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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이 실종된 나라

by har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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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 오렌지주스 한잔


세상이 달라졌다고 체감한 두번의 기점이 있다. 우선 2016년 김영란법 도입 당시. 밥값 3만원만 부각됐지만, 그간 정과 관행이란 미명하에 오가던 것이 공직자를 향한 청탁의 일종이라는 사실을 공식화한 계기가 됐다. 또 하나는 Z세대(1997년 이후 출생)의 등장이다. 그들은 부당한 인격 모독과 갑질을 참지 않고, 위계 서열을 거부한다. 사회 곳곳에 이끼처럼 들러붙어 있던 ‘꼰대 문화’를 뿌리째 흔들었다.


두 번의 변혁과 더불어 사회 전반의 감수성이 짙어지면서 탄생한 신조어는 ‘화이트 불편러’다. 고착된 관행에 정면으로 도전하며 사회 진보를 이끌어낸다. 방송 촬영에 동원되는 동물의 안전을 보장하라고 요구한다거나, 간호계의 고질병이었던 ‘태움’을 거부한 간호사 등이 여기에 속한다.


그런데 불편의 정도가 심화하면 화이트 불편러는 쉽게 ‘프로 불편러’가 된다. 프로 불편러는 보편 상식에 비춰봤을 때 큰 문제가 되지 않는 사안에도 조그마한 꼬투리를 잡아 따져 묻는다. 과도한 불편이 일상화된 시대, 우리는 말 한마디 잘못하면 평생 일궈놓은 경력과 성과가 물거품이 될 수도 있는 나라에 살고 있다. 권력자나 공인만 조심해야 한다면 또 모르겠는데, 인터넷을 통해 개인 누구나 시대착오적 인물로 낙인찍히기 십상이다.


불편이 자리잡으니 그나마 남아 있던 한줌의 관용도 사라졌다. 하루이틀 일이 아니지만, 이제는 한계점에 다다른 것 같다. ‘관용을 위협하는 자들에게까지 무제한의 관용을 베푼다면 관용 자체가 무너진다’는 정치철학가 칼 포퍼의 경고 자체가 무색할 지경이다.


경쟁이 체화되고, 먹고살기 너무 힘드니까 사람들은 스스로 악바리가 되어가고 있다. 화를 꾹꾹 참았다가 현실과 인터넷에서 불특정 다수에게 터뜨린다. 그 분노의 화살에 맞는 건 비단 연예인뿐이 아니다. 일상생활 곳곳에서 서로 죽일 듯이 싸우는 사람들의 다툼도 너무 익숙하다. 이대로 가다간 한국이라는 공동체 자체가 붕괴되는 것 아닐까 우려스럽다.


매번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2018년 개봉한 ‘쓰리 빌보드’다. 딸을 살인한 범인이 수년간 잡히지 않자 어머니는 마을 외곽 대형 광고판에 도발적인 광고를 싣는다. 경찰의 무능을 꼬집는 내용이었다. 암 말기였던 서장은 죄책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서장을 존경했던 후배 경찰관은 해당 광고를 실어준 광고업자를 찾아가 무자비하게 폭행한다. 이 사건으로 해임된 그는 밤중에 몰래 경찰서에 잠입해 추억에 빠진다. 그 순간 딸을 잃은 어머니가 경찰서에 불을 지른다. 경찰관은 큰 화상을 입고 병원으로 이송된다. 온몸이 타서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가 눈을 뜨자 붕대 사이로 옆병상의 환자가 보였다. 공교롭게도, 자신이 흠씬 두들겨 팬 그 광고업자였다. 업자는 자신을 폭행한 경찰관임을 한번에 알아본다. 그는 옆병상으로 한발한발 다가온다. 쿵쿵쿵쿵… 지켜보는 관객의 심장도 뛴다. 그러나 업자는 벌벌 떠는 경찰관에게 복수를 하는 대신, 오렌지주스에 빨대를 꽂아 그의 머리맡에 놓아준다. 반복되는 분노의 고리를 끊어낸 것이다. 경찰관은 깨달음을 얻고, 딸을 잃은 어머니의 울분도 십분 이해하게 된다. 영화는 그렇게 용서의 메시지를 전하며 끝난다.


현실과 영화는 분명 다를 것이다. 다만 상대방 잘못을 이해하고, 나아가 누군가를 이해하려는 노력 자체가 실종된 현실에서 오렌지주스 한 잔에 담긴 그 마음이 고맙고 소중하다. 넘치던 한국인의 정을 자신의 치부를 가리는 데 악용한 일부 권력자 탓에 훼손된 관용의 가치를 어떻게 다시 회복해야 할까. 나라가 더 갈라지기 전에 지도층이 앞서서 고민해야 할 대목이다.


