알았어. 알았어. 하나 엄마라고 하면 되는 거지.'라고 얼버무렸다. 그렇게 어색하게 하루 이틀 정도를 '하나엄마'라고 불렀지만, 고장 난 시계처럼 잠시 버벅 거리다 금세 원래 방향대로 돌아갔다.
그 폭풍 속에 가장 불편한 것은 나였다. 왜 저들이 내 이름을 가지고 저 지랄인지 지긋지긋했다. 바뀌지 않는 아빠에게 매번 가시를 세우는 엄마도 미웠고, 별것도 아닌 호칭 따위 엄마가 원하는 대로 부르지 않는 아빠도 한심했다. 엄마가 그렇게 '세나 엄마'에 가족을 가르는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면 그냥 별생각 없이 지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보기에는 둘 다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는 것 같았다. 마지막에는 결국 내가 이 집에서 없어져야 평화가 찾아올 것 같았다. 내가 없으면 내 이름을 더는 쓰지 않을 것 같았고, 그러면 엄마 아빠도 싸우지 않고 언니들이 상처받는 일도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원하지도 않는 '세나 엄마' 때문에 나의 존재를 후회하는 칼날에 매번 베였다. 싸우기는 뭘 또 그렇게 자주 싸우는지, 베인 상처가 아물 때가 없었다.
언니들은 나를 미워하고 따돌리지 않았지만, 워낙에도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어울리기가 쉽지 않았다. 두나 언니는 그래도 편했다. 엄마가 바쁠 때면 예의 그 착한 심성으로 나를 엄마처럼 챙겨주었다. 하지만 하나 언니는 내가 원숭이에서 인간이 되었을 때는 이미 대학생이 되어 이 집을 떠난 후였다. 가끔 집에 와서 엄마와 아빠의 전쟁에 놓일 때 나를 보던 싸늘한 눈빛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집에서 독립한 언니의 방은 한동안도 그대로 비어있었지만 나는 쉽게 그 방에 들어가지 못했다. 하나 언니의 존재는 나에게 언제나 어려웠고 불편했다.
아빠의 그 순진한 고집이, 섬세하지 못한 태도가 엄마의 마음을 차갑게 식게 했고 언니들을 나에게서 떼어 놓았다고 생각했다.
다시 밥상 위에 오른 '세나 엄마'는 나에게 바늘방석이었다. 다행히 두나 언니는 동호에게 닭고기를 찢어 먹이느라 바빴다. 사돈 어르신들도 첫째 이름이 아닌 셋째 이름으로 엄마를 부르는 아빠에게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이렇게 앉아 있으니 새록새록 과거의 칼날에 다시 날이 섰다. 부부는 사돈의 장례식에 꼭 함께 가야 한다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나는 왜 다시 이 끝없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소환되는지 짜증 났다. 내가 이 나라를 떠나야만 해결될 문제였다. 안 봐야 되는 거다. 핸드폰으로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알아봤다. 밥이 남아있었지만 더는 입으로 들어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