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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자들의 전쟁

by har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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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보직을 맡게 되면서 약 4년 만에 신문 지면에 다시 칼럼을 쓰게 됐습니다. 과거에는 젊은 기자들이 돌아가면서 쓰는 '창'이라는 제목의 칼럼이었는데, 이번엔 차장 기자급들이 맡는 '세상만사'라는 코너입니다. 앞으로 한달에 한번씩 매주 금요일 신문 지면 오피니언란에 제 글이 올라갈 예정입니다. 첫번째 칼럼은 저번주에 게재됐습니다. 앞으로 제가 쓴 칼럼도 여기 브런치에 소개하고, 왜 이런 주제를 정했고 어떤 점을 중점적으로 담으려 했는지 기록을 남기도록 하겠습니다.




가난이 가난을 마주하면


과거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이다. 한 배달 기사가 고급 아파트로 배달을 나갔는데, 도로가 막혀서 도착이 늦어졌다고 한다. 기사가 손님에게 양해를 구했더니 손님은 오히려 “괜찮다. 고생 많으시다”고 웃으며 답했다고 한다.

팍팍한 시절에 훈훈한 이야기다. 그런데 댓글 대부분은 엉뚱한 곳을 향했다. ‘부자 동네라 다행이지, 못사는 동네였으면 벌써 본사에 항의하고 난리났다’ ‘역시 부자 중에는 진상이 없다’ ‘부자 동네 콜만 받고 싶다’…. 배달 지연을 지적하는 것이 과연 진상인지는 모르겠다만, 가난을 둘러싼 대중의 혐오감이 극에 달한 건 확실히 알았다.

강남의 한 아파트 상가에서 장사를 하고 있다는 자영업자의 글도 흥미를 끌었다. 그는 부자의 특징 몇 개를 꼽았다. 무례한 사람이 없고, 피부가 좋고 머리가 단정하며, 뚱뚱하거나 통통한 사람을 찾기 어렵고, 술을 잘 마시지 않는다는 것. 이 글 역시 많은 공감을 받았는데, 나열된 긍정적인 형용사를 180도 뒤흔들면 그대로 빈자의 특성이 될 것이다. 굳이 새롭고 놀라운 발견은 아니다. 부의 격차가 불러온 일상 풍경이다. 그럼에도 과거에는 대놓고 빈부를 나누고 비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던 시절이 있었다. 소유한 재물만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걸 경계하던 때였다. 우리 조상들은 ‘돈은 원래 천한 것’이라는 뜻의 전본분토(錢本糞土)나 은은한 비하의 뜻을 담은 졸부(벼락부자) 같은 말을 써 왔다. 돈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믿음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국충절이나 청렴, 신의와 효도, 뭐 그런 것들 말이다.

부자를 향한 전폭적인 찬사가 사회 전반에서 공공연하게 발화하는 것은 최근의 일이다. 젊은 세대는 대기업 총수를 ‘형’이라 부르며 친근감을 표한다. 수십년간 사용자보다는 노동자 편에 서 왔던 그 젊은이들이 달라진 거다. 가난한 주인공이 자수성가하는 드라마나 영화는 이제 찾아보기 힘들다. 구식이 됐다. 대신 잘생기고 예쁜 데다 돈까지 많은 재벌이나 부자들이 스크린을 점령했다. 부자가 되는 법을 다룬 강의나 책이 쏟아지고, 그들이 사고 입고 먹는 것들은 부자가 아닌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를 끈다. 대기업 회장이 자주 찾는다는 비싼 맛집 등등. 그렇게 우리는 완벽한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돈 많은 이를 부러워하고, 더 노력해서 그들처럼 되겠다는 다짐은 좋다. 보다 나은 삶을 향한 동기부여도 된다. 다만 부자를 향한 선망이 커지는 만큼 빈자를 향한 맹목적인 비난과 혐오도 깊어지는 게 문제다. 게으르고, 의지가 없고, 남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고, 사회를 향한 분노가 가득한 시한폭탄 같은 존재. 인터넷과 미디어가 확대 재생산 중인 빈자 담론은 돈 없는 사람들을 인간 같지 않은 집단으로 몰아간다. 가난의 과정과 배경, 원인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결과만 따진다. 모든 걸 개인의 책임으로 덮어 씌운다.

