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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dy May 05. 2020

'자유'형으로 자유를 찾아보세요


초등학생 시절 체육 시간은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다. 여럿이 함께 하는 운동을 난 잘 못했다. 특히 공놀이가 그랬다. 팀을 짜서 하는 스포츠의 미묘한 위계질서가 두려웠다. 축구경기를 떠올려보자. 주장과 리더가 있다. 실력이 좋은 선수의 목소리가 커진다. 팀원들은 일사분란하게 그의 지시를 이행해 공격이나 수비를 한다. 팀워크가 좋아야 경기에서 이기지만 '원팀'으로 포장되는 강제성이 싫었다. 차라리 혼자서 달리기를 하고 싶었다. 남들에게 피해주지 않고 내가 페이스를 조절할 수 있으니까. 뭐든 혼자 하길 좋아하는 내 습성은 그때부터 꽃을 피운 것 같다.


20년이 지났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곧 각종 질병을 얻었다. 술자리가 많다. 역류성 식도염, 지방간, 위염, 홍조와 손목건초염, 거북목증후군과 발음성고관절을 주렁주렁 달고 산다. 의사 선생님은 내게 수영을 권했다. 유산소와 근력 운동을 한꺼번에 할 수 있다고 했다. 손목과 발목 근육 이완에도 좋단다. 나이도 삼십대에 접어들었으니 관리를 해보자는 마음으로 최근 수영을 시작했다. 수영복와 물안경을 사면서 태평양같이 넓어질 내 어깨를 상상하며 잠시 흐뭇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수영장이 최근에야 문을 열었다. 수영장에 등록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난 여전히 물 위에서 둥둥 떠다닌다. 몸짱 남녀 사이에서 기도 죽는다. 중년 여성들로 부터 "총각 빨리좀 가봐"라고 핀잔도 듣는다. 그래도 물속에서 라인의 끝과 끝을 오고가는 이 단순한 행위가 참 즐겁다. 내 팔과 다리를 움직여 혼자서 하는 운동이라 마음이 편하다.


처음엔 수영 강습을 받을까 생각했다. 근데 그냥 자유수영 타임을 다니고 있다. 일단 정확한 자세를 배우는 게 좋겠지만 유튜브 영상을 보고 내가 실제로 해보는 식으로 수영장에 다닌다. 누군가에 맞추고 연습하고 고민하는 게 스트레스다.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물살을 누비고 싶다.


평일 밤 9시와 주말 오후 4시 자유수영 타임에 가면 사람도 별로 없다. 라인마다 3~4명 정도. 물살 가르는 소리만 가득하고 전반적으로 조용하다. 물속으로 고개를 넣으면 더 고요하다. 내 이름을 부르는 상사의 목소리, 귀를 찢는 차의 경적 소리, 시끄럽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가 없다. 도시의 온갖 소음도 사라지고 세상에 나밖에 없는 것 같다. 파아란 물속을 한가롭게 유영하며 나는 참 평화롭다.


웬 뜬금없는 평화 타령이냐고? 내 일과는 전쟁이다. 아침 8시30분쯤 출근한다. 부장과 차장, 과장이 각자 일을 시킨다. 입사 8년차가 왜 이리 일을 못하느냐고 혼날 때도 많다. 각종 민원과 항의전화가 쏟아지고 잠좀 깰라치면 점심시간이다. 오후 1시쯤 회사로 복귀해서 6시까지 정신없이 일 한다. 주말 당직도 많다. 먹고 살기 참 쉽지가 않다. 나 뿐만 아니라 모두가 비슷할 것이다. 일이 끝나면 외로워서 친구들과 만나서 술을 마시고 또 다음날 후회한다. 무료한 일상에 건강하면서, 혼자서 즐길 수 있는 취미를 찾고 있었는데 수영이라는 운동이 딱! 하고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수영을 시작한 뒤 나는 자유의 의미를 몸소 체감하고 있다. 수영 방식 이름부터가 오죽하면 '자유'형일까. 팔 한번 휘저을때 숨을 쉬어도 되고 숨을 계속 참고 가도 된다. 물장구 치는 것도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 내 마음대로다. 자유형을 하다 숨이 지치면 평영으로 전환한다. 쉬운 수영법 2개를 바꿔가며 라인을 어설프게 오고간다.


수영 고수를 자처하는 회사 선배가 충고했다. "접영같은 고급 기술도 익혀보라"고. 퍼뜩 의문이 든다. 내가 만약 접영을 배우면 무엇이 달라지나. 접영은 팔힘이 많이 필요해 배우기 어렵다. 자유수영이 아니라 강습을 들어야 한다. 쫙쫙 뻗는 동작의 접영으로 수영 피플의 이목을 끌수는 있겠지만 안 배운다고 수영장을 오지 못하는 건 아니다. 숙련자든 초보자든 25m 라인을 헤엄쳐서 끝에 도달한다는 똑같은 목표가 있다면 조금 더 빨리 도착하는 게 과연 무슨 소용인가 싶다. 그저 느긋느긋하게 물살을 즐기면 되는 것이다.


자유수영 일주일만에 1kg이 빠졌다. 몸의 변화보다도 일을 제외하면 무색무취했던 솔로 라이프에 보람찬 활동이 추가됐다는 게 가장 긍정적이다. 30대 솔로 직장인의 삶이 보통그렇다. 겉으로는 쿨한 척, 여유로운 척 하지만 혼자 지내는 휴일은 외롭다. 친구를 만나자니 너무 자주 보는 것 같고, 돈 쓰기도 좀 아깝다. 혼자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하고 싶은게 있어도 누군가가 옆에 없으면 좀 쑥스럽다. 수영은 이런 우리를 위한 운동이다.


고작 수영하나 시작했다고 너무 의미를 부여하는 것 아니냐는 친구도 있었다. 다만 먹고살기 위해 상사 등 남의 이야기에만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일상에 수영이 잔잔한 파동을 일으키고 있는 건 맞다. 무리 혹은 군중 안에서 남 눈치를 봐야 하는 내가 아니고, 온전한 나 혼자만의 시간이다. 삶이 무료하고 매일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듯한 상실감에 힘들어 하는 당신. 지금 당장 수영을 시작해보는 건 어떨까. 나는 앞으로도 어설픈 자유형을 즐기면서 내 안의 자유를 찾아 떠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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