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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dy Feb 15. 2021

나는 셀럽들의 학폭 사태가 반갑다


내가 중딩일 당시 분명 일진은 존재했다. 그저 집 학교 학원을 쳇바퀴처럼 돌던 나인데 우연히 속칭 '노는 애' 였던 A와 짝꿍이 됐다. A는 뭔가 애매했는데 놀긴 노는데 그렇다고 또 엄청 노는 건 아니고 엄청 놀고 싶은데 엄청 노는 무리엔 끼지 못하는 '그냥' 노는 애였다. A의 표현에 따르면 1.5진 정도 됐달까. 1진이라고 얘기하고 다니기엔 짱한테 맞을것 같고 그렇다고 평범한 애들(나 같은 부류)과는 엮이고 싶지 않으니까 1.5진 정도 되는 것이다.      


1진에 들어가고 싶어 안달난 A에게 나는 관심 밖이었다. 무료하기 짝이 없던 내게 A는 아주 훌륭한 관찰감이었다. 사회문화 시간에 배웠던 '준거집단'의 개념을 여실히 체감했던 순간이었다.     


일단 쉬는 시간 매점 가는 타이밍이 중요하다. 일진은 누구보다 먼저 매점에 갈수 있었지만 보통 빵셔틀이 일진을 대신해 매점을 방문한다. 하지만 가끔 셔틀이 아프거나 할때 그 역할은 1.5진에게로 넘어간다. 공부나 운동을 잘하거나 평범하지만 나대지 않는 다수에겐 심부름을 시키지 않는게 짱의 철학이었던 것 같다(지금 생각하면 매우 사려깊은 짱이었던 듯).    

  

결국 짱은 엄청 큰소리로 A를 부르며 옥수수빵(빵이 10이면 느끼한 옥수수크림이 0.01만큼 발라져있다)을 사오라고 종종 시켰다. 그때마다 A의 표정에는 다양한 감정이 묻어났는데 일단 자기도 명색이 1.5진인데 약간 부끄럽고 거부하고 싶지만 그러자니 일진은 더욱 물건너갈것 같은 느낌의 복잡미묘한 것들이다. A는 닝기적 거리며 일어났다. 그리고 급하게 어디론가 사라졌는데 알고보니 옆반의 만만한 B(A와 비슷한 부류였지만 담배는 피지 않았기 때문에 2진정도에 랭크된)에게 이 심부름을 다시 맡기곤 했다.     


또 한가지. 일진은 항상 수학여행을 가면 다른 학교와 싸워야 할 의무가 있다. 거의 3년 내내 싸움이 벌어졌는데 중요한 건 엔트리를 짜는 거다. 10초이상 쳐다봤다든지 하는 말도안되는 이유로 싸움을 걸게 되면 일단 가볍게 충돌 후 어디서 만나기로 한다든가 하는 것이다. 때아닌 백분토론이 이어지는데 여기서 최종 엔트리에 껴야 비로소 일진이 된다. 너무나 아쉽게도 A는 몸은 날렵했으나 키가 작고 왜소해보였다. 결국 그는 제외됐고 일진의 명예이자 특권인 교무실 앞서 손들고 서있기를 시전하지 못했다. 아, A여... 너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불꽃같은 사나이의 우정으로 함께였던 중딩 시절 일진들이여 당신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 궁금하다.     



일진들은 하나같이 담배를 피웠다.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 화장실에 가면 그들은 환풍기 근처에서 옹기종기 모여서 담배를 피웠다. 그들에게 담배를 피워야 할 정도로 어려움이나 고난이 있었을리 없다. 그냥 어른이 되고 싶어서, 남들과 다르고 싶어서 피운 것이다. 가끔 그들은 내게 망을 보라고 시켰는데 괜히 내가 굼떠서 그들이 선생님에게 잡힐까봐 노심초사했다. 코를 찌르는 담배 냄새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으나 그들은 당당하게 교실로 돌아갔고 선생님들은 냄새를 잘 맡지 못했다. 그들이 담배를 어디서 어떻게 조달하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대개 중딩같지 않게 노숙했으니 사복을 입고 어디 구멍가게같은 곳에서 샀을 터다. 실제로 학교 주변 잘뚫리는 구멍가게는 일진들 사이에서 공유되곤 했던 것 같다.   

  

돈이나 물건을 뺏는 것도 그들의 몫이었다. 그래도 양심은 있었는지 대놓고 뺏지는 않았다. "야 너 신발 좋아보인다" 하며 은근히 압박하는 식이다. 일진들은 공부를 열심히 하거나, 운동을 잘하는 아이들은 건드리지 않았다. 대신 말이 많거나 눈치가 없거나 하는 어중간한 무리를 주로 괴롭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들은 주로 그들끼리 어울리지만 걔중에는 반 친구들과도 잘지내는 기형종이 있는 경우도 많다.  

