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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dy Feb 13. 2021

민주화 세대, 유산찾기를 멈춰주세요


어릴적 접한 책이나 영화, 소설은 단편적이었다. 권선징악의 줄거리가 태반이었는데 초딩이었던 나는 특히 정권 찬탈, 혹은 권력 개혁 이야기 그 이후가 궁금했다. 권력을 바탕으로 악한 정치를 행하던 왕을 몰아내고 집권한 착한 세력은 계속 착할 수 있을까? 사연을 가지고 태어난 주인공이 갖은 역경을 이기고 동료를 모으며 결국엔 악을 응징하는데 그 이후 선이었던 주인공은 계속 선일 수 있을까? 전 정권과 달리 오래오래 백성의 칭송을 받으며 선정을 베풀 수 있을까?


쉽지 않은 일이다. 공통의 적이 있으면 우리편도 단합이 잘 된다. 크고 작은 불협화음이 벌어지지만 절대악 앞에선 일단 힘을 합치고 보자고 한다. 다만 악이 사라지면 공통의 목표도 산화한다. 그때부터 크고 다른 의견 차이가 수면위로 떠오른다. 사소한 것에서 시작된 불만과 갈등이 증폭되고, 악을 물리친 선의 지도부는 누군가에 의해 또다른 악으로 치부될 가능성이 커진다. 사람은 각자 생각이 다르고, 누구에게나 힘과 권력을 탐하는 본능이 있기에 그렇다.   


한국의 근대사에도 비슷한 논리를 적용할 수 있겠다. 민주시민들은 권위주의 정권과 군부를 몰아냈다. 악이었던 공통의 적을 몰아냈다. 시민이 힘을 합친, 대단한 성과다. 꿈에 그리던 민주화정부가 들어섰는데, 우리는 지금 살 만한가? 당연히 유신독재, 엄혹한 군부 시절과 비교하긴 어렵지만 민주화만 되면 모든게 나아지고 지상낙원이 올 줄 알았는데, 과연 그런가?


서울과 지방의 격차는 날고 커져가고 치솟는 집값에 오르는 물가, 코로나19 영향이라고는 하지만 취업은 갈수록 어렵고 저출산 고령화 5포세대 젊은 층의 좌절과 세대갈등 문제가 동시다발적으로 커져가고 있다. 최장집 교수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서 말한 대로다. 민주화 이후 오히려 정치 사회문화가 더 나빠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항상 큰 목표를 이룬 이후가 더 중요하다. 그때부터 시작이다. 그동안 큰 적에 가려 보이지 않던 문제가 터질 수 있으니 새로운 관점과 가치관으로 변화에 접근해야 한다.



설 연휴 내내 불거졌던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서울시장 예비후보 캠프 상황실장인 박도은 보좌관의 페이스북 사태를 보면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떠올랐다. 이른바 개혁을 이룬 사람들의 '유산 놀음'이라 명명할 수 있겠다.


엄혹한 제4~제5공화국 가운데 목숨을 걸고 민주화 운동을 이끈 이른바 386 세대의 자부심은 대단한 것이었다. 큰 목표를 이뤄냈다는 자신감은 곧 부채감으로 바뀌었다. 시대가 변화하고 젊은 세대가 치고 올라오며 이들은 공포감에 휩싸였다. 민주화를 이뤄낸 자신들의 성과를 모르는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자리를 대체할까 전전긍긍했다. 이미 본인들은 민주화를 이뤄낸 그 공로로 각종 정치권이나 재계, 학계를 점령하고 돈과 명예를 독차지하고 있으면서도 불안감을 느꼈다.


