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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dy Aug 01. 2024

이름없는 오후



1


요즘 들어 사람 이름을 자주 까먹는다. 술자리를 함께 했던 인사과의 그 친구가 영민인지, 영수인지, 영기인지 통 헷갈린단 말이다. 오랜 시간 고민 끝에 영수야 하고 아는 척을 하면 그쪽에서 이보시게 나는 영호란 사람이오 하고 대답하기 일쑤다. 이런 곤란한 일을 겪을 때마다 나는 당황하여 손바닥에서 줄줄 흐르는 땀을 바짓가랑이에 쓱쓱 문질러 닦아내곤 했다. 이런 나의 이름에 대한 혼동은 직장동료를 넘어 우리 가족들에게 까지 마수를 뻗친 상태였다. 저번 추석 때 장인어른의 이름을 우리 당숙분과 혼동하여 아내에게 된통 혼난 적도 있었다. 하기야 박상혁과 박성혁이라는 이름이 여간 비슷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내 핸드폰에 저장되어있는, 이를테면 우리 아파트 앞 세탁소 주인인 김거동 씨로부터 출발하여 300여명의 이름을 퐁당퐁당 뛰어넘고 기역니은의 돌을 던져 교편을 잡고 있는 황슬기란 중학교 동창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이름들의 정글에서 도통 빠져나오지 못하고 헤매는 것 같은 착각이 드는 요즘이다. 그 중엔 영희라는 여자가 3명이나 있고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그저 이름만이 떡하니 남아 이따금씩 추억을 되새기는 이름들도 있다. 나 혼자서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는구나 생각하면 무언가 안심이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해진다. 누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들에게서 소외되고 멀어지게 될 것이라는  불안감이 나를 사로잡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요즘 나는 사람들을 피하는 버릇까지 생겼다. 회사 안 에서도 얼굴은 기억나지만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사람을 마주치면 일단 걸음을 돌려 자리를 피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2

 

힘든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차 없는 서울, 당신의 활력소가 됩니다’ 라는 포스터 아래로 사람들은 활력적이지 못한 얼굴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하필이면 오늘이 차 없는 날이었다. 퇴근길이라 지하철은 만원이다. 후덥지근한 공기를 마시며 비좁게 한자리 차지하자 바로 건너편에 앉은,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잠에 취해있는 한 여학생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교복으로 보아하니, 우리 아들 진호랑 같은 학교인가 보다. 까만 안경을 끼고 큰 입을 벌리며 제대로 꿈나라를 유영하는 학생의 모습을 측은하게 바라보던 나는 문득, 아무 이유 없이 그녀의 이름이 궁금해졌다. 지혜? 수미? 혜진이? 이런저런 추측에도 썩 알맞은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왜 이러지. 요즘 이름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 받다보니 정신이 좀 이상해 진 것 같다. 이윽고, 혜화역에 도착했다. 집을 향해 터벅터벅 걷다보니 우연치 않게도, 아까, 그 여학생과 마주쳤다. 어디론가 바쁘게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무엇인가에 이끌리듯 그 학생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저기, 학생 잠깐만요. 그 학생은 귀찮다는 듯이 말을 받았다. 저요? 아, 학생 미안한데요. 지하철에서 제 건너편 자리에 앉았었죠?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아저씨 얼굴을 얼핏 본 것도 같네요. 기억해줘서 고마워요. 그런데 무슨 일 이세요? 아, 별거는 아니고, 혹시 이름이 어떻게 되요? 그 여학생은 갑자기 경계하는 태도를 취했다. 한쪽손이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 꿈틀대는 것으로 보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듯했다. 이름은 왜 물어보세요? 그냥, 궁금해서요. 뭐라구요? 이 아저씨 웃기는 아저씨네. 그 학생은 갑자기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멍하니 남겨진 나는 왠지 내가 이방인이 된 것 같아 씁쓸했다. 그깟 이름 하나 알려주는 게 뭐 어렵다고. 닳거나 하는 것도 아닌데. 생각해보면, 갑자기 이름을 물어본 나도 정상이 아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게 다 이름 때문에 내가 요즘 만나는 스트레스란 여인의 향기 때문이다. 아찔하도록 사람을 매혹시켜서 혼을 쏙 빼놓는 것이다.


