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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dy Apr 13. 2020

애들 선거, 어른보다 낫네


국회의원 총선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어느때나 선거시즌은 시끄럽고 온갖 추문과 비방, 마타도어가 난무했지만 이번 총선도 어김이 없다. 정책 공약은 없고 서로의 약점만 파고들며 고소까지 운운한다. 한국의 선거는 최선을 뽑는게 아니라 차악을 선택하는 과정 같다. 덜 나쁜 사람을 뽑는데도 불행히 뽑을 사람이 없다. 경선과 본선 과정을 되짚으면 한국에서 정치인 되기 참 쉽다. 유권자가 소중한 한표를 행사해야 민주 시민으로서 기능한다는데 애초에 뽑을 만한 모집단이 없는 와중에 투표의 필요성만 강조하면 그게 올바른 참여 민주주의가 되나. 시민의 힘을 보여주자는데 정당에서 이상한 사람만 골라놓고선 뽑으라고 강요하는 것도 폭력 아닐까 싶다.


선거철이 다가오면 교육부 출입 당시 찾았던 한 초등학교 선거 현장이 떠오른다. 서울시교육청을 통해 서울의 한 초등학교를 섭외했고 혼자서 취재를 갔다.



“급식으로 흰우유 대신 초코우유를 지급하겠습니다.”


학생들 사이에서 박수가 터졌다. 초등학교 6학년 A군이 ‘씨익’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이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저는 지킬 수 없는 달콤한 약속은 하지 않겠습니다.”


당시 서울 서초구 신동초등학교 방송실에선 새 학기를 맞아 전교 어린이회장 선거 토론회가 한창이었다. 신동초는 ‘공약 토론회’라는 제도를 도입했다. 학생들이 직접 선거의 소중함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다. 후보로 나선 6학년 남학생 6명과 여학생 5명은 각자 2분간 자신의 공약을 발표했다. 이어 다른 후보들이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모든 과정은 각 교실의 TV로 생중계됐다.


전교생 1500명 중 투표권이 있는 4∼6학년 학생 750여명의 마음을 움직인 남학생과 여학생이 1명씩 한 학기 동안 학교를 대표하는 회장으로 선출되는 구조였다.


토론은 치열했다. 하지만 어른 선거에서 흔히 보는 ‘인신공격’은 없었다. 철저히 공약만을 위주로 공방이 벌어졌다. 매니페스토(후보들이 내놓은 공약의 실현 가능성을 따져보고 당선 후에도 공약을 지켜 나가도록 하는 것) 선거인 셈이다.


“월요일마다 등교시간에 음악을 틀어 학생들의 등교를 상쾌하게 만들겠다”는 기호 1번 B군의 공약이 집중포화를 맞았다. “왜 하필이면 월요일이냐” “일찍 등교해 독서하는 학생들에게 민폐가 될 수 있다” “방송반과 협의는 했나” 등의 공격이 들어왔다. B군은 “주말에 쌓인 피로를 등굣길에 풀 수 있다” “소리를 조절해 운동장에서만 들리게 하겠다” “방송반 친구에게 바로 건의하겠다”고 응수했다. 토론을 지켜보던 학생들 사이에서는 “참신한 아이디어”라는 반응과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의견이 엇갈렸다.


화장실에 휴지와 비누를 배치하고, 점심시간에 운동장을 개방하겠다는 ‘정책 발표’가 이어졌다. 여자 기호 2번 C양은 “아이들이 깐깐해서 실천 가능한 약속인지 당선을 위한 거짓인지 바로 안다”며 “어른들처럼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하면 바로 떨어지는 게 초등학교 선거”라고 말했다.


선거 방식도 치밀했다. 6학년생 18명이 자원해 선거관리위원이 됐다. 부정·부패·뇌물 선거가 없도록 캠페인을 벌였다. 학부모가 개입하는지 감시하기도 했다. 오전 10시30분부터 학교 강당에서 진행된 투표는 선관위원 감시 아래 이뤄졌다. 투표용지를 나눠주고, 유권자가 맞는지 명부를 보며 검사했다. 투표를 마치고 나오는 D군에게 “누굴 찍었냐”고 묻자 D군은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투표는 비밀이에요.”


오후가 되자 승자가 가려졌다. E군과 F양이 각각 269표, 222표를 얻어 회장에 당선됐다. E군은 자신의 공약에 따라 당장 화장실에 비누를 비치하기로 했다. “약속은 지켜야죠. 학생들에게 봉사하는 대표로서 한 입으로 두 말 하면 안 되잖아요.”





물론 애들 선거와 어른 선거는 다를 것이다. 학교회장 선거와 국회의원 혹은 지방선거(도지사 시장 등), 대통령 선거는 울림과 무게가 판이하다. 다만 때묻지 않은 아이들이 내놓은 공약과 이를 지키려는 책임감 등은 우리 어른들이 한번쯤 반추해볼 사안이다. 대의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을 대표해 법을 만들고, 지역구 주민의 삶의 질을 개선해야 할 대표자들이 이틀 뒤면 결정된다. 어차피 그밥에 그나물이고 그놈이 그놈이지만 그래도 아이들의 순수한 눈망울을 잊지 않은 이들이 많이 당선됐으면 좋겠다. 친구들의 지지를 고마워하고 무겁게 생각하는 아이들처럼 국민들과 지역구 주민들의 기대를 허투루 여기지 않는 진중한 정치인이 국회에 입성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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