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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의 기가막힌 글쓰기

by hardy


헌법재판소가 윤석열 대통령을 파면했다. 약 25분 분량의 공소요지를 헌재 홈페이지에서 다운로드 받아 찬찬히 읽어보면서 감탄이 나왔다. 정치적 성향을 다 떠나서, 너무나 잘 쓴 글이었다. 논리 구조가 명확하고, 메시지가 분명하며, 우리 사회나 권력층에 시사하는 바가 압축적으로 담겨 있었다. 그만큼 온 국민의 눈이 쏠린 선고였고 역사에 길이 남을 장면이기에 고심한 티가 났다. 헌재 선고가 늦어진 이유가 이렇게 명문을 쓰기 위한 준비 과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문형배 헌재소장 권한대행이 낭독한 글의 구조는 이랬다. 우선 윤석열의 계엄선포가 사법 심사의 대상이 되는지를 짚었다. 이후 계엄선포가 헌법 위반인지, 그 과정이 적법했는지를 따졌다. 이어 국회에 대한 군경 투입과 포고령 발령,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대한 압수수색과 함께 전직 대법원장 등 주요 법조인의 신병 확보 시도를 분석했다. 아울러 윤석열의 법 위반 행위가 파면할 만큼 중대한 사안인지 지적했고, 이후 윤석열을 파면한다는 내용의 주문으로 끝났다.


계엄 전반에 대한 법리적 해석과 검토에 대해선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다만 주목하고 싶었던 것은 이 부분이었다. 윤석열은 계엄 이후 계속 여소야대 형국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거대 여당이 사사건건 발목을 잡아서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이 때문에 계엄을 통해 소위 겁을 주려 했다는 거였다. 대한민국 권력의 정점인 대통령이 볼멘소리를 내는 게 좀 황당했지만 윤석열 측은 계속 그런 주장을 이어갔다. 헌재는 이렇게 답했다. 요지 마지막 부분이다.




2025년도 예산안에 관하여 헌정 사상 최초로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증액 없이 감액에 대해서만 야당 단독으로 의결하였습니다. 피청구인이 수립한 주요 정책들은 야당의 반대로 시행될 수 없었고, 야당은 정부가 반대하는 법률안들을 일방적으로 통과시켜 피청구인의 재의 요구와 국회의 법률안 의결이 반복되기도 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피청구인은 야당의 전횡으로 국정이 마비되고 국익이 현저히 저해되어 가고 있다고 인식하여 이를 어떻게든 파괴하여야만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피청구인이 국회의 권한 행사가 권력 남용이라거나 국정 마비를 초래하는 행위라고 판단한 것은 정치적으로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피청구인과 국회 사이에 발생한 대립은 일방의 책임에 속한다고 보기 어렵고, 이는 민주주의 원리에 따라 해소되어야 할 정치의 문제입니다. 이에 관한 정치적 견해의 표명이나 공적 의사결정은 헌법상 보장되는 민주주의와 조화될 수 있는 범위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국회는 소수 의견을 존중하고 정부와의 관계에서 관용, 그리고 자제를 전제로 대화와 타협을 통하여 결론을 도출하도록 노력하였어야 합니다. 피청구인 역시 국회의 대표인 국회를 협치의 대상으로 존중하였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청구인은 국회를 배제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이는 민주 정치의 전제를 허무는 것으로 민주주의와 조화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피청구인은 국회의 권한 행사가 다수의 횡포라고 판단했다 하더라도 헌법이 예정한 자구책을 통해 견제와 균형이 실현될 수 있도록 하였어야 합니다.




헌재는 윤석열의 마음까지 짚었다. 대통령으로서 나름의 생각과 소신을 갖고 대한민국을 위한 정책을 시행하려 했는데, 거대 야당인 민주당이 예산 등을 무기로 이를 사사건건 막으니 화가 났을 만하다고 했다. 아울러 헌재는 민주당도 지적했다. 비록 당이 다르고, 이념이 상이한 정부와도 관용을 바탕으로 더 소통했어야 한다는 거다. 참 여러 각도에서 고민한 흔적이 보이는 부분이다.


다만 헌재는 아무리 의견이 다르더라도 행정부와 입법부는 민주주의의 기틀 안에서 소통하고 싸워야 한다고 적시했다. 민주당의 횡포가 밉더라도, 그들이 다수당이 된 것은 국민의 선택에 따른 것이다. 그들을 배제하는 것은 국민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다. 아마도 이런 논리에 빠지지 않기 위한 명분으로 윤석열 측이 부정선거 의혹을 계속 제기한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헌재는 대통령으로서 무력감을 느꼈더라도, 고도의 정치력을 발휘해 그들을 설득하거나 아니면 법적 제도적 리미트 하에서 압박했어야 한다는 취지로 판결했다. 부정할 수 없는, 상식적인 지적이다.


헌재는 요지를 이렇게 이어간다.





피청구인은 취임한 때로부터 약 2년 후에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에서 피청구인이 국정을 주도하도록 국민을 설득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결과가 피청구인의 의도에 부합하지 않더라도 야당을 지지한 국민의 의사를 배제하려는 시도를 하여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청구인은 헌법과 법률을 위반하여 이 사건 계엄을 선포함으로써 국가 긴급권 남용의 역사를 재현하여 국민을 충격에 빠뜨리고 사회, 경제, 정치, 외교 전반 전 분야에 혼란을 야기하였습니다.