    

일진 무리의 구성은 주로 이런식이다. 짱이 있고 덩치가 크고 힘이 쎈 녀석이 있으며 잘생겨서 아는 여자들이 많은 녀석, 또 엄청 못생겼는데 재밌는 애, 엄청 귀엽게 생긴 애 등등 으로 구성된다. 이들은 타 학교의 일진들과 이런저런 계기로 마주치고 싸우거나 하면서 친해진다(진짜 무슨 학원물 만화 같다). 어차피 휴일에 갈곳도 없어서 시내로 나가면 이들이 사복을 입고 담배를 피는 모습을 종종 보았다. 그들은 스윗하게도 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무서워서 내가 먼저 뛰어서 도망쳤던 것 같다. 아직도 나는 이렇다. 좀 강해 보이는 이를 만나면 피하고 보니, 이 수줍음을 어찌해야하나..      



일진은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넘어가면서 상당수 사라진다. 철이 드는 것이다. 방망이로 학교 유리창을 깨고 선생과 싸운 일화는 3년여만에 부끄러운 기억이 된다. 코앞에 닥친 입시라는 벽에 부딪쳐 학생들은 일진 놀이할 시간조차 사라진다. 일진 중에는 개과천선해 갑자기 공부를 하는 녀석도 있다. 고등학교 시절 비슷한 케이스가 있었다. 키도 크고 무서운 아이였는데 갑자기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곤 자습시간에 떠드는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서 때렸다.. 어딘가 바람직하면서도 불량한 케이스 되시겠다. 고등학교 2학년때 학교 짱이랑 짝궁이 됐는데 계속 공부하는 법을 물어봤다. 나도 바빠서 힘든데 무서워서 엄청 열심히 가르쳐줬다. 그는 결국 재수 후 서울의 중상위권 대학에 진학했다고 한다.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그들은 왜 그렇게 남들과 다르고 싶어했을까. 코딱지만한 학교에서 왜 그렇게 군림하고 싶었을까. 몇년만 더 참으면 자유롭게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고 이성도 만나고 할 수 있었을 텐데. 학교가 세상의 전부라고 믿었던 그 시절엔 일진들이 좀 부럽기도 했다. 모두가 그들을 무서워하고 친하게 지내고 싶어했으니까. 다만 학교를 졸업하니 새로운 인연과 인맥, 세상이 펼쳐졌다. 그래서 동창회에 나가면 일진들은 잘 안오거나 겸연쩍어했다. 쟤 학교 다닐때 찐따였는데 저렇게 달라졌다니, 하는 것이다. 우린 다 친구인데 아직도 서열놀이를 하고 있는 거다. 그때가 인생의 전성기였고 리즈시절이었으니까. 다시는 그런날이 오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세월이 지나도 그들은 그들끼리 자주 모인다. 학창시절을 곱씹으며 새로운 인맥을 잘 쌓으려 하지 않는 모습을 다수 목격했다(페북 등에서). 사회는 학교보다 훨씬 더 무서운 곳이다. 장악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소설가 전상국의 '우상의 눈물'을 다시 읽으며 그시절 무서웠던 일진들을 다시 한번 떠올린다. 이젠 모두가 소시민이 되어 하루하루 벌어먹기 바쁘겠지만..




사실 나는 최근 배구를 비롯한 스포츠계, 연예계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셀럽들의 과거 학폭 논란 사태가 너무 반갑다. 여자 프로배구 흥국생명 소속 이재영·이다영 자매 사태가 터지고, 인정한 뒤 피해자에게 사과하겠다고 빌빌대는 꼴이 너무 즐거웠다. 괴롭히고 나서 기억도 못하다가 사태 터지니 살랑대는 꼬라지란.. 절대 사과 받아주시지 마시기를.


학폭 피해자들은 평생 그 상처를 마음속에 담고 산다. 아직 성숙하지 못한 영혼을 때리고 괴롭히고 돈 뺏고 하는 년놈들이 평생 떵떵거리고 잘 산다면 그거야말로 불공평하다. 피해자가 한을 안고 살듯이 가해자들도 한 짓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인터넷이 발달하고 SNS가 활성화 된 이후 가장 긍정적인 효과가 아닐까 싶다. 아무리 철없던 어린시절 잘못이라도 대중의 관심을 먹고사는 공인이라면 응당 책임을 져야 한다. 


요새는 일진의 느낌이 또 조금 달라졌다고 한다. 집안이 좀 어렵고 가정형편이 불우하며 싸움을 잘하는 불량한 애들이 일진이 아니라고 한다. 집 잘살고, 공부도 잘하고, 잘생기고 운동도 잘하고 이성에게도 인기 많은 애들이 은근히 무시하고 은근히 따돌리며 정신적으로 가스라이팅을 가하는 모습이 많이 발견된다고 한다. 일진도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불공평하고 잔인한 사회의 더러운 면이 교실에서도 벌어지고 있다는 소리다. 참 개같은 일이다.


이런 불공평이 사라지기 위해서라도 더 많은 폭로가 필요하다. 물론 근거없는 비방은 무고죄로 처벌받을 수 있으니 자제하시고.. 공인을 향한 대중의 도덕성 기준은 더 높아져야 한다. 나쁜 년놈들이 과거 자신의 손으로 저지른 죗값을 더 확실히 치르고, 아무리 어리다 해도 자신의 행동이 향후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걸 확실히 인지하며 교실만이라도 좀 평화로울 수 있는 그런 사회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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