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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dy Jul 13. 2020

비극이 낳은 세대 갈등을 봉합하는 법


정치인들이 출마할 때마다 입버릇처럼 하는 말. "국민 통합에 앞장서겠습니다." 난 항상 궁금했다. 국민 통합이 가능하기나 한 건가? 국민들의 생각과 의견을 하나로 만들겠다는 건데 이게 가당키나 한가. 살아온 인생 궤적이 다른데 생각을 똑같게 만든다는 발상자체가 불순하다. 스포츠나 문화 쪽에 있어서는 애국심이라는 기제가 발동해 국민통합이 비교적 쉽게 이뤄질 수 있다고 쳐도 정치 영역에선 모두가 생각이 판이할 수 밖에 없다.


조국과 윤미향 사태, 인천국제공항공사 비정규직 문제가 그랬다. 당연히 다른 의견이 도출됐다. 불법적으로 또 너무나 비도덕적으로 상대방을 욕하거나 인신공격하지 않는 이상 생각의 차이는 인정해야 한다. '국민분열'이라고 비판하고 지적하기엔 정치인의 '국민통합' 발언의 의도가 좀 불순해 보인다. 애초에 통합이 불가능하다. 이렇게 되면 생각이 다른 걸 분열이라고 치부하며 표나 인기를 얻으려는 정치인의 허황된 언어들만 남는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죽음을 두고도 비슷한 국면이 이어지고 있다. 요지는 이렇다. 한쪽은 박 시장의 공을 강조한다. 인권변호사, 시민사회의 대부, 서울시정에 올인한 '친절한 원순씨'의 자화상이 그려진다. 비서의 주장은 확인되지 않았으니 박 시장을 일방적으로 가해자로 폄하하면 안 된다.


그 반대편엔 피해자와 연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여권 인사들이 너무 박 시장을 싸고 돈다. 고인의 명복을 빌되, 사실 관계를 명명백백히 밝혀 다시는 이런 위계에 의한 성 문제가 불거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박 시장의 사망으로 경찰이나 검찰 수사가 어려워진 가운데 서울시가 나서서 진상을 조사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박 시장의 유지를 잇는 길이다, 라는 이야기들.


어느 쪽이 맞다고 보기 어렵다. 둘다 이해가 가는 이야기라서 멘붕에 빠진 여론이 많은 것 같다. 박 시장의 사망 장소를 찾아가 시시덕대는 가로세로연구소나 경찰에게 '박 시장이 목을 매달아 죽었느냐'고 물었던 유튜브 신의한수같은 인간같지 않은 자들의 비판은 걸러야겠다. '여자들에게 박원순 같은 남자사람친구는 없을 것'이라는 전우용(aka 흑역사학자)이나 '내가 아는 박원순은 성추행 할 사람이 아니다'라는 여권 인사들의 망언도 마찬가지다. 너무 예의가 없다. 고인에 대한 예의만큼 피해 호소인에게도 예의를 갖춰야 한다. 아직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어도. 사실관계를 따지자는 사람들에게 "고인을 능욕하지 말라"고 해버리면 더 이상 할말이 없어진다. 영문도 모른채 서로 자기가 맞다며 박 시장의 죽음을 인용한다. 그만좀 하자..



이번에 하나 깨달은 게 있다. 박원순 시장을 둘러싼 논란은 정치권, 혹은 여야 혹은 진보와 보수의 갈등이 아니다. 세대 갈등이라는 점을 알았다.


아무리 사람이 잘못을 저질러도 오랜 기간 그를 보아온 이들은 공을 먼저 본다. 박원순 시장이 변호사로, 시민활동가로, 서울시장이라는 정치인으로 살았던 만큼 386세대와 공직자 등 일부 중년층의 그와 함께 동지로서 자라왔다. 이 사람들에게 박원순은 힘들고 어려운 이를 향해 뛰었던 빛과 같은 사람이다. 반면 젊은층은 박원순을 잘 모른다. 굳이 알아야 될 필요도 없다. 2030 세대에게 박원순은 그냥 서울시장하는 순박하게 생긴 아저씨다. 일부 인터넷 사이트에선 박원순 시장의 험한 사진을 모아 '밈'처럼 쓰기도 한다. 그랬던 사람이 성추행 의혹이 일었고 사망하니 젠더 감수성에 민감한 젊은층은 박 시장의 과를 본다.


