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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dy Apr 11. 2020

기자의 재택근무


아침 7시. 휴대전화에서 방탄소년단(BTS)의 ‘불타오르네’가 울려 펴진다. 잠에서 깬다. 아직 정신이 몽롱하지만 ‘싹 다 불태워라’는 가사를 흥얼대며 샤워를 한다. 마치 BTS 멤버 ‘슈가’에 빙의된 듯 거울 앞에서 내적댄스를 춘다. 머리를 말리고 왁스를 바르고 오렌지 주스를 한잔 마시고 정장을 걸치고 집을 나선다. 상쾌한 기분이다. 


정확히 10분 후 지하철 1호선에 몸을 맡기는 순간 상쾌함이 사라진다. 먹고 살기 위해 아침 일찍 나선 이가 너무 많다. 남녀노소 한데 어울려 “거 좀 탑시다” “밀지 마세요” 하고 전쟁이 벌어진다. 한쪽에선 어르신이 소리를 지르고, 뒷사람의 입김이 너무 가까워 옷깃을 여민다. 전쟁과도 같은 지하철서 내리면 또 마을버스를 탄다. 버스에서 하차해 수십분을 걸어야 비로소 출입처에 도착한다. 한숨 돌리새도 없이 아침 현안 브리핑이 이어진다.


불과 한달 전의 모습이다. 연봉 1억을 받는 것도 아닌데 왜 이리 고생을 해야 하는지. 두 시간이 넘는 출퇴근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그래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확산 여파로 회사에서 재택근무 명령이 떨어졌을 때 내심 기대했다. 물론 코로나 사태가 빨리 끝나야겠다만 입사 8년만에 처음으로 집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였다. 


재택근무를 앞둔 주말 5평 남짓한 오피스텔을 깨끗히 청소했다. 각종 과일과 채소, 닭가슴살도 쟁여놨다. 컵과 그릇도 샀다. 점심시간엔 가볍게 건강식을 만들어 먹고, 산책을 하고 돌아와서 계속 일 할 심산이었다. 성공한 직장인의 삶!


재택=나 자신과의 싸움

지난 3월 9일 월요일. 첫 재택근무가 시작됐다. 8시30분부터 업무 시작이다. 알람을 한 시간 늦췄다. 고작 한시간 더 잤을 뿐인데 피곤함이 싹 가신 느낌이었다. 재빨리 샤워하고 캐주얼한 니트와 면바지를 주워 들었다. 매일 양복을 입었는데 갑자기 속옷차림으로 일하면 좀 적응하기 힘들 것 같았다. 확실히 여유가 생기니까 아침 일정 정리가 좀 더 쉬웠다. 


내가 맡은 역할은 정치 분야 속보를 쓰는 것이다. 실시간으로 통신사를 체크해야 한다. 속도가 생명이다. 이런 측면에서 재택근무는 분명 도움이 됐다. 화장실도 걸어서 세 발짝이면 간다. 점심 먹으러 나갈 일도 없으니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그 시간에 좀더 꼼꼼하게 현안을 챙기는 게 용이했다. 


순식간에 오전이 흘렀고 점심 시간이 왔다. 직접 만든 샐러드를 음미한 뒤 근처 공원 산책을 나갔다. 3040 세대가 많았다. 평소 평일 운동 인원의 두배 정도는 되어 보였다. 열심히 일하다가 나처럼 잠시 바람쐬러 나온 것이리라. 오후 1시 조금 넘어서 아슬아슬하게 집에 다시 도착했다.


오후 2시쯤 되자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아예 하루동안 한 마디도 안해서 입이 바짝 말랐다. 계속 노트북을 보고 있자니 머리가 아팠고, 집이 너무 좁아서 답답했다. 시끄러운 까페에선 잘 집중이 안되고, 정부의 사회적 거리두기 지침을 지키는 차원에서 딱히 갈 곳도 없었다. 카톡방은 계속 불이 나는데 고개를 돌려도 막막한 방에 혼자 있으니 외로웠다. 


오후 6시 첫 재택 근무가 끝났다. 책상에서 침대까지 걸어서 네 걸음이라 약 5초만에 ‘퇴근’ 했다. 평소 퇴근길도 출근길 만큼 복잡했지만 홀가분한 마음으로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집으로 오는 재미가 있었다. 평소 집에 오는 길에 백화점에 들러 먹을 것도 사고 서점에서 책도 보고 했다. 퇴근 시간이 1시간에서 5초로 줄어들자 몸은 편했지만 그 소소한 재미들이 증발했다.