그러니 부자가 아닌 이들은 스스로 그 안에서 계층을 나누고, 서로가 서로를 욕하며 구별지으려는 애처로운 자폭쇼가 펼쳐지는 것이다. 서로가 조금만 배려하면 그냥 넘길 수 있는 배달 실랑이도 비수 같은 막말과 혐오로 귀결되는 것처럼.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에 따르면 2023년 기준 국내 부자(금융자산 10억원 이상)는 46만명으로, 전체 인구의 0.9%뿐이다. 나머지 99.1%의 사람들이 서로 벌이는 감정 싸움은 점점 더 격해지는 것 같다. 스스로를 중산층이라 여기는 사람조차 매년 줄고 있는데, 일부 불법 혹은 부도덕한 방식으로 부자가 된 이들만 강건너에서 웃으며 불구경을 하는 듯 하여 마음이 무겁다.


박세환 뉴미디어팀장(foryou@kmib.co.kr)




복귀하는 첫번째 칼럼은 빈부에 대해서 쓰고 싶었습니다. 서민의 삶은 매년 팍팍해지고 물가는 고공행진하면서 양극화는 극심해져 가고 있습니다. 다만 대한민국은 자본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정부가 이 둘의 차이를 줄이기 위해 개입하는 것도 애매합니다. 그저 사회적 안전망을 좀더 촘촘하게 쌓아서 극빈층을 보호할 뿐입니다. 중산층이 보다 두터워지고, 서민도 쉽게 중산층이 될수 있으며, 부자가 분명 존재하지만 이들이 부자가 된 방법이 합법적인 나라가 되면 참 좋겠지만 아쉽게도 그렇지 못한 상황입니다.


영화 기생충을 비롯해 빈부의 격차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영화나 드라마, 소설, 작품이 넘쳐납니다. 부자들의 위선과 함께 겉과 다룬 속내를 다루고 빈자들의 처절한 현실을 보여주는 식입니다.


다만 저는 좀더 다른 시각을 다루고 싶었습니다. 빈자와 부자의 차이보다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가난혐오증을 꼬집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추고 싶어도 못 감추는 게 3개가 있다고들 합니다. 재채기와 사랑, 그리고 가난입니다. 가난은 어떻게든 티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기생충에선 그게 바로 냄새였습니다. 아무리 의관을 갖춰입고, 화장을 해도 반지하방의 그 냄새, 햇빛이 잘 들어오지 않는 그 곰팡이 냄새가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한의 민족인 한국인 대다수에게 사실 가난은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았습니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이후 625 전쟁과 저릿한 보릿고개 시절을 거치며 하루 먹고 살것조차 없는 그런 암울한 나날이 이어졌습니다. 한강의 기적을 이루고 세계 10대 경제대국까지 올라갔지만 아직도 청년과 노년을 중심으로 빈곤층이 많습니다. 가난은 그렇게 우리의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전혀 생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우리 민족은 가난에 대해 관대했습니다. 동지애가 강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너도 가난하고, 나도 가난하니 서로 조금씩 돕고 이해하고 응원하는 그런 느낌. 그래서 자수성가로 부를 이뤄낸 이의 스토리는 항상 회자됐습니다. 헝그리 정신으로 죽어라 일하고 노력해서 성취를 이룬 그런 위인들에 열광했습니다. 우리도 노력하면 그들처럼 될 수 있다는 마인드가 퍼져나갔고, 조상들은 그렇게 열심히 일했습니다. 나라가 살아난 원동력입니다.


