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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dy Nov 13. 2022

세종살이 한 달째

안갯 속 세종 라이프


세종의 아침은 언제나 안개를 머금고 있다. 일어나서 드르륵, 창문을 열면 하얀 안개로 뿌옇다. 김승옥이 '무진기행'에서 기술했던 그 안개 같다. 나라의 미래같이 어두컴컴한 그 안개를 뚫고 공무원들은 까만색 양복을 입고 삼삼오고 정부청사로 출근한다. 나는 공무원인 척 하며 그들의 뒤를 따른다. 모두가 축 쳐진 어깨를 붙잡고 한걸음씩 발걸음을 옮긴다. 어떤 날은 오전 10시가 넘어도 스산한 안개의 향취가 느껴진다.


세종에 발령 받은지는 한달, 이사한 지는 2주가 흘렀다. 그럭저럭 적응을 하고 있다. 처음에는 갑자기 찾아온 여유에 좀 놀랐다가 부담됐다가 이제는 좀 편해졌다. 서울에 있을때는 파도를 타는 기분이었다. 거리로 밀려드는 사람들의 파도에 몸을 맡겼다가, 빠져나왔다가, 또 들어갔다가 했다. 세종은 조용하다. 정말 정말 사람이 없다. 청사 주변만 붐비고 다른 곳은 적막하다. 나는 나성동에 사는데, 근처에 공원이 있다. 휴일 오전에는 그 공원을 걷는데 사람이 한명도 없다. 그래서 마치 꿈속을 걷고 있는 것 같다. 안개속에서 혼자 걸으면 영화속 한장면 같기도 하다.



서울서 출퇴근 할때와 삶은 조금 달라졌다. 아침 7시30분쯤 기상해서 버스를 타거나, 차를 끌고 기재부 청사로 향한다. 사실 청사가 코앞이라 10분 정도 밖에 안 걸린다. 언제 한번은 호기롭게 걸어갔는데 생각보다 멀어서 놀랐다. 30분이 넘게 걸렸다. 버스를 타면 흰색 공무원증을 멘 사람들 속에 나만 녹색 출입증이다. 몰래 출입증을 코트 안으로 숨긴다. 과거 청와대 출퇴근 버스를 타고 기자인걸 필사적으로 숨겼던 내 모습 같다.


청사 출입증


출근 후 10시까지 발제를 준비한다. 나는 기획재정부와 산업통상자원부, 공정거래위원회를 맡고 있는데 일단 자료부터 정리한다. 정부부처는 매주 주말에 다음주 보도계획과 장관, 차관 일정을 공유해준다. 특히 부처의 경우 자료가 중요하다. 각 과에서 각자 추진하는 자료를 엠바고를 걸고 메일로 보낸다. 그럼 그걸 받아서 정리한다.


문제는 특히 기재부 자료가 너무 어렵다는 점이다. 경제를 잘 몰라서 용어가 색다르고, 특히 통계청 자료는 엄청난 숫자의 향연이라 이 데이터 속에서 뭘 리드 혹은 야마로 앞세워야 되는지 감이 잘 안온다. 약 한달 간 숫자 속에 파묻혀 살았지만 아직도 기사를 이렇게 써도 되는지 모르겠다. 시간이 필요한 듯 하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05/0001565894

https://n.news.naver.com/article/005/0001565588

https://n.news.naver.com/article/005/0001563646


전년 동월 대비, 전년 동기 대비, 전분기 대비 등 비스무리한 비교군도 쏟아진다. 경제는 흐름이고 통계청과 한국개발연구원, 기재부 등은 그 물결 속에서 어떤 경제 재정정책을 찾아야하는지 고민한다. 어찌보면 정치 영역보다도 우리 국민들의 실제 삶에 직접적으로 연관돼 있는 부서가 경제부인 것 같다. 그래서 항상 기사를 좀 재미있게, 체감되도록 생생하게 써야 된다고 본다. 너무 어려운 기사가 많던데 어쩔수 없는 부분이 있지만 그래도 경알못으로 용어는 한번 더 설명하고, 이 정책이 적용되면 우리 삶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 더 쉽고 간단하게 쓰도록 고민하고 있다.