 아내와 함께 맥주나 한잔할 생각으로 집 앞 편의점에 들렀다. 정말 우연스럽게도, 나는 중학교 선생이자 내 휴대폰 전화부의 마지막 칸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는, 황슬기란 이름을 가진 중학교 동창을 마주하게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난 얼굴을 보자마자 샘솟듯 이름이 생각났지만, 오히려 그쪽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얼굴이 빨개지고 말문이 막힌 상태로 그는 들고 있던 삼각 김밥을 조심스레 내려놓고 내 손을 잡았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표정으로 보아 내 이름을 기억하려 안간힘을 쓰는 듯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의 뇌 속에 살며시 들어가 아마 지금현재 그의 머릿속을 무수하게 떠도는 수많은 이름들 중에 박상수란 이름을 찾아 그의 입까지, 입술까지 친절하게 안내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참을 어색한 침묵이 지나고 내가 나야 나 상수라고 내 자신을 소개하자 그는 그제서야 박수를 치며 마치 퀴즈쇼 마지막 단계에서 실수를 해 상금 천 만원을 놓친 후 다 알고 있었다며 아쉬운 표정을 짓는 - 사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으면서 - 도전자 같은 표정을 지었다. 오랜만에 만난 동창들이 그렇듯 날씨 얘기라든가, 사업얘기, 자식 놈 공부 얘기 등을 지루하게 늘어논 후, 이윽고 그가 시계를 보며 아이들을 데리러 갈 시간이라고 말했다. 차에 탄 그가 창문을 내리며 작별인사를 했다. 건강해라 상수야. 또 연락 할게. 저 멀리 사라지는 차의 뒤꽁무니를 무심히 바라보며 그의 아들이름이 상수란 사실을 깨달았다. 마치 기억이 돌아온 일일드라마의 주인공 처럼 왠지 나는 분한 심정이었다.     


 집 앞 놀이터에 도착할 때 까지 나는 이웃사촌 3명을 만났다. 모두가 나를 1402호라고 불렀다. 나는 그들에게 안녕히 가세요, 702호. 또 봅시다, 201호. 공부는 잘되지 1602호라며 인사말을 했다. 왠지 내가 문짝같이 느껴졌다. 딱딱한 문짝. 사람들은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고 문을 잠그고 집을 나온다. 오늘도 나는 1402호로 발걸음을 옮기는 중이다. 저 멀리 미끄럼틀이 보인다. 이 놀이터로 말하자면,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화개장터 같은 구실을 하는 장소로, 아파트 101동과 102동, 103동의 정중앙에 위치한 일종의 교차로다. 이곳에서 아내는 아파트 부녀회원들과 어울려 무언가를 만들어 먹고, 팔기도 했으며 때로는 수다를 나누기도 했다. 이 만남의 광장에서 나는 뜻밖에도 아까 지하철의 그 여학생과 조우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그 학생 혼자가 아니라, 아버지로 보이는 남자와 함께 무언가를 잔뜩 들고 102동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여학생은 나를 보자마자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으나 아버지로 보이는 남자는 갑자기 내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오우, 그는 놀랍게도 세탁소 주인인 김거동 씨였다. 사장님, 오랜만입니다. ( 이 남자는 모든 고객을 사장님이라 불렀다. 세상을 사는 지혜가 번뜩한 대머리에서 반질반질 빛나는 그런 남자였다. )


