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멘토가 사라졌다
지난해 5월 대만 타이중시의 한 지하철. 객차에서 묻지마 칼부림이 벌어졌다. 일촉즉발의 상황. 곧바로 20대 후반의 승객 쉬리시엔씨가 범인에게 달려들었다. 흉기 3개를 휘두르던 범인과 쉬씨를 비롯한 시민들의 공방이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쉬씨는 왼쪽 얼굴을 9㎝ 이상 베였다. 그를 포함한 용감한 시민들 덕에 큰 피해 없이 사태는 마무리됐다. 이어진 쉬씨의 언론 인터뷰. 그는 일본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로부터 영감을 받아 범인을 제압했다고 설명했다. 그가 언급한 작품은 일본 만화 ‘장송의 프리렌’. 작품 속 용사 힘멜은 마왕을 무찌를 정도로 강하지만, 항상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이타적인 캐릭터다. 작중 힘멜의 동료들은 스스로 선한 행동을 할 때마다 “힘멜이라면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되뇐다. 쉬씨도 “그 대사가 내게 용기를 줬다”고 거들었다.
국적을 떠나 요새 청춘들은 과거 사회 문제의 주범으로 지탄받던 만화에서 교훈을 습득하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아울러 전인(全人) 교육을 도맡아온 가정과 학교, 지역사회의 공백이 체감돼 씁쓸한 기분도 들었다. 믿고 따를 사람이 오죽 없으면 현실이 아닌 만화 속에서 멘토를 찾고 있을까 싶은.
남을 돕는 좋은 사람이 되라. 내뱉긴 쉽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이 명제를 누구나 유아 때부터 반복 학습하던 시절이 있었다. 집에선 부모가, 학교에선 교사가 멘토로서 자녀 혹은 학생에게 사람답게 사는 법을 가르쳤다. 공부보다 성품을 기르는 게 더 중요하다는 취지였다. 가끔 엇나가는 아이가 있으면 지역사회가 합심해 성질을 고쳐놓기도 했다. 무서운 옆집 아저씨가 훈수를 두고, 뒷집 아주머니가 예절을 거들던 때다.
아이 하나를 키우기 위해 마을 전체가 나섰던 시대는 금세 저물었다. 1인 가구가 늘고, 삭막한 도시 생활이 보편화되고, 이웃 간 왕래가 줄고, 학교는 명문대를 가기 위한 발판 정도로 추락했다. 어떤 가치관을 갖고 삶을 마주할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좋은 대학을 나와 성공할 수 있을지가 학창 시절의 유일한 관심사가 됐다. 삶의 방향을 묻고 답할 멘토도 덩달아 사라졌다. 그러자 불안을 호소하는 성인이 늘기 시작했다. 일단 어른은 됐는데 무한 경쟁이 반복되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여전히 모르겠다는 것이다. 2010년대 반짝했던 멘토 열풍은 이를 파고들었다. 청춘 콘서트를 비롯한 멘토링 강연이나 관련 TV 프로그램이 쇄도했다. 강준만 전북대 명예교수는 2012년 펴낸 ‘멘토의 시대’에서 멘토 열풍의 핵심 코드로 위로를 꼽았다. 주로 공인인 멘토들이 이른바 ‘88만원 세대’의 고통에 공감하면서 인기를 얻었다는 분석이다. 그랬던 멘토들은 논문 짜깁기, 막말 논란 등이 불거지며 하나둘 사라졌다. 대중의 눈높이도 덩달아 높아지면서, 이제 우리 사회에는 더 이상 존경할 만한 어른이 없는 것 같다. 막막하다. 용사 힘멜과 같은 완벽한 멘토는 현실에선 영영 찾아보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무결한 멘토의 출현을 하염없이 기다릴 수만은 없다. 대신 강 교수는 멘토의 제도화를 강조한다. 멘토에겐 배려의 덕목이 있는데, 우리 사회 제도에 그런 인간미를 접목해보자는 얘기다. 강 교수는 한국에서 줄서기 문화가 자리 잡은 배경에는 한국인의 의식이 갑자기 선진화한 게 아니고, 대기번호표 발급기가 기관 곳곳에 설치된 덕이 크다고 설명한다. 이런 좋은 제도를 우선 만든 뒤 사람들이 수용케 하는 식으로 멘토링을 상시화하고, 긍정적인 삶의 방향을 자연스럽게 이식하자는 주장이다. 그는 정당에서부터 멘토의 제도화를 시작하자고 제안했는데, 글쎄. 대선을 앞두고 합종연횡을 반복하는 정치판에 너무 큰 기대를 하는 건 아닐까 싶다.