한 친구는 재택으로 일과 여가의 구분이 사라졌다고 했다. 원래 회사를 나서면 그 이후부터는 부장 차장의 전화가 잘 안오는데 재택근무는 퇴근이 애매해서 늦은 밤에도 상사들이 지시를 내린다고 한다. 몸이 회사에 없으니 어딘가 모르게 불안하고, 결혼한 사람들은 업무를 보면서 육아(어린이집도 문을 닫았다)와 집안일까지 해야 하니 고충이 더 크다. 회사 책상에서 긴장하며 일 하다가 마음이 풀어진 상태에서 업무를 보니 붕뜬 기분이 든다는 지인도 있었다.


귀차니즘에 무너지다    

재택 둘째날 부터는 그냥 속옷만 입고 일했다. 아침에도 씻지 않았다. 어차피 기사 하나 보내고 20분 누워있다가 다시 일어나서 또 기사를 썼다. 산책도 안 나가고, 점심은 떡볶이를 시켜 먹었다. 뭐를 만들어 먹기가 귀찮았다. 아침은 굶고 점심 저녁으로 패스트푸드를 시켜먹는 형국이 됐다. 야심차게 사놓은 브로콜리와 아스파라거스, 방울토마토는 썩어서 내버렸다. 홈트레이닝을 위해 구매한 요가매트도 방치 상태다. 그냥 누웠다가 책상에 앉아서 컴퓨터 하다가 다시 눕는 생활을 한 달간 반복하고 있다.


2주 전엔 무려 일주일 동안 밖에 안 나갔다. 늘어지게 배달 음식을 먹고 침대에 누워있는데 문득 일본의 사회 문제로 떠오른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가 된 것 같았다. 운동을 잘 못하니 살이 찌고, 거울을 보니 위축되고, 한번 밖에 안 나가니까 외출하는 데에도 결단이 필요했다. 사람이 집에 잡아먹힌 느낌이다. 


급히 인터넷을 뒤졌다. ‘재택근무 잘 하는 법’을 찾았다. 나 같은 사람이 참 많았다. ‘자꾸 가족이 일을 방해해요’ ‘처음엔 집에서 편하게 일이 잘 됐는데, 이제는 못하겠어요’라는 하소연이 봇물을 이뤘다. 자칭 전문가들은 ‘재택을 잘하는 다섯가지 비법’ 등을 정해놓고 따르라고 조언했다. 본인이 업무를 하고 있다는 걸 가족에게 정확히 주지시키고, 생활 패턴을 평소 근무때와 동일하게 유지하며, 카톡이나 메신저가 아니고 전화를 통해 동료들과 의사소통하라는 식이었다. 잘 될리가 없는 얘기들 이었다. 


재택근무를 통해 집은 말그대로 휴식을 위한 공간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집에서 일과 여가를 다 챙기다보니 혼선이 왔다. 쉬는데도 일하는 것 같고, 일하고 있는 와중에도 노는 것 같았다. 그러니 일과 여가가 각자 최대의 효용을 갖지 못하고 자꾸 섞이고 얽혀서 애매하게 됐다. 한 유행가 가사처럼 ‘집에 있는데도 집에 가고 싶었’다.


코로나 정국이 제발 빨리 끝나기를…

가족끼리 사는 경우엔 코로나 덕분에 매일 붙어 있으니 오히려 사이가 나빠지고, 간섭하고 싸우게 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각자만의 시간은 어느 정도 보장돼야 한다. 그런데 코로나가 그 일말의 자유까지 앗아갔다. 영국에선 코로나로 인한 자가격리가 부부관계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전문가들의 연구 결과까지 나왔다.  


이번 사태를 거치며 재택근무를 진지하게 고려하는 회사가 많아질 것 같다. 굳이 회사로 안 나와도 업무 결과에 큰 차질이 없으니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스마트 오피스를 본격 도입하자는 각사 임원진의 야심찬 연쇄 지시도 예상된다. 제발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재택의 단점을 명확히 파악하고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 후에 도입을 고려하는 것이 맞겠다. 일을 떠나 사원들의 정신이 피폐해 질 수 있으니.    


차가운 기계가 인간의 소통을 대신케 한 코로나 사태가 조기에 종식되길 바란다. 침 튀기며 얘기하고 웃고 떠들어야 할 인간을 조용한 동물로 강요한 코로나가 잠잠하길 기도한다. 지하철에 서로 포개져서 짜증내며 부대끼던 그 사람 냄새 나던 때가 그리울 지경이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갈 곳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것. 코로나가 직장인에게 남긴 교훈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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