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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dy Aug 05. 2024

엄마


"이혼하자고 한다. 니네 엄마가."


수화기 너머 아빠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짐짓 평온한 척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수연은 계속 이유를 물었다. "이유도 딱히 없대. 그냥 나 따라서 돌아다니는 게 지쳤대." 수연은 문득 엄마를 떠올렸다. 웃는 얼굴이 예쁜 엄마는 그녀의 기억속에 항상 웃고 있었다. 우아한 웃음으로 외국인들의 호감을 샀던 엄마의 모습을 떠올리며 수연은 엄마가 진짜 웃고싶어서 웃은건지, 아니면 웃어야 해서 웃었는지 궁금해졌다. 


수연의 아버지는 외교관이었다.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전 외무고시에 합격했다. 세상을 모두 가진줄 알았는데, 외교부 안에서의 경쟁은 생각보다 매우 치열했다. 원하던 북미국에 가지 못한 아버지는 마음을 어느정도 내려놨다. 그리고 여러나라 대사를 맡았다. 아프리카나 동남아가 주를 이뤘다. 수연과 엄마는 그런 아버지를 따라 전세계를 돌아다녔다. 주변에선 그런 엄마를 부러워했다. 남편 덕에 해외 여행도 하고, 그곳에서 몇년 간 살면서 즐겁게 살겠다고 토닥거렸다. 엄마는 짐짓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녀의 얼굴 한편에서 그늘이 서서히 번져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 퇴직을 눈앞에 둔 아버지는 그동안의 공로와 함께 청와대 안보실에서 근무하는 고등학교 친구의 도움 등 여러가지 호재 덕에 이탈리아 대사로 나가있던 참이었다. 동행한 엄마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은 자주 바뀌었다. 트레비 분수 앞에서 웃던 엄마는 판테온 신전과 나보나 광장, 스페인 광장, 테르미니역, 산타젤로 성, 베네치아 광장 앞에서도 웃고 있었다. 평소 패스트 푸드와 단 것을 기피해온 엄마가 젤라또와 피자에 빠졌다며 호들갑을 떨었을 정도로 공직 마지막을 화려하게 불사르는 남편과 함께 엄마가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갑자기 이혼이라니. 수연은 뭔가 아득한 느낌이 들었다. 


아버지의 말이 이어졌다. "네가 좀 여기 와서 엄마를 설득해주라. 요새는 통 말도 잘 안하고.. 내가 임기 마칠때까지는 기다려주겠대. 그 이후에 한국으로 돌아가서 갈라서자는데. 그래도 엄마가 너는 끔찍하게 생각하잖니. 여름 휴가 오는 셈 치고 한번 와주렴." 수연은 알겠다고 했다. 아버지가 혼잣말을 했다. "너 그렇게 혼자 될때도 복장터진다고 소리치던 사람이.. 왜 그러는건지 모르겠다." 수연은 아버지를 조금 달래다가 전화를 끊었다. 




각 나라를 전전하던 수연은 대학교 만큼은 한국에서 나오겠다고 선언했다. 그녀의 나이 18살때 일이었다. 이후 홀로 한국으로 들어왔다. 함께 오겠다는 엄마를 떼어두기 쉽지 않았지만, 수연은 서울에 있는 할머니댁에서 입시를 준비하게 됐다. 사실 입시랄것도 없었다. 외국어 특기자 전형 덕에 쉽게 아버지가 졸업한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녀의 입학식 전날, 수연의 부모는 마다가스카르에서 입국했다. 입학식이 끝나고 교정을 거닐던 중이었다. 아버지가 교내 호수앞 벤치에 멈춰섰다. "여기야 여기. 여보 여기 기억나?" 학교 운동장 만한 크기의 호수에는 햇빛이 반짝, 스치고 있었다. 수연이 가까이 다가가자 잉어도 몇마리 보였다. 아버지는 이 곳에서 엄마를 처음 만났다고 했다. 이 학교에 성악과에 다니던 스물 두살의 엄마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고 한다. 학교에서 매년 뽑는 '메이퀸' 자리에 오른적도 있다고. 그랬던 그녀에게 모두가 접근했지만 조용한 성격의 그녀는 오히려 부담스러워 했다고 한다. 


