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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dy May 06. 2020

이낙연과 책임의 주체


2017년 9월 강원도 철원 육군 모 부대 사격장에서 발생한 유탄에 맞아 사망한 A 상병 아버지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누가 쏜 유탄인지 알고 싶지 않습니다. 누군지 알게 되면 원망할 것이고, 그 병사 또한 얼마나 큰 자책감을 느낄지 알기 때문입니다. 아들은 군 사격장의 어처구니없는 안전불감증 탓에 희생됐지만, 부모로서 더 이상의 희생과 피해를 원치 않습니다.”  


A상병이 힘 있고 ‘빽’ 있는 집의 자녀였다면. 아마 최전방으로 배치되진 않았을 거다. 좋은 보직을 받아 편하게 군 생활을 마쳤을지도 모른다. 고된 작업을 마치고 위험한 사격장 근처를 지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불의의 위험은 어디에나 도사린다. 다만 보이지 않는 계층 구조에 따라 ‘억울한 일’을 당할 가능성은 현저히 줄거나 늘어난다.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은 그런 나라다. 진보 정권이든 보수 정권이든 기득권은 늘 있고, 이데올로기나 지향하는 가치와 상관없이 특권을 누리는 세력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욕망의 정도가 조금 다를 뿐 본질은 같다.


20대 국회의원 가운데 16.4%는 병역을 면제받았다. 공직자 청문회 때마다 자녀의 병역비리 의혹이 매번 불거지는 현실이 생각 깊은 A 상병의 아버지를 비웃는 거 같은 착각까지 들었다.

         

나는 타인을 이해하고, 남을 더 생각하고, 또 나라를 위해 애써 묻고 가겠다는 아버지의 결심에 한없는 존경과 경의를 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제발, 그러지 마시라고 하고 싶었다. 군 관계자에게 소리도 지르고 해서 가슴에 맺힌 한을 조금이나마 풀라고 조언하고 싶었다. 억울한 일을 당한 이에게는 그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라도 해서 평생의 응어리를 털끝만큼이나 떼내야 남은 이도 하루하루 살아갈 수 있다.




언론사 입사후 3년간 사회부 경찰팀에서 일했다. 무수한 장례식장을 다녔다. 주로 억울하게 간 이들이다. 2016년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사망한 청년 김용균을 두고 서울메트로와 하청업체 측은 계속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열악한 근무환경에 시달리다 가방에 컵라면 하나 남기고 떠난 고인에 대한 예의는 찾아볼 수 없다. 2017년 11월엔 제주의 한 공장에서 특성화고 학생이 사망했다. 업체는 주말까지 무리하게 일을 시켰다. 안전시설도 없고, 안전교육도 제대로 안 했다. 공장 측은 혐의를 부인하다 경찰에 가서야 죄를 자백했다.


당하기만 하다 간 가족과 지인의 죽음 앞에서 유족은 이성을 잃을 수 밖에 없다. 책임 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경우도 많다. 우리네 사회는 복잡다단하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라도 책임을 묻고 재발방지를 외쳐야 소중한 내 사람의 넋을 조금이라도 기릴 것 같은데 억울해 미칠 노릇이다. 어차피 정치인들이나 지자체장은 장례식장에서 눈도장만 찍을 뿐 별 관심이 없다. 언론과 대중의 관심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린다. 노동법이나 산업안전법은 그대로 유지되고 억울한 사람만 환장할 노릇이 된다. 무수히 많은 쇼가 반복되면서 희생자나 유족만 고스란히 책임을 떠안는다. 이들에게 '이성을 차리라'고 힐난하는 건 과도한 주문이다. 6년이 지난 세월호 사건을 두고 "그만좀 하라"는 목소리가 폭력이듯이, 지자체와 국가의 책임이 0.0001%라도 있는 사고에 대해서도 정확한 책임관계를 따져 묻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그게 유족의 한을 달래는 길이다.