그러니 꼰대 혹은 아재가 된 386은 계속 외친다. 우리때는 말이야, 나때는 말이야.. 데모를 주동하고 사회학 서적을 독학하며 공부했다는 무용담 속에는 후배를 향한 폭력, 여성을 향한 가부장적인 행태와 위계에 의한 성폭행, 가스라이팅, 맨스플레인은 담겨있지 않다. 민주화라는 대를 이루기 위해 소로 치부돼온 인권침해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니 거창한 담론보다 생활밀착형 이슈를 강조하는 밀레니얼 세대에게 386의 말이 먹힐리 없다. 그들의 희생과 노력덕에 민주화 시대를 살며, 투표로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뽑고, 해외여행도 다니고, 주말마다 이마트와 스타필드, 스타벅스를 다니며 하하호호 하는게 감사하고 고맙지만 그렇다고 딱히 그들의 말과 외침이 와닿지는 않는다. 어쩔 수 없다.


똑똑한 젊은 세대가 모를리 있겠는가. 관심없어 보여도 역사속에 녹아있는 선배 세대의 노고를 다 안다. 그런데 자꾸 어른들이 나서서 "너 고마워 해야돼" "선배들의 희생덕에 너희가 사는거야" 하면 더 없어 보인다.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서 그들이 남긴 유산은 찬란히 빛나지만,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유산을 들먹이는 순간 빛이 바랜다. 이제 북한과 독재라는, 당장 물리쳐야할 거대한 적은 사라졌다(북한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일단 더 시급한 것들이 있다).


대신 사소하지만 중요한 생활밀착형 문제들이 남아있다. 대학 학비가 비싸고, 교육은 대물림되며 젊은이들이 연애와 출산을 포기할 만큼 먹고 살기가 힘들다. 노인은 늘어나는데 맞춤형 복지제도는 부족하다는 목소리가 많다. 진보든 보수든 일단 정권을 잡으면 국민들이 겪고 있는 이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런데 갑자기 '너네 이만큼 사는 것도 선배들 덕'이라면 누가 그런 개소리를 듣겠는가. 먹고 살기가 힘든 상황에서 386의 꼰대질은 민주화 운동의 덕으로 잘먹고 잘사는 기득권층이 과거 향수에 빠져 본인들이 해야할 일을 제대로 안하고 회피하는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안타깝지만, 이게 현실이다.



박도은 보좌관이 페이스북에서 이언주 국민의힘 부산시장 예비후보를 비판한 것은 이 후보가 우상호 후보의 20년전 룸살롱 출입을 수면위로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20년 전인 2000년 5월17일, 민주당 386 정치인들은 5·18 기념일 전야제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광주를 찾았고, 행사가 끝난 후 광주 시내에 위치한 '새천년 NHK'라는 룸가라오케에서 여성 접대부를 대동하고 술자리를 가졌다고 한다. 그런데 이 자리에는 당시 36세의 김민석, 37세의 송영길, 38세의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1989년 밀입북했던 운동권 출신 임수경 전 민주당 의원이 2000년 5월24일 한 인터넷 사이트에 '5월17일밤 광주에서 있었던 일'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리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우상호 후보는 최근 "과거의 내 실수에 대해서는 반성해 왔고 거듭 사과 드렸다"고 이를 인정했다. 이언주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우 후보까지 인정했던 과거인데 캠프 상황실장이라는 분은 이언주를 향해 "네가 함부로 깔만한 사람 아니다"라고 한다. 아무리 시간이 흘렀어도 서울시장 후보가 룸살롱에 간 것은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 탓에 치러지는 선거에 있어 젠더 이슈로서 제기할 만한 사안인데도 우상호를 비롯한 민주화 선배들 때문에 너희가 편하게 사니까 가만히 있으라고 한다. 21세기에도 그놈의 386 유물찾기가 계속되고 있다.


이미 충분히 받을대로 받을 유산과 특혜를 놓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민주화 운동 세대의 모습이 안쓰러우면서 딱하다. 이미 대학서도 운동권 대신 학생들의 생활 편의를 강조하는 비운동권이 대세가 되었는데 기성정치판서는 아직도 386이 먹히고 386이 득세하고 민주화를 자신들의 세력 확장의 도구로 이용하니 가슴이 아프다. 여야와 이데올로기를 막론하고 진짜 한번 확 갈아엎어야 그놈의 유산 타령이 좀 가라앉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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