 어디 다녀 오시나봐요? 요 앞 마트에 다녀오는 길이에요. 이제 곧 추석이니까요. 벌써 그렇게 됐네요. 저 학생은 따님이신가 봐요? 예, 하나밖에 없는 딸년입죠. 중학교 2학년 이랍니다. 그럼 저희 아들놈이랑 같은 나이네요. 김거동씨는 왠지 모르게 흐뭇한 표정이었다. 공부를 썩 잘 한답니다. 그래요? 우리 아들은 공부랑은 영 담을 쌓아서 큰일이에요. 김거동 씨는 직업정신을 발휘해 한마디 남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사모님께 맡기신 옷 드라이 끝났다고 전해주십시오. 이틀내로 배달해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고개를 돌리는 세탁소 주인에게 나는 슬며시 물었다. 혹시 따님 성함이 어떻게 되나요? 우리 아들놈이랑 나이도 같고 같은 학교인 것 같은데. 김거동씨는 그다지 수상해하는 기색 없이 흔쾌히 대답해주었다. 김혜미랍니다. 김혜미?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초인종을 누르면서 나는 사랑하는 내 아내가 박혜미란 이름을 가슴에 달고 문을 열어주는 것을 목격하고 말았다. 오늘은 일찍 왔네? 마침 잘 됐다. 진호랑 밥 먹을려던 참인데. 저녁 메뉴는 짜장면이었다. 부녀회 때문에 반찬을 못했어요. 알죠? 나 바쁜거. 내일은 봉사활동도 하러가야되요. 진작 이렇게 보람차게 살껄. 왜 그렇게 당신만 바라보며 바보같이 살았는지 모르겠다니까요. 아내는 줄기차게 떠들어댔다. 이럴 때는 아들에게 사랑스런 한마디를 건네는게 상책이다. 진호야, 오늘은 학교에서 뭘 배웠니? 진호는 무언가 결심한 듯한 표정이었다. 아빠, 나 이름 바꿔주면 안돼? 너무 평범하잖아. 우리 반에만 진호가 한명 더 있단 말야. 개는 이진호야. 요즘사회가 어떤사회야. 튀는 사람이 성공하는 세상이잖아. 이름부터가 남들에게 독특한 인상을 심어줘야 한다고 생각해. 아내는 연신 기특한 눈빛으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왠지 옆자리에 앉아서 시커먼 입을 휴지로 닦는 아들이 낯설어 보이기 시작했다. 며칠 전, 집 앞 슈퍼마켓 뒤에서 친구들과 담배를 피다 이웃주민의 신고로 경찰서까지 다녀온 아들의 모습이 무섭기까지 했다.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도 없이 방으로 들어가는 아들은 위풍당당하기 짝이 없었고, 아내는 그럴수도 있다는 말을 주문처럼 되뇌었다. 왜 나한테는 담배를 끊으라고 난리를 치면서 아들에겐 담배를 권하는 것인가? 젠장, 답을 알수 없으니 담답하고 답답하니 담배를 필 수 밖에 없다. 이건 숫제 담배를 권하는 사회다. 이게 다 그놈의 이름 때문이다. 우리 아들 진호는 이름이 마음에 안 들어서, 답답한 마음에 담배라는 친구와 사귀기 시작했겠지. 그러고 보니 담배라는 이름은 누가 지은걸까. 썩 그럴듯한걸. 담배 하니까 우리 학교 후배가 생각난다. 이름이 창희 였던가. 하루에 담배 2갑씩 피는 골초로 유명했는데. 내 기억 속에 그 녀석은 담배가 아니라 담배연기보다 더 매캐한 배은망덕의 이름으로 남아있다. 아는 회사도 소개시켜 주면서 자리를 봐줬건만, 우리 와이프인 박혜미 여사와 바람이 난 것이다. 벌써 5년 전 이야기다. 집 앞에서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발견하고 난 아내가 변명이라도 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녀는 태연하고 당당했고, 오히려 내가 더 주눅이 들었었다. 물론 다 끝냈다며, 걱정말라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요즘 들어 다시 만나는 눈치다. 하지만 내색은 할수 없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해야 서로가 좋은거다. 그런게 세상이다. 담배같은 세상. 매캐한 인생.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아내가 다가온다. 할 말이 있는 눈치다. 진호 있잖아요, 여자친구가 생겼나봐요. 그 자식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벌써 여자친구가 있단 말야? 누군데 그래? 요 앞 세탁소 딸 있죠? 안경끼고 평범하게 생긴 애. 걔랑 사귄다는 것 같아요. 앞 집 민수엄마가 유치원 다녀 오다가 둘이 같이 있는 것을 봤다지 뭐에요. 나 참 기가막혀서. 내일 내가 세탁소 아줌마 만나서 얘기좀 해봐야 겠어요. 그날 밤 나는 혜미 엄마와 진호엄마의 레슬링 경기장 중앙에서 호루라기를 불며 심판을 보는 꿈을 꾸었다. 끔찍한 꿈이었다.      