그날 학교 수업을 마치고 나오던 그녀와 아버지가 이 호수 앞 벤치에서 조우하게 된 것이었다. 공부만 하던 외교학과 찐따 남학생과 학교 킹카 여학생의 만남이라니, 마치 물과 기름같은 조합이라고 수연은 생각했다. 마침 신고있던 하이힐 굽이 나간 엄마에게 자신의 신발을 내어준 아버지는 그렇게 사랑을 키워갔다고 했다. 수연은 아니 그시점에 힐이 왜 망가져, 라고 생각했지만 짐짓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는 그저 잠자코 있었다. 


이후 수연이 졸업하기 전까지 부모님은 한번도 한국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제 북미국 배치는 불가능한 나이인데도 뭔가 성과를 내서 재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아버지의 헛된 희망 때문이었다. 마다가스카르를 방문한 대통령과 사진을 찍고, 양국 관계를 전략적동반자관계로 격상시킨 아버지였지만 한국사람들 입장서 해당 나라는 생소하고, 중요성이 떨어지는 곳이었다. 


그렇게 수연은 학교를 졸업하고 한 방송국 기자가 됐다. 그리고 회사 선배와 스물 아홉에 결혼을 했다.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남편은 기자란 무엇인가란 주제로 나간 한 대학 강연에서 대학생 애인을 만났다. 그 사실을 들키자 이혼을 요구했다. 모든게 지긋지긋해진 수연은 남편과 갈라섰다. 이후 기자도 그만뒀다. 그리고 학교 선배가 원장으로 있는 학원가에 잠시 알바식으로 나가고 있던 참이었다. 


수연의 결혼식서 활짝 웃던 엄마는 웃지 않게 됐다. 남들과 말을 섞는 것도 어려워하던 그녀는 수연의 전 남편 얘기가 나오면 "그 개자식. 나쁜 자식. 천하에 못 배운 자식"이라고 성을 냈다. 




선배에게 며칠간 쉬겠다고 통보한 수연은 바로 짐을 싸서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짐을 부치고 라운지로 들어서는데 어딘가에서 고함 소리가 들렸다. "아니 애가 먹으면 얼마나 먹는다고 얘 하나 못들여 보내줘요?" 40대로 보이는 중년 부부가 아이의 손을 잡고 라운지 직원과 싸우고 있었다. 보아하니 아이를 공짜로 라운지에 입장시켜달라는 실랑이 같았다. 완강해보이는 부모 사이에서 오히려 아이가 "엄마 아빠 그냥 가자. 나 진짜 괜찮아" 하고 있었다. 저게 요새 유행하는 맘충인가, 싶다가 수연은 문득 유산한 아이가 떠올랐다. 아이만 있었어도 남편은 바람을 피지 않았을까. 아니, 그 개새끼는 임신한 와이프를 두고도 업소에 드나들 놈이었어 하고 말았다. 


엄마는 수연에게 자녀를 갖지 말라고 했다. 나처럼 구속받지 말고, 훨훨 나는 새처럼 살아. 항상 그렇게 말했다. 수연은 그때마다 물었다. "내가 엄마의 짐이었어?" 엄마는 배시시 웃었다. 그건 아니야, 너무나 소중한 보석이야. 너 때문에 내가 행복했어. 네가 없으면 살지 못하는 삶이 됐어.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다른 삶이 있지는 않았을까 싶기도 해. 조수미, 신영옥 처럼 유명한 프리마돈나가 되어 전세계를 누리는 삶있잖아. "지금도 아빠따라 전세계를 누리잖아." 아니, 지금처럼 다른 이를 위해 뒤에서 웃는 그런 사람말고. 내가 주목받고 내가 사랑받는 그런 사람있잖아. "아빠가 엄마 사랑하잖아." 그렇지, 근데 또 그렇지 않은 것 같아..