이낙연 전 총리의 이천 물류창고 화재 희생자 빈소 워딩이 논란이 되는 모양이다. 그는 지난 5일 이천 물류창고 화재 희생자 빈소를 찾았다. 한 유가족이 “이번 기회에 법을 바꿔야 하는 것 아니냐. 의원님이시니까…”라고 하자 “제가 국회의원이 아니에요”고 답했다. 또 유가족들이 “고위공직자 분들이 오기만 하고 똑같은 의견만 말한다. 대안을 갖고 오지 않는다”고 항의하자 “저의 위치가 이렇다”고 했다. “높은 사람들이 왔다 갈 뿐 구체적 대안을 전해주지 않는다. 이럴 거면 왜 왔느냐”는 유가족들의 불만엔 “장난으로 왔겠느냐. 저는 국회의원도 아니고 일반 조문객이다”고 맞받았다. “사람 모아놓고 뭐 하는 거냐”는 항의에는 “제가 모은 게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답했다. 이 전 총리는 한 유가족이 “그럼 가라”고 하자 “가겠습니다”라고 답하고 나서 분향소를 빠져나갔다.


보수 언론의 짜깁기라도 선을 긋기에는 워딩이 너무 명확하다. 일단 이낙연 전 총리 측은 "지금 현직에 있지 않아 책임이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 유족들의 말씀을 잘 전달하고 이른 시일내에 협의가 마무리되도록 돕겠다"는 취지였다고 한다. 근데 총선에서 당선됐으니 곧 국회의원이 될 텐데 "제가 국회의원이 아직 아니다"라는 말은 도대체 무엇인가. 차기 대선 주자로 꼽히고 총리까지 지낸 사람이 유족의 성화를 두고 화가 난다고 책임 없다고 하는 모습은 참 실망스럽다. 평소 신중한 언행과 사려깊은 행동으로 모범이 된 이낙연씨 답지가 않아서 더 그랬다.


현 정권 지지자들은 이낙연씨 조차 실드치고 있다. 유족들이 아무나에게 화를 낸다고 힐난한다. 나는 그들의 행태가 세월호 유가족을 비판하던 일부 치들과 도대체 무엇이 다른지 묻고 싶다. 세월호는 박근혜 정권의 무능이 낳은 사고고, 이천 물류창고 화재는 아니라고? 세월호도 처음에는 청해진해운 등 업체의 실수인줄만 알았다. 다만 국정조사 등을 통해 해경의 무능, 정부의 대처 안일이 드러난 건이었다.


이천 화재도 조사를 하다보면 지자체의 관리 부실과 법적 미비가 밝혀질지 모른다. 그런데 무작정 유족을 욕하는 그들의 모습을 두고 맹목적 지지의 폐해가 너무 걱정된다. 내 일이 아니니까 저렇게 이성적인척 하는 것이다. 언제 우리에게도 저런 억울한 일이 닥칠지 모른다. 내가 유족이어도 총리까지 지내고 곧 대통령이 될지도 모르는 이를 만났다면, 평생 한번 볼까말까한 사람이 빈소에 왔다면 저렇게 했을 것이다. 정치적 지지가 한 사람의 죽음과 남은이의 슬픔까지 가르치려 하는 모습을 보며 진저리가 난다.




책임 소재에 대해서는 할말이 더 많다. 역대 대통령 뿐 아니라 문재인 대통령도 참모 혹은 지자체를 지적하고 힐난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고가 터지면 대통령이 불같이 화를 내며 재발 방지를 지시했다는 식이다. 나는 이런 뉴스 등을 보며 실소가 나오는데 꼬리자르기와 무엇이 다른가 싶다. 당연히 대통령은 바쁘고 지자체나 부처, 일반 지방기관의 실정 하나하나를 모를 수 밖에 없다. 아무리 그래도 대통령은 우리나라의 최고 어른이고 모든 사고의 1차 책임자다. 총리와 각종 공직자도 마찬가지다. 법을 만지는 국회의원도 그렇다. 안전사고 혹은 갑질이 발생하지 않도록 민생과 밀접히 접촉하며 사전에 법을 제정하고 해야 한다. 그런데도 사고가 터지면 여야는 각자 비판에 바쁘고 대통령은 참모들에게 화를 냈다는 기사가 쏟아진다. 사고를 가지고 마케팅을 하고 나는 책임자가 아니라고 발뺌하기 바쁘다. 없어 보인다.