박세환 뉴미디어팀장(foryou@kmib.co.kr)
최근 일본 애니 '장송의 프리렌' 1기를 정주행했습니다. 저는 애니를 참 좋아합니다. 워낙 잘 아시는분들 많으셔서 명함도 못 내밀지만, 원나블(원피스 나루토 블리치)은 일단 다 보았고요. 귀멸의 칼날이나 주술회전, 진격의 거인, 헌터x헌터 등도 관람을 마쳤습니다. 저는 신카이마코토 작품도 좋아합니다. 특히 날씨의 아이라는 작품이 있는데요. 그 작품은 극장서 4번이나 보았습니다. 중간에 주인공이 여주와 함께 하늘에서 떨어지는 장면이 있는데, 그 웅장함을 계속 느끼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일본 애니 특유의 아련한 감성이 좋다고나 할까요.
그러다 최근에는 양산형 이세계물이 쏟아져서 일본 애니 시청을 좀 꺼리고 있었습니다. 맨날 다 똑같잖아요. 트럭에 치여서 평소 즐겨하던 게임 속으로 전이되어, 먼치킨(엄청 쎈 캐릭터)으로서 게임 세계를 평정해 나가는 그런 줄거리 말입니다. 너무 판에 박힌 스토리에 뻔한 전개.. 그런 작품이 매 분기별로 쏟아지니까 일본 애니도 이제 한물 갔구나 싶었습니다.
장송의 프리렌을 만난 건 그때였습니다. 일단 시작 시점부터가 신박했습니다. 원래 용사가 동료를 구하고 약하다가 점점 강해져서 결국 대마왕을 토벌하는게 일반 애니의 구도잖아요? 근데 이 애니는 마왕을 토벌한 이후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엘프인 프리렌은 인간과 드워프인 다른 동료보다 오래 삽니다. 수명이 깁니다. 그래서 동료들을 하나둘 하늘로 떠나보냅니다. 차가운 성격이었던 프리렌은 그 과정에서 동료들과의 소중한 추억을 곱씹고, 함께 한 여정을 돌아봅니다. 그러면서 인간에 대한 깨달음을 점차 얻어갑니다.
특히 용사 힘멜은 그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인물입니다. 완벽한 인간상입니다. 동료들을 잘 통솔하고, 주변 사람뿐 아니라 처음 보는 이까지 알뜰살뜰 잘 챙깁니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법이 없고, 뭔가 거창한 모험보다는 소소하지만 즐겁고 행복한 여정을 꿈꾸던 사람입니다. 프리렌은 그와 함께 하며 잘 사는 것, 보람찬 삶이 무엇인지 조금씩 깨닫습니다. 간만에 참 좋은 작품을 보았습니다.
여러분도 꼭 한번 보시면 좋겠습니다. 엄청난 반전이나 자극적인 연출은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네 삶이 딱 이렇지 않을까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넌지시 제안하는 참 좋은 애니였습니다.
전 계속 프리렌을 주제로 칼럼을 한번 써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접목한 것이 바로 멘토입니다. 프리렌을 비롯한 힘멜의 동료 3명은 힘멜을 추억하며 살아갑니다. 선행을 하고, 사람들을 돕습니다. 누군가 이유를 물어보면 이렇게 대답합니다. "용사 힘멜이라면 그렇게 했을 테니까" 그들의 마음속에 용사 힘멜은 아직 살아있습니다. 한 사람의 선행이 다른 이에게 귀감이 되고,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나도 남은 이들이 떠난 이를 추억하며 선행을 이어가는.. 말 그대로의 선한 영향력입니다. 좋은 멘토입니다.
그러다 지난해 5월 벌어졌던 대만 지하철 사건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용감한 청년은 왜 굳이 프리렌을 언급했을까요? 대만에는 일본 못지않게 애니메이션과 피규어, 게임 등에 열광하는 오타쿠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들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11년 전인 2014년 발생한 타이베이 지하철 흉기 테러 사건 입니다.