국민 모두의 대통령으로서 자신을 지지하는 국민을 초월하여 사회공동체를 통합시켜야 할 책무를 위반하였습니다. 군경을 동원하여 국회 등 헌법기관의 권한을 훼손하고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침해함으로써 헌법수호의 책무를 저버리고 민주공화국의 주권자인 대한국민의 신임을 중대하게 배반하였습니다.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돌아오는 중간 평가 식의 통과의례가 있다. 바로 총선이다. 국민의 기대 속에 취임한 대통령이 일을 제대로 잘하고 있는지 지적하는 절차다. 그 절차에서 윤석열은 참패했다. 국정을 잘 운영하고, 국민의 마음을 더 잘 헤아리며, 하루하루 힘들게 사는 서민들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줄 정책을 만들고, 국회를 자주 찾아가서 만나고 설득하며 그 정책이 통과되도록 노력했으면 될 일이었다.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계속 법조인인 것처럼 굴었다. 각종 의혹에 침묵했고, 야당을 자주 만나려는 노력을 거부했으며, 난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왜 이렇게 안 도와주냐고 공식석상에서 자주 불만을 토로했다. 생각과 의견이 다른 상대방을 적으로 규정하고, 마치 수사대상처럼 생각했다. 정치의 영역에서 선악 따윈 없다. 옳고 그름이 아니고 주어진 희소한 자원을 어떻게 배분할지 각자의 신념을 바탕으로 협상하는 게 정치다. 그런데 윤석열은 협상 대신 배제와 무시를 택했다. 헌재는 대통령의 지난 행보를 하나하나 지적했다.


아무리 보수 쪽 대통령이라도 윤석열은 사회통합에도 나서야 했다. 하지만 다양한 연설과 공식석상 발언에서 그는 의견이 다른 이와 세력을 지적하고 적으로 치부했다. 결국 이번 사태는 법조계의 핵심으로 군림하던 윤석열의 정치도전이 실패로 끝난 거로 볼 수 있다. 공부 잘해서 법조인이 되어 여러 권력이나 기업 비리를 때려잡던 이조차도 정치는 제대로 하지 못했다.




헌재의 공소 요지는 일관되게 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모두가 욕하지만 정치는 우리의 삶을 바꾸는 원동력이다. 법 하나를 만들고 통과시키는 것은 고도의 정치력과 정무감각을 필요로 한다. 정치권은 선거마다 새 인물을 찾아 새 피를 수혈한다. 나름대로 쇄신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의사나 판사, 검사, 일부 언론인, 교수 등이 갑자기 정치인이 된다. 연착륙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케이스가 훨씬 더 많다. 각자 영역에선 최고의 전문가라도, 정치는 또 새로운 영역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해도 상대방을 존중하고 좀 더 굽히고 숙이고 진심을 보여야 인정받는 곳이다.


우리는 한국 최고의 엘리트라 평가받는 법조계 출신 대통령의 몰락을 생생히 목도했다. 공부 잘하고, 똑똑하고, 사회 정의를 위해 헌신한 사람일지라도 전 국민에게 영향을 미치는 국가 정책을 만들고 집행하고, 상대방을 설득하는 방식으로 통합을 이루는 데는 실패하는 것도 확인했다. 곧 조기대선이 이뤄질 것이다. 지난 4달간 이어진 혼란으로 국민들은 퍽이나 지쳐있는데, 이를 봉합하고 새롭게 시작하자고 외칠 수 있는 그런 포용의 지도자가 나올 수 있을까. 어려울 것 같지만, 그래도 또 한 번 속아보자는 마음으로 다시 희망의 봄바람이 불어오길 간절히 기도한다. 정치의 어려움을 잘 알고, 그 속에서 그래도 제대로 정치하려는 그런 사람이 새로운 대통령이 되길 바란다.


하나 더. 헌재의 이번 판결문은 매우 쉽게 쓰여졌다. 난 평소 중언부언과 복문의 향연으로, 수차례 읽어봐도 도대체 무슨말인지 모르겠는 판결문을 접하면서 왜 법관들은 굳이 이렇게 쓰는지 궁금했다. 보다 정확하게 쓰다보니 그런걸까. 그런데 이번 공소 요지는 일반인의 언어로 구성됐다. 무슨말인지 바로 이해가 됐다. 국민의 눈높이에서 이해하기 쉬운 유연한 논리로 무리없이 작성됐다. 모든 권력의 원천이 되는 주권자인 국민을 위한 것이었을까. 누가 주도해서 작성한지는 모르겠지만, 참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가장 인상깊던 구절은 여기였다. '한편 국회가 신속하게 비상계엄해제 요구 결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시민들의 저항과 군경의 소극적인 임무 수행 덕분이었으므로, 이는 피청구인의 법 위반에 대한 중대성 판단에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라는 부분.


사건팀장을 맡고 있던 지난해 계엄 당시 나는 서울지방경찰청 기자실에서 실시간으로 상황을 지켜봤다. 초유의 계엄사태, 국회로 몰려간 계엄군을 막은 것은 평범한 우리 시민들이었다. 나라를 위해 봉사해 온 우리 군인들을 시민과 대치하도록 만든 것은 바로 윤석열이었다. 미숙한 정치 신인의 정신나간 몽니를 막은 것도 우리들이었다. 우리 선조들이 목숨바처 쟁취한 그 민주주의를 우리의 손으로 지켜낸 오늘을 절대 잊지 말자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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