박세환 뉴미디어팀장 foryou@kmib.co.kr




미국의 사상가인 로버트 그린 잉거솔은 관용을 두고 "스스로 주장할 수 있는 모든 권리를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인정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위를 한번 둘러보세요. 지금 한국은 이런 관용의 가치가 통용되고 있는 상황인가요. 저는 아닌 것 같습니다.


오늘 아침 출근길이었습니다. 횡단보도 저편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차량 하나가 파란불이 켜진 직후에 횡단보도를 통과했습니다. 눈깜짝할 새였는데, 행인 한명이 휴대전화를 꺼내서 사진을 찍더라고요. 국민신문고에 신고할 모양이었겠지요. 그러자 갑자기 갓길에 차를 대더니 운전자가 나와서 두분이 싸우더라고요. 바쁜 출근길 서로 힘들고 지치고 짜증나는건 알겠는데, 저런 모습을 하도 많이 보다보니 왜 우리는 이렇게 화가 나있을까 하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김수영 시인은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라는 시를 썼습니다. 이 시는 4/19 혁명과 5/16 쿠데타가 일어났던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독재정권의 폭압과 사회 전반의 부조리에는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면서 식당 음식맛에만 불평하는 소시민적인 자아를 성찰하는 시입니다.


격동의 근현대 시절 항상 우리에겐 적이 있었습니다. 일제도 그랬고, 독재 정권도 그랬고요. 극복해야 할 너무 큰 악당 세력이 있었기에 모든 화가 그쪽으로 향했습니다. 이제 그런 거대한 적은 없습니다. 여전히 이데올로기는 힘이 세지만, 그래도 먹고 사는 것과 일상이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되었습니다.


근데 살기가 너무 힘듭니다. 4세 고시, 7세 고시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요새 친구들은 너무 어린 나이부터 교육 경쟁에 뛰어듭니다. 그렇게 전쟁같은 학창시절을 보내도, 대학 와서도 또 공부하고 취업준비를 해야 합니다. 경기 불황으로 일자리는 줄어드는데 스펙은 하늘을 치솟는 경쟁자가 너무 많습니다.


취업하면 끝인가요? 그놈의 결혼 압박, 또 아이 낳으라는 압박.. 자녀 낳으면 내가 받았던 것처럼 또 교육을 시키는 무한 루프가 반복됩니다. 부동산과 물가는 치솟고, 월급은 안 오르고... 참 우리는 매일을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신기할 정도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게 좀 사치라는 생각도 듭니다. 국민의힘이든 민주당이든 좀 제발 서민들좀 편하게 살수 있게 뭐라도 해주는 그런 정권이 집권했으면 싶습니다. 기대안하는 게 낫다는 건 알지만..


저는 이런 복마전 같은 대한민국의 현실을 목도하며 위기감을 좀 느낍니다. 과거 보릿고래로 시작해 일제 치하와 6/25 전쟁 등을 겪으면서 어려운 시절해도 서로 나누며 참고 견뎠던 한국인의 정이 정말 사라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유튜브 실험카메라 등을 보면 한국인은 여전히 착하고, 정이 많습니다. 엄마 품에 안겨 맨발로 밖에 나온 외국아기에게 양말을 사서 신겨주고, 넥타이 착용 법을 모르는 사회초년생에게 방법을 알려주고, 직접 도와주고, 응원까지 해주는 게 우리 한국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일상 속에선 이런 정겨운 모습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누구를 배려하고, 양보하고, 잠시 져주는 것이 오히려 멍청하고 위험한 행동이라는 인식이 퍼지고 있습니다. 눈뜨고 코 베어가는 곳처럼 인식되는 대한민국, 이게 정말 맞는 걸까요?




이번 신문 지면 칼럼은 평소 저의 이런 고민을 한번 써보고 싶었습니다. 원고지 9매 안에 모든 원인과 해법을 담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아니, 해법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꼭 한번은 써보고 싶었습니다.