뭔가가 덥수룩한 내 자리


오전 발제를 마치면 기재부나 산업부 공무원분들에게 전화를 돌리거나, 새로운 아이템을 찾거나 한다. 그리고 11시30분이 되면 점심을 먹으러 간다. 아직 아는 공무원분들이 많이 없지만 청와대나 국회 있을때, 또는 사건팀에 있을때 우연히 알게된 분들이 꽤 되는 것 같다. 또는 팀장이나 팀원들이 잡은 점심에 가서 감을 익히고 있다. 세금이나 예산 얘기를 할 때는 사실 무슨 얘기인지 아직 잘 몰라서 조용히 따라 웃고 있다. 부지런히 기사를 읽고, 전화를 돌리고 하다보면 그래도 적어도 먼 말을 하는구나는 알게되지 않을까. 한 6개월 이상은 필요할 듯 싶다.


공무원 분들은 매우 친절하다. 하지만 그 와중에 기재부 일부 분들은 좀 어렵다. 기재부는 업무가 세분화돼 있어서 사안이 나왔을때 이걸 어느쪽에 전화해야 하지, 하는 고민이 있다. 행정고시 수석과 차석이 즐비하다는 이 곳에서, 에이스와 엘리트로 점철된 이 기재부에선 공부가 필수인 것 같다. 정치부 있을 때처럼 그냥 막 들이대면 서로가 민망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을 듯 하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세종도 참 사람 사는 곳이구나 싶다. 최근 기재부 체육대회가 있었는데 모든 공무원들은 기재부 어느어느 부서가 신경전이 붙었고, 어느 부서는 사전 훈련을 감행했으며, 전통의 강호 부서가 이번에는 좀 아쉽게 됐다는 류의 얘기를 신나서 했다. 점잖던 그들은 체육대회 이야기를 하면서 180도 돌변해 열변가가 됐다. 평생 누구에게 져 본적 없는 1등님들의 경쟁심이 체육행사에까지 번졌구나, 하고 웃고 말았지만 무언가 힘든 공무원분들의 낙이 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산업부는 좀더 다이나믹했다. 평소 원전에 관심이 많아서 기사를 좀 썼는데 한국수력원자력 측에서 전화가 쏟아졌다. 아직 계약이 진행중인 사안이라 기사가 나가면 안 되고, 국익에도 악영향이 있다고 했다. 겁이 나서 모든 요구사항을 다 반영했는데 생각해보니 내가 매국노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수원한테 들은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해야 한다고? 세종팀 오자마자 참 스펙타클한 나날이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아직 제대로 못하고 있어서 나중에 써야겠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05/0001565243?ntype=RANKING

https://n.news.naver.com/article/005/0001563920

https://n.news.naver.com/article/005/0001563379


오찬을 마치고 복귀하면 오후 6시까지 마감을 한다. 이후 저녁 약속을 가거나 퇴근한다. 약속이 없는 날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아침에 만났던 그 안개가 또 다시 느껴졌다. 저 멀리까지 뻗은 아파트와 하늘 자락을 바라보며 세종은 참 살기는 좋은 도시인것 같다고 생각했다.


한달 동안 지내며 체인점이 아닌 맛있는 동네 커피집이 생겼고, 휴일에 갈 수영장도 뚫었다. 얼마전엔 휴일 새벽에 조조로 '에브리씽 에브리웨얼 올앳원스'를 봤다. 관객은 나 혼자였다. 영화는 정신없었지만 재미있었다. 깔깔대다가 살짝 눈물도 흘렸던 것 같다. 영화관이 끝나고 나올 때까지 그 영화관에 관객은 나 밖에 없었다. 밖으로 나왔는데 또 안개속에는 나 밖에 없다. 이 영화는 평행세계를 그리고 있다. 만약 평행세계의 내가 이 우주로 잠시 전이된다면 나의 삶을 보고 뭐라고 생각할까하는 고민이 들었지만 그만두었다. 그가 왜 그렇게밖에 못 사느냐고 나를 힐난 할지도 모르겠다. 빨리 온전한 세종사람이 되고 싶다. 프로세종러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평행세계의 내가 보기에도 좀 잘 살고싶다. 알차고 생산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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