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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dy May 05. 2020

쌍둥이로 사는 법


쌍둥이 동생이 둘째를 낳았다. 카톡으로 사진을 보내주는데 기분이 묘했다. 우리 가족은 대대로 눈이 작고 입이 튀어나왔는데 다행히 눈이 크고 이빨도 고르게 났다. 연애도 제대로 못하는 형과 달리 동생은 벌써 한 집안의 가장으로 책임감있게 살고 있다. 나와 꼭 닮은, 마냥 어렸던 동생이 어른으로서 성장해가는 모습은 퍽 새삼스럽다. 그는 나보다 한 발짝 먼저 인생이라는 도로를 차근차근 걸어가고 있다. 쌍둥이 형의 결혼을 축하하는 한 작가님의 브런치 글을 보고 쌍둥이인 내가 동생 자랑하는 글을 써야겠다고 문득 생각했다.


그와 나는 3분 차이로 태어났다. 그 짧은 찰나로 내가 형, 그는 동생이 됐다. 어린시절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와 내가 똑같은 옷을 입고 유치원에 다닌 사진이 많다. 초등학교 운동회 때도 그는 나와 똑같은 가방을 메고 아이스크림을 나눠먹으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똑같은 점퍼와 똑같은 바지, 똑같은 티셔츠를 입고 우리는 어깨동무를 한 채 서 있다. 부모님도 가끔은 누가 누군지 헷갈렸다고 하니 정말 비슷하게 생기긴 했나 보다.


나는 성격이 괴팍했다. 질투가 많았다. 용돈으로 각자 부루마블을 샀는데 동생이 구매한 제품이 더 재미있어 보였다. 그래서 달라고 떼를 썼다. 동생이 거절하자 부루마블을 몰래 집 뒤에 버렸다. 동생이 울음을 터뜨리자 나도 덩달아 울었다. 그는 어른스러웠고 나를 용서해줬다. 먹을 거로도 많이 싸웠는데 동생이 나한테 양보를 많이 했다. 고작 3분 차이인데도 그는 나에게 꼬박꼬박 형이라고 해줬다.


그와 나는 초등학교를 같이 다녔다. 몸집이 비교적 컸던 그는 나를 괴롭히던 초딩 아이들을 많이 제압해줬다. 든든했다. 과자가 먹고 싶어서 엄니 화장대 위에있던 5000원 짜리를 훔쳤는데 결국 부모님께 들켰다. 나는 울음을 터뜨렸고 동생은 자신이 훔쳤다고 했다. 과자는 나 혼자 먹었는데 미안했다.


우리 쌍둥이는 중학교는 다른 곳으로 갔다. 나는 쌍둥이로 묶이는 게 싫었다. 어려서 더 그랬다. 친구들이 나라는 객체가 아닌 쌍둥이로 우리를 지칭하는 게 싫었다. 고등학교도 따로 갔다. 시내를 걷다보면 나를 동생으로 착각해 인사하는 그의 친구들이 많았다. 애초에 성격이 밝고 쾌활한 동생과 달리 나는 조용하고 소심했다. 그래서 친구많은 그가 부러웠던 기억이 난다. 수능을 보고 나는 재수를 결심했다. 그는 현역으로 대학에 들어갔다. 재수학원을 다니며 매일을 눈물로 버텼던 나는 그가 전해주는 미팅이나 동아리 활동 얘기를 들으며 부러움이 더 커졌다.



우리는 동반입대를 하지 않았다. 같은 부대에서 상관에게 동생이 혼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동생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우리는 102 보충대에는 같이 갔다. 부대 추첨을 하는데 동생이 그렇게 빡세다는 이기자 부대에 배정됐다. 나는 2사단 노도부대 배치를 받았는데 나보다 동생이 너무 걱정되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보충대를 나와 각자 부대로 흩어지기 전에 그와 나는 손을 잡고 서로 건강하자고 했다. 사실 남 걱정을 할 때가 아니었다. 그는 사단으로 빠졌고 나는 소대까지 내려가서 소총수가 됐다. 그는 가끔 우리 부대로 전화를 걸어왔는데 목소리가 너무 똑같아서 당직서던 간부가 놀란 적이 여러번이다.


제대 후 줄곧 함께 살던 그와 나는 그의 결혼을 계기로 흩어졌다. 그가 짐을 챙겨서 나갔는데 그날 밤이 너무 외롭고 허전했다. 별건 없었다. 같이 볶음짬뽕을 시켜먹고 게임을 하고 노래를 듣던 시절인데 뭐 하나가 사라진 것처럼 마음이 허했다. 친구가 많던 그와 달리 내 가장 친한 친구는 동생이었다. 그의 결혼식에서 나는 많이 울었다. 누가 볼까봐 화장실가서 눈물을 훔쳤다. 마냥 어렸던 동생이 어른이 되는 순간 그가 행복하길 진심으로 빌었다. 내 평생의 베프인 동생이 험난한 인생을 잘 헤쳐가길 마음으로 기도했다. 옛날처럼 결혼식장에서도 동생의 지인들이 나를 동생으로 착각하고 신기해했다.




나는 기자로, 동생은 세무사로 일한다. 그의 시험 발표가 나기 전날 나는 잠을 못 잤다. 발표가 오전 9시인데 7시부터 컴퓨터 앞에 앉아 떨었다. 합격을 확인하고 바로 그에게 전화했는데 그는 짐짓 흥분하지 않은 척 했다. 나만 울고불고 난리를 떨었다. 나중에 들었는데 동생이 나와 통화한 뒤 바로 부모님께 전화해서 "엄마 저 됐어요"하면서 대성통곡했다고 한다. 귀여운 녀석이다.


그는 나보다 돈을 많이 번다. 가끔 만나면 내 후줄근한 옷차림을 보고 이것저것 사 준다. 언제 찢어진 벨트를 매고 갔더니 내 손을 끌고 페라가모 매장으로 가서 70만원짜리 벨트를 사줬다. 흡사 멜로 드라마의 한 장면 같았다. 그는 외국여행 다녀올 때마다 에르메스나 루이비똥 넥타이를 사 온다. 내가 눈이 밟혔다고 한다. 삐까번쩍한 넥타이를 할 때마다 고맙고 감사하다. 별 능력도 없는 나인데 동생 덕에 호강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다.


아직도 동생과 하루에 한번씩은 통화하는 것 같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는데 그와 얘기하면 마음이 편하다. 나는 못나서 동생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그냥 얘기를 잘 들어준다. 과거 떡볶이를 먹을까 말까 하던 유년기 쌍둥이의 고민은 이제 집과 결혼, 연애, 부모님의 건강, 진로, 월급 등으로 옮겨갔다. 둘이 함께 있으면 무서울 것이 없었던 과거처럼 서로가 조언하고 걱정하고 의논하는 것 만으로도 외롭고 힘든 서울생활을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것만 같다.




나는 가끔 우리 쌍둥이 형제의 30년 후를 생각한다. 우리 가족이 함께 모여 놀러도 가고 축하도 하고 손주들의 결혼식에서 박수치며 웃고 떠드는 장면을 떠올린다. 가족이란 것이 참 고맙고 특히 쌍둥이라는 관계는 더 소중하다. 각자 분야에서 우리 형제가 열심히 일하고 가끔 넘어져도 서로 보듬어 다시 일어났으면 한다. 터놓고 얘기하고 상의해서 보다 나은 결정을 함께 만들어 갈 수 있을 것 같다. 쌍둥이를 키우신 부모님의 노고를 생각하면서 동생아 우리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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