원래 제목은 '불편과 관용사이'로 잡았습니다. 구성은 김영란법과 Z세대의 등장을 예로 들며 불편한 감정이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점을 짚고, 다만 이런 불편함의 정도가 점점 커지면서 사회 구성원 사이의 불신이 커지고 공동체 의식이 사라진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과거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사안이 이제는 논란이 되는 것은 어찌보면 지극히 당연하기도 합니다. 사회가 변하고, 문화가 달라지고, 구성원의 사고방식이 전환하면서 세상은 진보하거나 또 퇴화하기도 합니다. 한국도 선진국 반열에 들면서 진보하고 있습니다. 과거 남성권력에 의해 자행되던 성폭력, 성추행은 이제 매우 큰 범죄가 되었습니다. 펜스룰까지 등장했지만 그것조차 갑과 을이 사라지고 갑이 스스로 조심하게 됐다는 긍정적 의미가 있습니다.


다만 요새는 너무 불편한게 많은 것 같습니다. 공인을 향해서나, 아니면 그냥 주변 사람들에게나요. 높은 도덕적 가치를 요구하는 것은 그러려니 하겠습니다만, 억지로 짜내서 논란을 만들고 사람을 매장하려는 의도도 가끔 엿보입니다. 사실 어떤 기준을 정하는 것 자체가 어렵겠지만 가끔 실수도 하고, 용서도 빌고, 다시는 그런 일을 반복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지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인간의 행동양식입니다. 그런데 요새는 그게 안 됩니다. 정말 눈깜짝할새 매장되고, 사라집니다. 마치 우리네 교육제도 같습니다. 회복할 기회를 주지않고 대학 입시에 한번 실패하면 평생 그 학교 이름이 따라붙는 것처럼. 잔인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마음이 힘들고, 누구에 대한 미움이 싹틀 때마다 칼럼에서 언급한 쓰리빌보드라는 영화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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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매우 복합적입니다. 주인공의 딸은 누군가에게 납치되어 강간당했고, 방화당해 사망합니다. 하지만 미국 시골마을이라 CCTV 등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 범인을 특정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나라 영화처럼 범인이 무슨 고위층이랑 경찰과 연계해 사건을 무마하려는 그런게 아닙니다. 경찰도 열심히 범인을 쫓는데 제대로 수사가 어렵습니다.


사건이 잊혀져가던때에 주인공은 마을 외곽 대형 광고판 3개에 광고를 냅니다. '내 딸이 죽었는데 아직도 범인을 못잡았다고? 어떻게 된건가 윌러비 서장' 뭐 이런 내용입니다. 이 영화에서 어머니는 그저 울기만 하는 약자가 아닙니다. 매우 폭력적이고, 경찰에게도 뒤지지 않습니다. 온 마을에서 존경받는 서장은 말기암 환자인데 죄책감 등으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그러면서 이 어머니를 위해 몰래 광고 연장 비용을 냅니다.


갈등은 이제 다른 쪽으로 옮겨붙습니다. 서장을 존경했던 다른 경찰관이 이 어머니와 대립합니다. 이후 줄거리는 칼럼에 쓴 그대로입니다. 이 영화에서 선악은 사실 없습니다. 누구라도 자녀를 잃으면 주인공처럼 폭력적으로 변할 것입니다. 억울함에 미쳐버릴지도 모릅니다. 경찰도 열심히 수사해도 모든 사건을 밝혀낼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딸이 죽었다는 사실에 폭발한 어머니의 분노는 여기저기로 튀지만, 결국은 오렌지주스 한잔에 담긴 그 관용의 마음 탓에 서로가 서로를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 사회에도 이런 관용의 마음이 퍼질 수 있을까요? 나에게 커다란 해악을 가한 이에게, 분노로 부들부들 몸이 떨리면서도 오렌지주스 한잔을 건넬 수 있는 그런 커다란 관용을 지닌 사람들이 점차 많아질 수 있을까요? 전 한국인의 마음속에는 선하고 착하고 낯선이에게도 친절을 베풀며 서로를 이해하려는 아름다운 DNA가 여전히 남아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랬던 우리에게 양보하면 손해본다는 이상한 선례를 주입한 것은 전적으로 특권층, 엘리트 집단입니다. 그들끼리 인맥 학연 지연 등을 동원해 특권 카르텔을 조성하고, 밀어주고 땡겨주며 사회 제도를 농락한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남이가, 한번만 도와줘 하면서 관용이라는 소중한 가치를 저들의 이익 극대화를 위해 악용했습니다. 그렇게 오명을 쓴 관용이라는 소중한 자세를 다시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이번 칼럼도 읽어주셔서 서감사합니다. 다음 칼럼은 5월 초에 올라갈텐데, 또 시급한 우리사회의 문제가 무엇인지 한달여간 고민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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