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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dy Aug 05. 2023

나의 논술 공모전 입상기


재미난 일화가 생각난다. 2010년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제1회 신문논술대회를 열었는데 현장에서 글을 쓰고 제출하는 방식이었다. 대학교 2학년 때였는데, 당시 내가 챙겨간 종이 뒤편에 대강 개요를 짜놓고 글을 썼는데 귀가 후 잠깐 나갔다 오니 엄니와 동생이 엄청 웃고 있었다. 아기돼지 삼형제를 리드로 썼는데 두 사람 다 "아니 무슨 논술대회에서 아기돼지 삼형제 얘기를 하느냐"고 했다. 그런데 그 글은 대상을 탔고 그 돈으로 가족들에게 한턱 쐈던 게 생각난다.


제대 후 기자시험을 준비하던 내게 논술대회는 좋은 기회였다. 가난한 대학생 시절이라 돈도 필요했고, 무엇보다 내가 기자시험에 도전할 기본적인 필력을 갖췄는지 여부를 평가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학창시절 백일장은 차원이 다른 큰 무대에 한번 도전해보고 싶었다. 마침 언론재단에서 처음으로 대회를 연다는 소식을 들었다. 언론과 관계있는 큰 단체에서 하는 행사라서 기대가 됐다. 사전에 딱히 준비한 것은 없다. 하던대로 책과 신문을 열심히 읽고 행사장으로 향했다.


현장에서 제시된 주제는 3가지였다. ‘신문읽기의 즐거움’과 ‘TV, 컴퓨터, 그리고 신문’, ‘내가 꿈꾸는 신문’ 등 세개였다. 신문읽기의 즐거움과 내가 꿈꾸는 신문은 논술이라기 보단 에세이형 주제인 것 같아 TV, 컴퓨터, 신문으로 주제를 결정했다. 신문논술대회이니, 신문의 효용을 강조하되 영향력이 크고 대다수의 사람이 활용하는 TV와 컴퓨터의 중요성도 강조하면서 서로 보완적인 매체라는 점을 짚고 싶었다. 


글은 항상 서론이 중요하다. 사람의 눈을 확 끌면서 주제를 뒷받침할 예시나 묘사가 필요하다. 수백명의 글을 보는 심사위원의 이목을 끌기 위해서도 확실한 무기가 필요했다. 마침 TV와 컴퓨터, 신문이 3가지 매체이고 요새는 정보화 시대이니 이에 대비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는 차원의 예시를 고민하다가 아기돼지 삼형제 얘기가 떠올랐다. 멍청해보이지만 우직하고 묵묵하게 위기를 대비한 막내 돼지의 얘기다. 맏형과 둘째가 셋째의 벽돌집으로 넘어와 함께 한다는 점에서 협동과 보완의 의미도 있었다. 약 30분 안에 이런 얼개를 짜고 글을 써내려갔다. 


신문을 돋보이게 써야 했다. 그러러면 TV와 인터넷의 성격부터 자세하게 보여줘야 했다. 그런데 너무 이론적으로만 풀면 재미없을 것 같아서 그동안 신문과 책에서 읽었던 사례 등을 풍부하게 나열했다. 이후 신문을 공부하는 매체로 상정하고 TV와 인터넷을 보완할 수 있다는 식으로 썼다. 전체 글은 이렇게 썼다.




누구나 어릴 적 '아기돼지 삼형제'라는 동화를 들어본 경험이 있을 터다. 첫째와 둘째는 게으름을 부리다 부실한 재료로 집을 만든다. 반면 셋째는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벽돌로 튼튼한 집을 짓는다. 어느 날 늑대가 그들을 습격했을 때, 첫째와 둘째의 보금자리는 허무하게 무너지고 셋째의 벽돌집만 무사하게 된다는 줄거리다. 간단해 보이는 이 우화 속에는 중요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자세, 견고한 내공쌓기가 생존을 보장한다는 기본적 진리가 바로 그것이다.     