결혼 후 수연이 유산을 하자 가장 미안해 한건 엄마였다. "내가 그런 소리를 해서 네가 이렇게 된 것 같아." 이 세상 나락에 송곳으로 구멍을 뚫고, 그 속에 빠진 듯한 기분이었던 수연은 잠시나마 엄마를 원망하며 눈물을 흘렸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누구를 탓하겠는가. 정치부 기자로 일하며 받은 갖은 스트레스도 온전히 수연의 몫이었다. 만삭 직전까지 일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기 때문이다. 난 아이를 원한게 맞는걸까, 수연은 아직도 매일 아침 그 생각을 했다.


수연은 면세점에서 화장품을 샀다. 엄마가 즐겨쓰던 설화수 자음수 자음유액 세트를 구입했다. 그리고 비행기에 탑승했다. 잠시 기다리는데 어디서 많이 본 옷차림이 불쑥 수연의 시야를 막았다. "안녕하세요~" 수연이 고개를 돌리자 아까 라운지 앞에서 봤던 그 민폐 부모와 아이가 통로에 서 있었다.


수연이 물었다. "무슨 일이시죠?" 아이의 엄마는 살짝 표정을 움츠렸다. 정말 죄송한데, 자리좀 바꿔주실수 있을까요? 세자리를 연달아 예약을 했어야하는데 이미 창가쪽은 예약이 되어있어서.. 애 아빠가 저 뒤에 따로 앉아야 해요. 근데 애기가 아빠없으면 불안해해서.. 죄송한데 부탁드립니다. 애 엄마가 손으로 가리키는 좌석은 맨 뒷줄 가운데 좌석 정도였다. 


수연은 과거 기자시절 일 못하는 선배에게 하던것처럼 힘주어 말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창가를 선호해서 예매를 했고, 로마까지 13시간이나 걸리는데 제가 원하는 좌석에서 앉고 싶습니다." 애 엄마의 표정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결국 수연의 옆자리엔 아이가, 그 옆에는 엄마가 타게 됐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수연은 귀마개를 착용했다.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양귀자의 소설책을 꺼내들었다. 희망이라는 소설이었다. 한줄 먼저 읽으려는데 귀마개를 뚫고, 아니 귀마개를 찢을 정도의 울음소리가 터졌다. 아이가 울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소리는 마치 태초의 것 같았다. 사회화 전의 아이는 마치 갓 태어나기라도 한 듯이 눈물을 쏟아냈다. "아휴, 또 아빠 찾네. 아빠 없으니까 이러는건데, 진짜 좀 너무하다." 애 엄마의 목소리도 아이의 데시벨 못지 않았다. 그녀는 수연을 흘낏 흘낏 쳐다보며 아이를 달랬다. 아이는 무려 20분을 울었다. 중간에 승객 누군가가 허공을 향해 "거참 애기좀 조용히 시킵시다"라고 했지만 동조하는 이는 없었다. 저출산 고령화 시대, 누구보다 어린 아이가 귀하다는 걸 모두가 알아서일까. 영국가는 항공권을 살 정도의 여유를 갖춘 이들의 노블리스 오블리주일까. 아무튼 수연은 바로 옆에서 따가운 시선과 찢어지는 소음을 견뎌야만 했다.


식사시간이 됐다. 수연은 한식을 주문했고, 비빔밥이 나왔다. 애엄마와 아이는 양식을 받았다. 수연이 고추장을 막 밥위에 뿌리고있었는데 아이가 말했다. "엄마 나도 비빔밥 먹고 싶어." 수연은 손을 멈췄다. 애엄마가 고개를 들어 수연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너무 죄송한데 혹시 몇숟갈만 주실수 있을까요?" 갑자기 입맛이 사라진 수연은 말없이 비빔밥 뚜껑을 덮고 아이에게 넘겨줬다. 아이는 입술 부위가 빨개질정도로 싹싹 긁어 먹었다. 시원한 맥주, 아니 히비키 한잔이 땡기는 수연이었다.