중장년층은 거시적으로 따진다. 박원순이 가져온 권위의식의 타파, 독재에의 저항, 시민사회 활성화를 통한 기회의 다양성과 풀뿌리 민주주의의 확산을 논한다. 반면 젊은 층은 미시적으로 본다. 생활 내 갑질, 위계에 의한 성추행과 성폭력 의혹을 따진다. 아무리 사회를 위해 큰 공을 세웠고 해도 실생활에서 본이 되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를 존중하고 존경할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이 지고한 세대 갈등 사이에 타협점은 딱히 없어 보인다. 나이든 이들은 "아니 박원순의 노력을 몰라? 니네가 모르는 것들이 있어"라며 예의 운운한다. 반면 젊은 이들은 "알게 뭐야.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성추행 의혹이 있으면 밝혀내야 하는 거 아니야?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하는 것이다. 그러니 나이가 젊은 정의당 류호정 장혜영 의원이 공개적으로 "조문을 가지 않겠다"고 하고 민주당 OLD 의원들이 대놓고 '예의가 없다. 뭘 모른다'고 힐난하는 것이다. 미래통합당과 국민의당 고위층도 아마 민주당과 생각은 비슷할 것이다. 당이 다르니 대놓고 얘기하지는 못할 뿐. 결국 박원순 시장 논란은 세대 갈등이다. 그를 잘 아는 사람들과 굳이 알 필요도 없고 잘 모르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해결책은 하나 밖에 없을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어쩔 수 없어서, 인연이 있다면 그와의 추억이 우선인 게 맞다. 다만 박 시장과 인연이 없는 사람이 훨씬 더 많을 텐데 이들의 요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해찬 대표가 박 시장의 성추행 의혹을 묻는 기자에게 "나쁜 자식"이라고 한 것은 박 시장의 40년 동지로서 한 말이다. 이 대표의 발언을 두고 비판이 쏟아지는 것은 공당의 대표로서 보다 책임감을 가지고 박 시장을 그냥 성추행 의혹이 있는 공직자 아저씨로 보는 세대들의 마음을 풀어주고, 보듬으려고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날것의 면모일수도 있겠지만 정치인으로서 그렇게 닳고 닳은 이해찬이 아직도 큰 정치인의 그릇이 아니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여권 정치인 일부가 나서서 비서에게 연대한다고 해줬으면 좋겠다. "박원순은 큰 사람이었지만 과오도 있었다. 아직 진실이 밝혀지진 않았다만 어떻게든 사실관계가 확인된다면 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수도 있다"고 해줬으면 좋겠다. 박 시장은 사회에 잊지 못할 빛을 남겼지만 동시에 어둠도 흩뿌리고 갔다. 앞뒤도 따지지 않고 우리편이면 봐주는 편가르기 정치를 끝낼 좋은 기회다. 동시에 뭐만 하면 '요즘 애들은 말이야..' 하며 혀를 끌끌차는 어른(aka 꼰대)들과 불만으로 가득한 젊은 층이 조심스럽게 손을 잡고 대화를 나눌 계기를 만들 수도 있다.


그러니 나서달라. 어른들이, 여권이, 기득권이, 박원순의 동지와 친구들이 먼저 나서달라. 성추행을 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비서를 보듬고 연대하고 사실관계 확인을 도와달라. 고인을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이 죽으면 모든 걸 묻자는 한국만의 뒤틀어진 정 얘기는 제발 좀 그만하고 우리 앞에 놓여진 미래를 보아달라. 나이든 당신들이 아니고 좀더 나은 사회와 세상을 살아가고 싶은, 또 살아가야 할 우리 젊은이들을 봐달라.


국민 통합은 불가능한 이야기지만 불가능하지 않을 수도 있다. 박원순 시장 사망이 우리에게 준 상처와 고통을 여무는 과정에서 국민통합이 조금이나마 가능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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