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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dy Aug 14. 2020

류호정과 후배권력


지난 4일 류호정 정의당 의원의 ‘원피스 등원’이 화제가 됐을 때 여야 의원 몇몇에게 의견을 물었다. 응원하는 이도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기본적인 예의는 지켜야 한다” “대부분이 불편한 정장을 입는 건 이유가 있다”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아무도 대놓고 류 의원을 지적하지 않았다. 오히려 “꼰대 정치가 청년 정치를 억압하면 안 된다”는 응원이 쏟아졌다. 미묘한 변화가 읽혔다. 


‘나때는 말이야’로 대표되는 꼰대는 어느새 조롱의 대상이 됐다. 변화에 동조하지 않더라도 꼰대처럼 보이기 싫어 이를 수용하는 척 하는 선배 혹은 관리자가 많을 수 있겠다 싶었다. ‘90년대생이 온다’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꼰대 체크리스트가 유행처럼 번지며 “요새 이런 거 시키면 꼰대 소리 듣는다던데” 하는 상사가 점점 늘어나는 분위기다. 


자의든 타의든 권위주의의 물이 빠지고 새로운 사회 질서가 안착되고 있는 게 신기하다. 류 의원의 의상 해프닝은 정치 영역에서 주변부로 여겨졌던 Z세대(만 19~24세)와 밀레니얼 세대(만 25~39세)가 X세대(만 40~50세)와 86세대(만 51~59세)를 압도하며 어젠다를 제시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평가할 가치가 있다. 시대가 달라지고 있다.

 

변화는 저항을 부른다. 실제로 기성세대를 중심으로 불만도 나오고 있다. 후배들이 치고 올라온다는 위기감이다. 경험과 연륜은 무시하고 무모한 패기에만 값을 쳐준다는 비아냥이다. 청년에게만 각종 특혜를 주고 중년은 퇴물 취급한다는 억울함도 여전하다. 

 

최근 언론계를 중심으로 유행하는 ‘후배권력’이라는 용어도 이런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처음 들었을 땐 어감이 이상했다. ‘후배’와 ‘권력’은 마치 물과 기름처럼, 도저히 어울리는 성격의 단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후배권력을 지적하고 개탄하는 이는 분명 선배일 텐데, 선배가 후배보다 힘이 없다는 게 말이 되는가. 아무리 위계질서가 해체되고 있다곤 해도 여전히 선배는 후배에 비해 많은 것을 갖고 있는데. 


 

이 말을 처음으로 썼던 한 일간지 고참 기자는 다수의 후배가 소수의 선배를 다수결로 억압하고 있다고 했다. 후배들이 똘똘 뭉쳐 회사의 논조와 방향을 결정하고, 진실을 보도하려는 선배의 의지를 힘으로 막고 있다고 주장했다. 많은 이가 여기에 동조하면서 인터넷에 때아닌 세대갈등이 번지는 상황이다.

 

사실 언론사만큼 아직도 상명하복이 통용되는 조직은 별로 없을 것이다. 당연한 측면이 있다. 기자는 펜 하나로 사람의 목숨을 좌지우지 할 수 있다. 초짜 기자가 제대로 교육받지 않고 쓰는 기사는 위험하다. 그렇기에 숙달된 선배의 지도가 필요하다. 후배는 선배의 가르침 속에 펜의 무게를 깨닫고 사실 앞에 겸손함을 배운다. 

 

다만 칼 같은 교육과 별개로 선후배 간 활발한 토론이 필요한 곳 또한 언론사다. 고참 기자도 사람이기에 틀릴 수 있다. 기자 생활을 오래하면 매너리즘에 빠질 가능성이 있는데, 신참은 일반인의 입장에서 새롭게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부장과 데스크가 현장에 나가 있는 기자의 말을 무시한다면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한 기사가 나온다. 그러니 선배가 질문하고 후배가 답하고, 또 반대로 하고, 수없이 얘기하고 싸우고 해야 살아있는 보도가 가능하다. 

 

후배권력이란 말을 쓰는 순간 이러한 건전한 토론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선배에 비해 지식과 경험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사회를 보다 좋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사명감은 후배들도 똑같이 가지고 있다. 수많은 후배가 저널리즘 원칙에 의거해 기사 방향에 의견을 내면, 선배도 일단 들어봐야 한다. “너희는 완성된 기자가 아니다”라 일축하지 말고 본인이 놓친 것은 없는지 돌아봐야 한다. 그래야 선후배 간 대화가 되고, 좋은 기사가 생산돼 보다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류호정 의원은 원피스 논란에 대해 “국회의 권위라는 것이 양복으로부터 세워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국민을 위한 법을 만드는 게 국회의 일이고, 거기에 충실하면 복장이 무슨 상관이냐는 것이다. 언론사도 마찬가지다. 좋은 기사를 쓰는 게 우선이지, 연차를 따져 피아를 구분하는 게 도대체 무슨 소용인가. 그 구별지음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후배 권력은 없다. 단지 열린 선배와 닫힌 선배만 있을 뿐. 부디 후배권력이란 미명(微明)이 류호정 해프닝처럼 조용히 지나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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