사건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식사가 끝나고 뜨거운 커피를 승무원들이 나눠주기 시작했다. 아이는 자신도 커피를 먹겠다고 투정을 부렸고, 결국 잔에 커피를 받았다. 아이는 그 잔을 들다가 손을 데였고, 컵을 엎질렀다. 그 커피는 고스란히 수연의 왼쪽 허벅지로 떨어졌다. "아...씨발" 수연은 자신도 모르게 욕을 뱉었다. 승무원이 황급히 다가와 물수건을 건넸지만 왼쪽 허벅지에 감각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화상을 입은것 같았다. 바지를 벗을수도 없고.. 수연은 갑자기 짜증이 솟구쳤다.


"아줌마 애새끼가 날뛰면 좀 제대로 간수해야지. 지금 뭐하는거야?" "아니 어린 애가 실수 할수도 있지, 바로 물수건으로 닦으면 되잖아요!" 수연은 점점 인내심이 사라지고 있었다. "야이 개같은 맘충년아. 너같은 씨발년때문에 우리나라 엄마들이 싸그리 욕을 쳐먹는거야. 니 새끼만 중요하냐? 싸질러놓은 애새끼 제대로 교육이나 시킬것이지. 아까 라운지 앞에서 지랄발광할때부터 알아봤어. 이렇게 키워봐라. 잠재적 범죄자 새끼나 키우는 꼴이지. 당장 제대로 사과안하면 비행기 내리자마자 신고할거야!" 아이는 갑자기 울기 시작하고, 저 뒤에 있던 아빠가 앞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남성 승무원이 이를 말리는 사이, 수연은 아이 아빠와 자리를 바꿔달라 요청했다. 여행 시작부터 참 개같은 일이었다.


비행기가 로마에 도착한뒤 수연은 슬슬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짐 찾는 곳에서 해꼬지를 당하면 어쩌지. 비행기에서 가장 늦게 내린 수연은 짐 찾기 전 화장실에서 20여분간을 기다렸다. 최대한 천천히 짐 찾는 장소에 도착했더니 그 가족은 보이지 않았다. 수연은 애 엄마가 자랑하듯 들고있던 샤넬 지갑을 누군가가 훔쳐가길 간절히 빌었다.




수연이 로마에 도착한지 4일째. 세 가족은 트레비 분수앞 까페에 모여 앉았다. 이혼 문제는 당췌 설득이 되지 않았다. 엄마는 직접 쓴 장영희 소설의 한 구절을 수연에게 건넸다. '초원의 집과 물오징어'라는 작품의 일부분이었다. 


'오늘 오후 막내가 다닐 재수학원을 알아보러 시내에 나갔다가 오는 길에 슈퍼마켓에 들러서 물오징어 몇 마리와 빨간 고추를 샀지. 아침에 사소한 일로 애 아빠랑 싸웠는데 그 사람이 좋아하는 오징어 볶음이라도 하려고 말이야. 막내를 낳고 나서 난 이상하게 빨간 고추 알레르기가 생겨 재채기를 하기 때문에 비닐 봉투로 겹겹이 싸들고 집으로 왔단다. 그런데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다가 나는 갑자기 걸음을 멈췄어. 하늘은 너무나 파랗고, 햇볕은 밝고 투명하고, 아파트 뜰의 나무들에 벌써 초록색 물이 오르고... 나도 모르게 '아 봄이로구나!'하고 탄성이 나왔지.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났어. 찬란한 봄볕속에 서서 물오징어 보따리 들고 계속 재채기를 해대는 여자, 그게 바로 나라는 사실이. 아니, 봄이라는 것을 느껴본 것도, 아파트 뜰에 있는 벚나무를 본 것도 정말 얼마 만인지 몰라. 꼭 시인이 되고 싶었던 문학소녀 김민숙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고, 하루하루 이리저리 치대고 까불리며 껍데기만 남은 김민숙만 있는거야...' 