3


여전히 똑같은 하루다. 6시에 기상한다. 햇반을 돌리고 찌개를 가스렌지에 올려놓는다. 아내와 진호는 자고있다. 언제부터였을까. 아침을 혼자 먹는게 더 익숙하다. 혼자라는게 이렇게 편한 것 인줄 몰랐는데. 밥을 먹고 신문을 보며 베란다에서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차를 몰고 회사로 향한다. 다행히 오늘은 차 없는 날이 아니다. 새벽 6시 반, 도로는 빼곡하다. 이렇게 일찍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다니 아직 우리나라의 내일은 밝다는 헛소리를 해대며 회사에 도착한다. 난 회사에서 박부장이다. 박부장님. 결재해주셔야 하는데요. 박부장, 오후에 미팅시간 잡아놔. 누구도 내이름을 불러주지 않는다. 집에서도 난 아빠. 여보일뿐 박상수가 아니다. 학창시절에도 내 이름은 번데기였다. 목뒤에 유난히 살이 많아 불리던 번데기라는 용어는 별명의 벽을 넘어 내 이름이 되었다. 우리 어머니에게도 난 진호애비이고 애용하는 룸싸롱의 마담에게는 사장님이고 조기 축구회에서는 박총무로 불린다. 누구도 날 박상수라고 불러주지 않는다. 환장할 노릇이다. 가끔 지갑에서 돈을 꺼낼때마다 간간히 보이는 주민등록증의 세글자가 낯설어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닌 것이다. 이렇게 내이름도 까먹으라고 강요하는 세상에서 어떻게 남의 이름을 외우면서 살아갈수 있겠는가? 이런 투정 가운데 점점 나는 나의 이름을 잊어가고 있었다. 말이 안되는 소리 같지만, 정말이다. 이름을 잊는 다는 것은 곧 나에 대한 기대와 책임을 망각했다는 뜻도 되기에 나는 한없이 가벼워지는 걸 느끼는 중이었다. 대학시절, 화염병을 던지다 끌려간 경찰서에서도 난 친구의 이름을 댔고 무사히 풀려났다. 일종의 책임전가라 할수 있을까. 요즘엔 내 이름을 남에게 알려주는 것 조차도 부끄러웠는데. 참 다행이다. 이상하기도 하지. 내 이름을 불러주기를 바라면서도 그 이름을 잊고싶어하는 내 모습. 이것 참 아이러니 한걸. 원래 세상은 아이러니 한 거니까. 아무런 부담없이 내 이름을 불러주는 친구하나 없다니 세상을 헛 산것 같은 느낌이야. 거리로 나가봐. 사람들 얼굴은 보이는데 이름은 보이지 않다니. 얼마나 소름끼치는 일이냐구. 저기요라는 정체불명의 지시대명사를 사용하잖아. 더 무서운건, 저기요가 자기를 지목하는 것인줄 안다는 사실이야. 자기 이름을 모르는걸 다행으로 여기는 거지. 인터넷을 봐도 그래. 누구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잖아. 얼마나 무서운 익명의 세계냔 말야. 누구나 자기 이름은 소중하게 생각해. 남한테 보이면 안되는, 로또 일등 당첨복권이나 되는 듯이. 하지만 남의 이름 따위는 관심이 없는거야. 만약에 네 아들놈처럼 자신과 똑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을 만났다고 쳐. 누구나가 제 2의 자신을 바라보며 당황하고 또 증오하며 결국은 저주를 퍼붓게 될껄. 그만큼 무서운 사회야. 지금이. 그러니까 너도 빨리 잊어버려. 나처럼. 이름따위 책임이란 족쇄를 온몸에 두르고 다니는 노예계약 같은 거라고. 김영호도, 김거동도, 박혜미도, 김혜미도, 황슬기도, 박진호도, 박상수도 다 잊어버리라고. 나 좋은대로 살아야지. 쓸데없는 기대와 자존심 따위 빨리 익명의 바다속에 던져버리라고. 뜨거운 햇살은 잘도 내게 지껄였고, 벌써 점심시간이라 직원들은 삼삼오오 허기진 배를 달래기 위해 자리를 비웠고, 땀이 슬슬 내 귓가를 간질이는, 지독하게도 이름없는 오후였다. 핸드폰이 울렸다. 아내였다.


4


글쎄, 세탁소집 여편네는 막무가내에요. 오히려 우리 진호를 무슨 난봉꾼 취급하지 뭐에요. 정말 어이가 없어서. 그 집 딸 이름도 혜미래요. 이거원, 개명신청을 하든가 해야지. 이렇게 이름이 흔해서야 어디 살겠어. 진호 말, 틀린거 하나 없다니까. 그리고 여보 오늘 나 늦어요. 봉사활동 간다고 말했잖아요. 저녁 알아서 먹어요. 그냥 밖에서 회사사람들이랑 먹어요. 당신 친한 사람있잖아. 인사과의 김영호인가 하는 사람. 아내의 전화를 끊고, 다행히도 햇살의 유혹을 뿌리친 나는 선악과를 손에 쥔 아담같은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름없는 오후에 이름없는 사람들이 이름없는 곳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들릴 리가 만무한 이 터벅터벅의 멜로디는 내 이름을 찾아 헤매는 100미터 달리기의 출발소리처럼 경쾌하게 내 고막을 울려댔고, 이름모를 한방울 눈물만 박상수라는 인간의 눈가에 촉촉이 젖어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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