미디어 2.0의 시대, 양질의 정보를 누가 더 빨리, 더 많이 소유하는지가 성공과 생존으로 직결되는 사회가 되었다. 빠르게 발전하는 세계 정세에 적응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정보의 전쟁터에서 하루하루 숨가쁜 전투를 치르고 있는 셈이다. TV를 보며 비주얼적인 영상정보를 얻고, 인터넷으로 실시간 뉴스와 단편적 정보를 획득하며, 신문을 공부함으로써 보다 깊고 체계적인 지식을 습득한다. 정보의 통로이자 사회적 젖줄인 이 세 가지 매체는 개인에게 ‘정보 공황’의 늑대와 싸울 힘을 준다는 점에서 ‘미디어 삼형제’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TV는 현란하다. 영남지방의 홍수피해 현장에서부터 2+2 외교‧국방장관 회담을 위해 방한한 클린턴 미 국무장관까지, 세계 도처의 풍경과 인물들을 시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TV는 2차적 지식을 전달하지는 못한다.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영상들은 시청자에게 현장감과 생동감을 전해줄 뿐이다. 6‧2 지방선거를 통해 변화될 한국의 미래상보다는 선거결과 보도에만 급급하다. 전문가들의 깊이 있는 논평도 찾아보기 힘들다. 현상 자체를 다루는 황홀경인 TV에게 ‘바보상자’라는 불명예스러운 호칭이 붙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터넷은 쉽고 편하다. 산골벽지에도 LAN선이 보급되어 어디에서나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다. 지하철에서 무선 인터넷으로 김연아 선수의 경기를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관람하는 것이 가능하다. 포털사이트에는 최신 뉴스가 즉각 올라오고, 누리꾼들도 바로바로 댓글을 통해 의견을 개진한다. 속보성과 편리함이 인터넷의 최대 장점인 셈이다.     


그러나 인터넷은 동시에 정보의 홍수를 초래하기도 한다. 너무나 많은 정보가 넘치는 곳이 사이버공간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필요 없는 유해 정보들, 하루가 멀다 하고 쌓이는 스팸메일들 속에서 양질의 정보 선별은 전적으로 개인의 몫이다. 여과의 과정에 필요한 시간적, 정신적 낭비는 인터넷이 넘어야할 걸림돌로 지적되고 있다.     


신문은 TV와 인터넷의 단점을 보완하는 매체다. 기자와 데스크를 통해 걸러진 믿을 수 있는 정보가 실리고, 현상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와 토론, 인터뷰가 이루어진다. TV만큼은 아니지만 사진을 통해 현장감을 부여하고, 거의 매일 발행되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새로운 뉴스도 포함하고 있다. 신문을 통해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도 접할 수 있고, 여과된 지식들은 자기 계발에도 큰 도움이 된다. 신문은 TV처럼 보거나 인터넷처럼 읽는 것이라기보다, 공부하고 체화하는 미디어다. 정독하는 데 시간이 비교적 오래 걸리고, 찾아서 봐야 한다는 점에서 개인의 수고가 필요하다. 최근 신문이 위기라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까닭도 대중이 사유와 반추의 수고를 피해 수동적인 수용자의 자세를 견지하기 때문일 터다.     


사회가 더욱더 발전할수록 개인을 공격하는 정보의 늑대들은 늘어날 것이다. 조금 수고스럽더라도 주체적인 자세로 신문을 공부하면서 세상의 흐름과 최근 사회의 화두들을 짚어가야 한다. 차분한 세상읽기로 탄탄한 정보내공을 쌓아가야 한다. 또한 첫째와 둘째가 셋째의 집으로 피신 와서 함께했던 것처럼 신문의 미약한 부분을 TV와 인터넷을 통해 보완하려는 포용성이 절실하다. 신문 공부를 통한 개인의 사회적 자리 찾기와 이에 더해진 TV와 인터넷, 즉 ‘미디어 삼형제’의 효과적 조합이야말로 개인의 발전을 넘어 정보 사회에서의 생존을 가능케 하는 첩경이 될 것이다.