엄마는 내가 김민숙이 된 것 같다고 했다. 수십년간 외교관 남편 뒷바라지 충실히 하고 딸도 다 컸으니 이제 남은 생 자신이 원하는 걸 하면서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했다. 뭘 하고 싶느냐고 물었더니 노래도 하고 강습도 하고, 순례길도 돌아보고.. 버킷리스트를 짜서 다 해보고 죽고 싶다고 했다. 아버지는 연신 "나는? 나는?" 이라고 했다. "내가 도대체 뭘 잘못했어?"라고도 했다. 당신 잘못한거 없어, 이렇게 똑똑한데 잘 살거야. 다른 여자 만나도 돼. 당신 그정도로 매력있어, 엄마는 능수능란하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때였다. 어디서 들리는 낯익은 목소리. 수연을 그자리서 얼어붙었다. 하필이면 그 까페에 비행기서 만났던 그 민폐 가족이 들어온 것이다. 수연은 선글라스를 쓰고 모자를 최대한 낮게 썼다. 하지만 곧바로 아이에게 들키고 말았다. "어! 비행기서 옆에 앉았던 그 아줌마다!" 아이는 손가락질하며 수연에게 돌진해왔다. 아이 부모는 의기양양하게 수연의 테이블 앞에 섰다. 


"무슨일이시죠?" 수연의 아버지가 물었다. "아뇨, 우리는 이 여자랑 할 얘기가 있어서요. 애한테 소리지른거, 저한테 맘충이라고 한거, 그런 근본없는 막말에 대해서 사과를 받아야 겠어요." 눈치없는 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명함을 건넸다. 제가 애비되는 사람입니다, 주한 이탈리아 대사입니다,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대화로 푸시지요.. 애엄마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아니 높으신분 딸이었네. 근데 도대체 배운게 없나보네? 가정교육을 어떻게 한거에요!" 수연도 일어났다. "저기 그만하시지요. 제가 사과할테니까 말소리도 좀 낮추시고요." 여성의 목소리는 더 커졌다. "아니 난 못참겠는데? 대사 양반 따님이 비행기에서 자국민한테 갑질했다는 거 기사로 나가야될거 같은데? 내가 아는 기자만 몇명인줄 알아? 우리 남편이 뭐하는 사람인줄 아냐고!!" 가게가 떠나가라 애엄마는 소리를 질렀다. 외국인들이 일제히 테이블을 쳐다봤다.


번개같은 찰나였다. 찰싹, 하는 소리와 함께 애엄마가 나동그라졌다. 어안이 벙벙해진 수연이 고개를 들자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수연의 엄마가 상대방의 뺨을 때린 것이다. 놀란 애아빠가 달려들자 수연의 엄마는 테이블 위에 있던 뜨거운 커피를 아빠에게 퍼부었다. 그녀의 뺨은 상기돼 있었다. 수연이 한번도 보지 못한 표정과 행동이었다. 우아하게 웃던 엄마가 아니었다.


엄마가 소리치기 시작했다. "너만 애새끼 있냐, 나도 딸 있어. 내가 쟤를 어떻게 키웠는데 니가 뭔데 내딸한테 사과를 하라 마라야. 어디서 못배워 쳐먹은 년놈들 같으니. 나는 너희같은 맘충들이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저출산 사태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어디서 해외서 나와서까지 이런 갑질을 하고 있어. 저 멍청해보이는 니 애새끼부터나 제대로 키워!!!"


하얗게 질린 아버지는 계속 엄마의 팔을 잡았지만, 엄마는 그 팔을 뿌리쳤다. "수연아 가자. 엄마랑 요 앞 에르메스 매장이나 가자. 이혼 전에 니 애비 돈좀 팍팍좀 써보자." 모녀는 전화로 대사관 직원을 부르느라 정신이 없는 아버지를 뒤에 두고 까페를 나섰다. 햇살은 뜨겁고, 거리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엄마가 소프라노와 알토 사이 그 어딘가의 목소리로 밤의여왕 아리아를 읖조렸다. 엄마가 되지못한 딸의 손을 잡고, 그렇게 엄마는 그렇게 걸었다. 씩씩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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