당시 최근 사건과 비슷하게 지하철 객차 안에서 대학생이 흉기를 휘둘렀습니다. 다행히 이번에는 인명피해가 없었지만, 당시에는 무려 4명이 숨지고 24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사건 가해자는 평소 게임을 즐겼다고 하는데, 이 사건의 배경으로 게임의 폭력성이 수면위로 부상했습니다. 쉬리쉬엔씨는 이번에 표창장을 받으면서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오타쿠는 그리 나쁜 사람이 아니다"라고 수차례 강조했다고 합니다. 게임과 만화 등 오타쿠들이 향유하는 컨텐츠에도 남을 도우라는 좋은 메시지가 많이 담겨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장송의 프리렌, 그리고 용사 힘멜을 언급한건 참 좋은 선택지라고 생각합니다. 살인자는 오타쿠라서 범행을 저지른게 아닙니다. 그냥 그 사람 자체가 제정신이 아니어서 그런 겁니다.
요새 멘토라는 말 많이 들어보셨나요? 김난도 교수나 혜민 스님 등이 부상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2010년대 입니다. 청춘 콘서트라는 명목으로 이들이 여기저기 불려다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멘토라는 말이 널리 회자됐습니다. 가끔 그들의 강연이나 책 내용을 인터넷에서 보기도 합니다. 그때마다 실소가 나옵니다. 너무 죄송하지만 말만 번지르르하고, 무슨 해결책 등은 없습니다. 살기 힘든데 공감을 해주는것만해도 좋은 선택지이긴 한데 멘토라고 부르기엔 좀 민망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러다 지금 돌아보면? 요새 멘토라고 나서는 사람이 없습니다. 시대의 지성이라 불리던 분들도 점점 사라지고 없습니다. 우리 청년들이 똑똑해지고 인터넷과 AI, 여러 미디어가 발달하면서 누구한테 질문하고 해답을 구할 필요가 사라져서 일까요? 능력 뿐 아니라 도덕성 혹은 말투나 성품까지 모든 조건이 중요해졌기 때문에 이런 여러 조건을 만족할만한 멘토가 나오지 않는 걸까요? 아무튼 그많던 멘토는 이제 없어졌습니다. 멘토링 자체도 힘을 못쓰는 것 같습니다. 바야흐로 멘토의 실종 시대가 된 것입니다. 여기서 멘토는 각 직장에서 업무를 알려주고, 돕는 차원과는 좀 다른 개념입니다. 어떻게 살아야할지 조언해주는 그런 사람을 말합니다. 저는 이런 현실을 좀 짚어보고 싶었습니다.
사실 칼럼 마지막 부분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긴 합니다. 결론을 어떻게 내려야 할지 좀 고민이 되어서요. 시대 변화에 따라 멘토가 사라졌는데 다시 누군가를 내세우기도 힘든 노릇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다보니 강준만 교수님의 책을 인용해서 끝냈는데 좀 뜬금이 없어보이기도 합니다.
강 교수님도 강조했듯이, 사람 자체에 기대는 멘토링은 이제 힘을 잃었습니다. 그런 대단한 사람이 나오기도 힘든 세상이 됐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방황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은 너무 많습니다. 학교나 지역사회, 직장에서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러니 사람이 아닌 좋은 제도로 간접적인 멘토링을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힘멜과 같은 선하고 좋은 사람들이 요직에 앉고, 권력을 갖고 선한 영향력을 바탕으로 좋은 제도를 만들어야 합니다.
저는 기자로서 어느 한쪽 정당이나 정치세력에 편을 드는 것을 경계합니다. 기자가 대놓고 호불호를 드러내는 순간 그건 기자가 아니라 플레이어입니다. 기자를 그만둬야 합니다. 아무리 특정 쪽에 선호가 간다해도 최대한 숨기고, 거리를 두고, 제3자를 유지하려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름 객관적인 기사를 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어느 정치세력으로부터 호불호가 나뉘는 유명한 기자가 된다고 좋아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기자가 아니라 플레이어가 되어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이런 시각에서 봤을때 대선을 앞둔 지금은 참 어지럽습니다. 한쪽은 대놓고 법을 유리하게 고치려 하고 있고, 다른 한쪽은 당원들이 뽑은 대선 후보를 하루아침에 바꾸는 기이한 선택을 하고 있습니다. 진짜 뽑을 사람이 없는 거 같습니다. 차악을 선택하려해도 누가 차악인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간접적 멘토링을 담당할 좋은 제도를 만들 여력이 그들에게 있을까요? 용사 힘멜이라면 이런 아수라에서 어떻게 처신했을지 너무 궁금해지는 요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