부모의 부모때부터 내려온 지긋지긋한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는 가장 쉬운 방법은 공부였습니다. 교육의 사다리가 그나마 굳건하던 때였습니다. 어려운 집안에서 태어났어도 좋은 대학을 나오고, 고시만 합격하면 집안을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그게 어려워졌습니다. 부자 부모 밑에서 태어나야 영어유치원도 다니고, 고급 영어학원도 다니고, 고액 과외도 받고 합니다. 그래야 좋은 대학도 가고, 고시나 로스쿨도 준비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누구나 가난했고, 누구나 가난을 벗어낼 방법이 있었고, 그 방법이 비교적 명확했던 과거에 가난은 굳이 숨겨야할 건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어도 내가 노력해서 부를 일굴 확률이 지금보다는 훨씬 더 높았습니다. 또 금수저보다 흙수저로서 스스로 노력해서 성취를 이룬 이가 더 높게 평가받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좀 느낌이 달라진거 같습니다. 사회가 달라졌다고 느낍니다. 계층 간 사다리가 증발하고, 흙수저는 무슨 짓을 해도 평생 흙수저로 살아야하는 때가 왔습니다. 부모가 못살면 자식도 못살고, 그 자식도 못사는 그런 사회가 됐습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려 해도 학원비 교재비 생활비 등 온갖 돈이 드는데, 이 돈은 부모로부터 받아야합니다. 여유있는 집안에서 태어나야 성취에 도전할 수 있는 그런 나라가 되었습니다. 미칠듯한 경쟁이 낳은 폐해 일까요. 아니면 발전을 이룰만큼 이룬 고도화 사회의 이면일까요. 아무튼 죽어라 노력해도 자수성가는 쉽지 않은 현실입니다.


그러니 이제 가난은 숨겨야 할 치부가 되었습니다. 과거 미디어에선 돈많은 이를 경계하는 모습이 있었습니다. 굳이 스크루지를 언급할 필요도 없습니다. 가난한 여주인공이 등장하고, 돈 많은 남주가 씩씩하게 현실에 맞서는 여주를 좋아합니다. 이를 질투하는 부자집 여식이 나옵니다. 대개 인성에 문제가 있거나 자존감이 낮은 모습입니다. 그러나 한동안 쏟아진 재벌드라마를 보면 돈 많고 잘생기거나 예쁘고 성격도 좋고 공부도 잘하고 거기에 인성까지 갖춘 부자들이 등장합니다. 미디어는 대중의 관심에 따라 변화합니다. 그만큼 이제 대중에 가난한 사람보다 부자에 더 관심을 갖게 됐다는 방증이겠지요. 내 삶이 힘드니 스크린에서라도 힘들지 않은 모습을 보고 싶어하는 심리일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부자에 대한 열망이 커지는 만큼 빈자에 대한 혐오는 그 배로 증폭되고 있습니다. 부자가 아니면서도 부자가 아닌이를 경멸하고 무시하고, 상종못할 종족으로 묘사하는 그 모습이 너무 안타깝고 처연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무 살기가 힘들어서 다들 화가 나있는 것 같습니다. 그 화풀이를 나와 비슷한 이에게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높은 곳에 있는 부자들은 우러러 봅니다. 더 높은 곳을 보면서 노력하는 건 좋지만, 지금 내가 살을 부딪치며 살고 있는 이곳의 사람들을 무작정 혐오할 필요가 있을까요. 가난이라는 단어에 너무 억울한 책임까지 지우는 모습이 눈에 띄어 이번 칼럼을 썼습니다.


아울러 부가 미덕으로 평가받는 상황에서 온갖 부정한 돈으로 재산을 쌓은 이들에 대한 관심도 놓치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컸습니다. 너무 생각이 많았나요? 원고지 9매 안에 빈부를 둘러싼 저의 생각이 잘 녹아들었으면 했는데, 너무 분량도 짧고 해서 아쉬움이 남는 칼럼이었습니다.


다음 칼럼은 3월 말입니다. 이미 주제는 정했고 소재 등을 모으고 있습니다. 칼럼은 뭔가 사유거리를 던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쉽게 읽히면서도, 문장을 짧게 써서 읽는 맛 있게 써야 합니다. 다음 칼럼에서도 우리 사회의 흐름과 의식, 분위기를 잘 담고 굳이 대단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더라도 한번쯤은 삶의 방식을 곱씹는 계기를 던질 수 있도록 고민, 또 고민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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