이낙연 씨의 발언은 신중하긴 했다. 무작정 말하지 않고 조심스러웠다. "나는 국회의원이 아니다"라는 워딩은 평소 그의 성격과 닮아 있다. 실제로 이낙연 총리 측은 이렇게 해명하고 있다. "지금 현직이 아니라고 언급한 것은 책임 회피가 아닌 평소 해오던 겸손한 취지의 발언이다. 이 전 총리가 책임자에게 전달하겠다고 수차례 유족들에게 말한 것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 전 총리가 조용히 조문만 하고 오려던 것인데 실무진의 실수로 방문 사실이 알려졌고 유족들이 기대했던 내용에 부응이 되지 않은 것 같아 아쉽다. 그러나 유족들과 대치하거나 말다툼을 했다는 식은 상상할 수 없다"고. 이낙연 씨는 수행팀을 매우 강하게 질책했다고 한다. 근데 이게 비공개로 할 사안인지, 공개가 되지 않을 수 있는 사안인지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장제원 미래통합당 의원이 지적했듯이 이낙연 씨는 총리 재직시절 세월호 미수습자 5명의 장례식장에서 눈물을 보였다. 4.3 희생자 추념식에서도 눈물을 참으며 기념사를 읽었다. 광주 민주화 운동 기념식에서도 흐느꼈다. 야당은 "그 눈물들은 현직 총리로서 흘린 눈물이었나 보다”라고 비꼬고 있다.


어차피 정치인은 뭐만 해도 욕먹게 되어있다. 차라리 그럴바엔 이낙연씨도 조문객이라고 발빼기 보다는 유족의 마음을 달래는 모습을 보이는 게 훨씬 더 좋았겠다. 이낙연 씨 자체도 억울할 수 있겠다만 그렇게 따지면 행정안전부 장관, 이천시장, 경기시장, 물류창고 운영업체 등 직속 관계자를 제외하면 모두가 책임을 지지 않는 모습이 연출될 수도 있겠다. 책임 소재를 따지기 전에 정치인이자 곧 국회의원 업무를 또다시 맡을 사람, 또 전직 총리이자 대선주자로서 유족을 보듬어야 할 이낙연씨가 왜 굳이 저렇게 감정을 표출했는지 의문스럽다. 민주당이 총선에서 압승했고 차기 대권 지지도 1위를 달리는 본인에 대한 자만심인가. 평소 부하 직원을 쥐잡듯이 잡는 걸로 유명한 이낙연 씨가 본인의 역할과 위치에 대해 다시한번 반추해 보셨으면 좋겠다. 빈소 워딩을 사소한 해프닝으로 치부하기엔 그의 어깨가 너무 무겁다.




** 이낙연 전 총리가 결국 사과했다. 그는 "부끄럽게 생각한다. 유가족의 슬픔과 분노를 아프도록 이해한다. 그러한 유가족 마음에 제 아픈 생각이 다다를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인데, 그것을 충분히 인지하지 못한 것은 저의 수양부족이다. 진행되고 있는 유가족과 당국의 협의가 유가족의 뜻을 최대한 반영하면서 빨리 마무리되기를 바란다. 이번 같은 불행이 반복되지 않도록 법과 제도를 개선하는데 저도 민주당도 최선을 다할 것이다. 장제원 의원 등의 저에 대한 비판은 아프게 받아들인다. 좋은 충고를 해주신데 대해 감사하다”고 했다. 


장 의원은 "대인의 풍모가 보인다"고 평가했다. 실수를 해도 인정하는 대범함과 용기는 인정할 만 하다. 이 전 총리의 빠른 결단에 박수를 보낸다. 그러니 지지자님들, 유족 욕하는 행태 좀 그만 합시다. 언론사들도 좀 적당히 마무리를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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