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arhead - Home (1994)
Homless 집이 없던 삶
대학교 2학년을 끝내고 워킹홀리데이를 간다고 휴학을 했다. 큰 포부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글을 쓰겠다고 들어간 국문과가 적성에 맞지 않았다. 문예창작과를 갔어야 했는데 국어국문과를 간 것이 실수였다. 그렇다고 재수를 하고 싶은 생각은 티끌만큼도 없었다. 고전문학도 국문법도 현대문학도 뭐 하나 재미가 없었다. 나는 글을 쓰고 싶었지 고등학교 3학년 같은 국어 공부를 다시 하고 싶지는 않았었다.
미련 없이 휴학을 하고 워킹홀리데이 준비를 했다. 비행기나 한 번 타보자는 생각도 있었고, 영어공부는 해놓으면 언제가 도움이 되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카페, 식당, 리서치, 컴퓨터로 컬러링 하는 일까지 온갖 알바를 섭렵했었다. 한 1년은 집 앞 도서대여점에서 저녁 6시부터 12시까지 매일같이 알바를 했었다. 그 당시 책방알바 시급이 1800원, 카페 알바는 2000원~2500원 정도였는데 최저임금도 주휴수당도 근로계약서 따위도 없던 무법시대였다. 학교가 방학을 하면서부터는 풀타임으로 일을 했다. 가장 쏠쏠했던 것은 학원 총무 알바였다. 강남구 일원동 있던 보습학원이었는데 학생이 꽤 많았다. 원장님이 과학선생님이었는데 원장님의 수업준비와 강의실 관리, 복사, 교재 만들기, 상담전화받기, 문제집 판매 등이었는데 몸으로 하는 다른 알바에 비해 꿀알바였다. 원장님의 아내인지 여자친구인지 기억이 가물거리는 교정기를 낀 예쁘고 마른 부원장이 있었는데 어느 날은 뭔가에 항의하는 환갑이 넘은 셔틀기사 아저씨의 뺨을 후려쳤었다. 너무 놀라서 심장이 두근거렸었다. 다 기억이 나지 않지만, 사람이 사람을 저렇게 때릴 일인가 하는 생각에 간담이 서늘했었다. 처음부터 단기 알바로 들어간 자리여서 그만둘 무렵이 되었을 때 부원장이 영국가지 말고 직원으로 일하지 않겠냐고 하는데 서른도 안된 여자에게 맞은 뺨을 손으로 감싸 쥐고 있던 기사 아저씨의 얼굴이 떠올랐다.
대학교에서 알바하며 모은 돈 300만 원과 3개월 정도 학원 알바를 해서 모은 돈 200만 원으로 나는 영국 워홀을 갔다. 워킹홀리데이를 가려면 미리 스쿨레터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런던에 있는 비싸지 않은 어학원에 학비를 내고, 1년 오픈 비행기표와 한 달간의 홈스테이 비용을 내는데 총 200만 원 정도를 썼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남은 300만 원을 가지고 나는 홀홀히 런던으로 떠났다. 그때가 나의 기억으로 5월 초였는데, 우리나라의 봄 날씨를 생각하고 후드티를 입고 비행기를 탔는데 히드로 공항에 도착하니 마치 남극괴물이 나를 향해 입김이라도 부는 듯 뼛속까지 덜덜 떨렸다. 공항 문을 열었다 다시 닫고 이고 지고 갔던 큰 가방 속에 재킷을 하나 꺼내 입고 다시 나갔다.
지금 생각하면 그 찬바람이 영국에서의 내 삶의 전체적인 날씨였다. 가난했고 추웠고 외로웠다.
그 당시가 막 IMF가 터진 후여서 우리나라는 경제 상황이 정말 안 좋았다. 내로라하는 대기업이 어이없이 망했고 주변에는 실업자가 속출했으며 갑자기 집값이 똥값이 되었다. 그 당시 음식점을 하던 엄마도 타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손님으로 오던 회사들이 부도가 나거나 감축을 하면서 회식손님들이 확 줄었고, 사람들의 주머니는 있는 대로 오그라들었다. 집값이 폭락하면서 세입자의 전세금을 내어줄 수 없었던 엄마는 우리 가족이 살던 3층을 전세로 빼주고 창고로 세를 주던 지하를 개조하여 들어가기로 결정했었다. 빛이 정말 한 오라기도 들지 않던 완전지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떠난 영국행이었기 때문에 단 한 푼도 부모님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았다. 사실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내가 영국에 가는 것도 우리 가족에게는 이기적인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 집은 분명 가난한 것 같지는 않은데 언제나 현금이 없었다. 그때는 내가 얼마 벌어 메꿀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에 밑 빠진 독에 물을 붙는 것은 포기하고 내 삶을 살고 싶었다. 하지만 그 줄줄 새는 독에서 다만 얼마라도 가져올 생각은 없었다. 난 욕심은 있었지만 염치도 있었다.
런던에서 한 달간 홈스테이를 하면서 포함된 것은 아침밥뿐이었는데 시리얼과 우유, 주스가 다였다. 사실 나는 어릴 때부터 아침을 안 먹는 편이었지만, 홈스테이를 하는 동안은 빼놓지 않고 아침을 먹었다. 한 달간은 공부고 친목이고 당장 살 집을 구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홈스테이 비용은 너무 비쌌고, 이대로 다음 달까지 살 곳을 구하지 못하면 두 달 안에 있는 돈이 고갈될 판이었다. 죽어도 집에 손을 벌릴 수는 없었다.