전략은 주효했다. 대회 이후 재단 분들과 식사를 하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때도 사람들이 "리드가 참 좋았다"고 했다. 글에서 말하려는 바를 압축해서 잘 보여줬다는 것이다. 또 신문만 좋다고 하는 게 아니라 각자 매체가 장단이 있으니 이를 잘 활용하며 정보화시대를 헤쳐나가자는 메시지가 논술대회가 원했던 방향과 딱 맞았다고 했다. 그때 느낀 두가지. 글이란 건 서론이 참 중요하구나, 그리고 글은 전략적으로 써야 한다는 것.


그렇게 대회를 마무리하고 몇 달이 흐른뒤 이번에는 한국조사기자협회가 주관하는 신문사랑논술대회 공고가 떴다. 한껏 고무되어있던 나는 이번 대회에도 지원했다. 역시 현장에서 글을 쓰는 거라 다시한번 내 글쓰기 실력을 가늠해볼 잣대가 될 것 같았다.


주제는 이거였다. '오사마 빈 라덴을 미군이 사살한 사건을 논평한 국내 3개 일간신문의 사설 또는 칼럼입니다. 글의 서로 다른 관점과 주장을 비판적 시각으로 헤아려 '빈 라덴 사살과 정의'를 주제로 자기 의견을 논술하십시오'. 바로 든 생각이 이거다. 무조건 다르게 써야겠다, 남들이 미국과 중동 가운데 한쪽의 편을 들어서 쓸때 나는 그 이면의 의미와 국제학적 관점을 좀 짚어줘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 차별화 될 것 같았다.



마찬가지로 당시 현장에서 썼던 글 원문은 이렇다.




오사마 빈 라덴 사망 – 보복과 일방적 정의를 넘어 보편적 정의를 향한 단초 되길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함무라비 법전이 담고 있는 보복논리는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지배적인 담론으로 자리잡았다. 자식이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무협영화가 인기를 끌고, ‘몽테 크리스토 백작’ 류의 소설이 스테디셀러가 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대중은 받은 만큼 돌려주는 삶의 방식을 정의라 인식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원수를 찾아내 처절히 복수하는 행위가 과연 정의가 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에드몽 당테스’가 결국엔 복수를 후회했듯이, 정의가 보복의 원리로 이용될 때, 그 결과는 개운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피는 피를 부르고, 복수는 복수를 낳기에 하는 말이다.     


국제관계에서, 보복의 정의는 이미 일상화되었다. 얼마 전 사망한 ‘오사마 빈 라덴’이 좋은 예다. 전대미문의 테러로 충격과 공포에 빠진 미국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초강대국으로서 세계를 주도해온 자존심에 상처도 입었을게다. 테러의 원흉을 처단하는 ‘성전’이 지난 10년간 미국의 주요 어젠다로 기능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제 국가의 안녕을 위협했던 위험인물이 사라졌으니 평화의 도래만 남은 것 같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다. 테러단체 ‘알 카에다’가 보복 공격을 예고했기 때문이다. 폭로전문 웹 사이트 ‘위키리스크’가 발표한 자료도 추가 테러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산 넘어 산이다. 보복의 정의는 끝이 없다. 대립하는 양측이 공멸하기 전까진, 진정한 평화는 미명에 불과하다. 오바마 대통령의 “정의가 실현됐다.”는 발언이 못 미더운 건 이 때문이다.     