불안이 많았던 나는 나름 안전을 기하기 위해 부동산을 끼고 알아봤다. 타키스탄 여자와 연락이 되어 집을 소개받았다. 잘해야 엘리자베스 시대 하녀나 고아가 살 법한 꼭대기 지붕아래 방 따위였다. 내가 누우면 책상 하나와 작은 옷장이 간신히 들어가는 방이었는데 1층에는 튀르키예 사람들이 케밥집을 하고 있었다. 방은 형편없었고 꼬리 한 홀아비 냄새가 났지만 쌌다. 난 계약을 하고 이사날짜를 잡고 나왔다.
커다란 이민가방과 기내 캐리어를 양손에 겨우 들고 올리버 트위스트의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깨끗이 비워져 있어야 할 방에 케밥집 직원인 듯한 젊은 남자 몇이 꾸역꾸역 누워 자고 있었다. 그때 내 나이가 만 20세였는데 정말 이지 머릿속이 하얘졌다. 안 되는 영어로 파키스탄 중개인에게 전화를 했는데 정확히 이해는 못했지만 분명 일이 꼬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돈도 없어 보이는 동양인 여자애에게 그녀는 이중계약을 했던 거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얼마간만 그들과 방을 같이 쓰라고 쉽게 얘기했다. 이미 한 달 치의 디파짓을 내고 중계수수료도 냈던 터라 나는 더욱 망연자실해졌다. 그럴 수 없다는 강경한 뜻을 영어를 잘 못했던 내가 어떻게 전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왜 그 당시에는 계좌이체를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돈을 받으려면 부동산으로 오라고 해서 어딘지도 모르고 가겠다고 했다.
우선 그 엉망진창인 케밥집을 나와 어학원에서 만나 친구의 집에서 잠시 신세를 지기로 하고 다시 그 많은 짐을 질질 끌고 친구네 집으로 갔다. 억울한 마음에 경찰서에 갔지만, "Go to the court."라는 얘기를 들었을 뿐이다. 아.. 영국 와서 한 달도 안 되었는데 법정에 설일이 생길 줄이야... 법원에 가는 것보다는 당사자를 만나 바로 돈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컸다. 안 주면 부동산에서 누워버릴 각오까지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로 바로 비싼 원데이 교통티켓을 사서 런던의 모든 길이 나온 AtoZ 지도 하나만 덜렁 들고 찾아갔다. 내가 다니던 어학원은 3 존 북동쪽이었는데 부동산은 어이없게도 3 존 남서쪽 끝에 있었다.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또 타고도 한동안 걸어가서야 도착했었다. 지금 생각해도 도대체 왜 그렇게 싼 집을 그 집의 정 반대 끝에 있던 부동산에서 거래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강동구 둔촌동에서 강서구 방화동 정도 거리 라고 생각하면 된다. 예상컨대, 내가 살던 캠든 지역이 그 파키스탄 중개인이 사는 동네이고 그 케밥집과 친분이 있었지 싶다.
저 멀리 조용한 런던 외곽의 주택가 가운데 부동산이 있었다. 난 잔다르크라도 된 듯이 비장한 각오로 부동산에 들어갔고 작은 사무실에 파키스탄 여자가 있었다. 수능영어에 강했던 내 입에서 나온 영어라고는 "Give me the money!" 뿐이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아주 단호한 어조로 목청껏 얘기했다. 그녀는 일어나지도 않고 마치 일꾼에게 밀린 품삯을 주듯 돈을 삐죽 내밀었다. 한순간에 살 곳이 없어진 나의 절망에 비해 그녀의 태도는 너무나 성의가 없었다. 아무리 비루한 영어실력이었지만, 분명 그녀의 사과를 듣지 못했다. 나는 앉아 있는 그녀의 얼굴을 향해 침을 뱉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어린 나의 호기가 부족하여 얼굴까지 침이 날아가지 못했다. 분한 마음에 욕도 했던 것 같다. 영국에 오기 전 갑의 횡포에 얼었던 나는 을이 되어 침을 뱉었다. 그리고는 쏜살같이 부동산을 빠져나왔다. 런던의 보라색 노을이 지고 있었다.
그 당시 어학원을 다닐 때 선생님이 노래를 들려주며 가사로 수업을 했는데 그때 가장 내 귀에 꽂힌 노래가 Spearhead의 Home이었다. 우당탕탕 하며 다시 집을 구했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침 7시부터 저녁 5시까지 샌드위치가게에서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한창 샌드위치만 만들다 보면 내가 도대체 왜 여기에 왔는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어떤 문도 뜻대로 열리지 않았고, 누구도 나를 위해 밥을 해주지 않았고 악몽을 꿔도 옆에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나는 한국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원래 계획했던 대로 10개월을 꽉 채우고 샌드위치를 만든 돈으로 유럽 여행도 했었다. 자존심이었는지 오기였는지 모르겠다.
사실 나에게는 진짜 돌아갈 집이 있었기 때문에 버텼다는 생각이 든다.
Spearhead - Home (by M. Franti)
If you are hungry I will
Bake some bread for you
If you are worried I will
hold your head for you
If you can't sleep at night I will
screen your dreams for you
And If you feel uptight I will
make everything alright for you
If the key don't work knock on the door
If the key don't work knock on the door
no matter how far away you seem I am alwalys here at h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