보복의 정의 이전에 대립 세력간 정의의 성격이 판이한 것도 문제다. 미국의 정의는 ‘많은 사람을 살상한 테러범을 척결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중동의 시각은 어떨까? 9•11 테러의 배경에는 미국의 권력 남용이 있었다. 미국은 자본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고립주의와 개입주의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국제 관계를 불균형 상태로 내몰곤 했다. 냉전 이후, 대량살상무기의 확산을 방지한다는 명분하에 회교 근본주의자들을 포용하고, 잠재적 위험요소를 완화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했다. 석유 확보를 위해 중동지방에 압박을 가하며, 기독교를 무기로 이슬람 세력을 억압하기도 했다. 미국의 정의는 중동에겐 불의였다. 알 카에다가 테러를 감행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무고한 생명을 산화시킨 폭력적 방법은 결코 정당화 될 수 없다. 그러나 미국의 권력이 정의담론을 선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중동의 억울함과 피해의식을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누가 정의이고, 누가 악인가?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따라서 보다 멀리 내다보는 거시적 시각과 함께, 양면을 함께 둘러보는 개방적 자세, 현상의 배경까지 탐구하는 깊은 사유의 눈이 필요하다. 미국은 테러의 배경보다 현상 자체에 치중했다. 자연히 복수를 강조하게 되었다. 국민들의 감정을 동원해 전쟁에 정의를 덧입혔다. 1차 목표를 달성했는데도 국제상황은 여전히 불안하지 않은가. 미국의 뼈아픈 자기반성과 성찰이 필요하다. 세계각국의 ‘반미 신드롬’의 배경과 원인을 반추해야 한다. 지구 반대편의 그들에겐, 미국이 정의의 사도가 아니라 악의 축 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동시의 폭력의 수단으로 한 보복으로 한 보복을 그만둬야 한다. 울분과 감정이 중첩되어 결국 모두를 파멸로 이끌 수 있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면, 강자가 그 모범을 보여야 하지 않을까. 성숙한 태도와 차분한 이성을 바탕으로 사적 정의가 아닌, 보편적 정의를 탐색할 때, 비로소 미국의 진심은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언론이 주목했던 오사마 빈라덴 사살 당시 상황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악감정이 남아있는 양자의 화해와 평화는 한쪽의 양보와 대화의 노력을 요구한다. 빈 라덴의 사망으로 위험이 극대화 된 지금, 객관적 강자이자 원인 제공자인 미국의 결단이 시급하다. 공멸을 막기 위해 손을 내밀 때 세계 속 미국의 이미지는 긍정적으로 쇄신될 수 있다. 동시에 ‘빈 라덴 사살’도 폭력을 재생산하는 기제가 아니라 용서와 관용 속에 보편적 정의를 이룩하는 단초로 작용할 것이라 확신한다.




지금 보면 비문도 많고 너무 중언부언하는 부분도 있지만 그래도 썩 괜찮았던 것 같다. 역시 서론에는 함무라비 법전이나 몬테크리스토 얘기를 넣어 복수에 따른 정의가 허무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시작했다. 다음부터는 공부를 좀 해야 쓸수 있는 구절이다. 언론고시를 준비했던 나는 평소 빈라덴 관련 논평이나 책 등을 많이 봤고 마침 정치외교학과 복수전공 중이었어서 관련 주제로 발표도 했다. 그래서 국제정세 등을 논술 본문에 넣고 논리를 이어갈 수 있었다. 당시 한국일보 논설실장이 대회 심사위원이셨는데, 역시 끝나고 식사를 할 자리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열심히 해서 꼭 기자가 되겠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사실 내가 기자지망생이라서 이런 대회의 존재를 알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성인들도 다 참가가 가능한 대회들이다. 사실 신춘문예 등도 이런 대회의 일종 아닌가 싶다. 공인된 누군가로부터 나의 글쓰기를 평가받는 건 부끄러운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좋은 기회일 수도 있다. 나는 아직도 그 대회에 함께 입상했던 사람들이나 주최측 분들과 친하게 지낸다. 새로운 인연을 가져다 줄 수도 있는게 글쓰기 공모전 같다. 열심히 찾아보고 또 기회가 있을때 도전하면서 나의 글쓰기 실력을 조금씩 더 향상시키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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