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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획득체계, 넌 누구냐

by har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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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점심시간을 이용해 국회도서관에서 열린 국방획득체계 혁신 세미나에 잽싸게 다녀왔다. 방산 관련 세미나 첫 참석이다. 떨리는 마음으로 들어섰는데, 아예 세미나 제목부터 아리송했다. 국방획득체계라는게 도대체 뭘까 싶어서.


낯설고 딱딱하게 들리는 이 용어. 그저 군 내부의 행정 절차를 가리키는 말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세미나를 듣다보니 이 단어가 곧 한국 국방의 핵심을 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총 한 자루, 전투기 한 대, 무전기 하나, 장병이 손에 쥐는 모든 장비는 이 보이지 않는 체계를 거쳐서야 세상에 나온다. 표면적으로는 그저 예산 심사, 절차 승인, 계약 체결이라는 단조로운 행정 같지만, 그 속에는 국민의 세금, 병사의 생명, 그리고 국가의 안보라는 무거운 무게가 얹혀 있었다.


한국의 국방획득체계가 왜 이토록 중요하게 다뤄지기 시작했는지는 우리의 근현대사를 들여다보면 쉽게 알 수 있다. 6·25전쟁 직후, 한국군은 스스로 무기를 조달할 능력이 거의 없었다. 미국이 제공하는 원조 물자가 사실상 모든 무기를 대신했다. 총도, 장갑차도, 심지어 군복과 군화까지도 외부에 의존할 수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당시에는 ‘획득체계’라는 말조차 필요하지 않았다. 미군이 가져다주는 것을 쓰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한국은 점차 스스로 군대를 책임져야 했고, 그러자 자연스럽게 ‘무기를 어떻게 들여오고, 어떻게 만들고, 어떻게 폐기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었다. 이 고민이 체계화된 것이 바로 국방획득체계였다.


국방획득체계는 단순한 절차의 집합이 아니다. 이는 국가가 전쟁에 대비하는 방식을 담아낸 일종의 헌법과도 같다. 생소하니까 일단 쉽게 설명을 해 보겠다. 이 체계는 이런 순서로 이뤄진다. 먼저 합참에서 소요를 제기하면, 이 소요가 실제로 타당한지 검증하는 과정이 뒤따른다. 소요란 것은, 안보 태세 유지를 위해 필요하다, 그러니 구매를 하거나 생산을 해야 한다고 요청하는 행위로 이해하면 쉽다.


이후 탐색개발 단계에서 기술적 가능성을 따져본 후, 본격적인 체계개발과 시험평가, 양산과 전력화로 이어진다. 마지막에는 장비가 현역에 배치되어 운영되다가 수명이 다하면 폐기된다. 이 과정은 수년에서 수십 년에 걸쳐 이어진다. 우리같은 일반 시민이 보기엔 답답할 만큼 느려 보이지만, 사실상 이 느림 속에 안전장치가 숨어 있다. 장비가 졸속으로 도입되어 실패하는 일을 막기 위한 일종의 방파제다. 신중하고 천천히 도입을 고려하는 셈이다.


그러나 이 느린 속도가 언제나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실제로 한국군의 국방획득체계는 ‘지연’이라는 꼬리표와 늘 함께였다. 차세대 무전기 사업은 수차례의 시험평가와 검증 끝에 배치가 늦어졌고, K-2 전차의 경우 국산 파워팩 문제로 인해 전력화가 수년 지연됐다. 이런 사건들은 국민의 불신을 키우기도 했다. 국민 세금이 투입되는 만큼 더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또 다른 쪽에서는 장병의 생명을 책임지는 장비인 만큼 ‘느림의 미덕’을 지켜야 한다는 반론도 팽팽히 맞섰다. 이처럼 국방획득체계는 늘 양날의 검이었다.


획득체계의 복잡함은 때때로 비리의 온상이 되기도 했다. 수많은 검증과 회의, 계약 과정이 얽히면서 일부 군 관계자나 업체들이 불투명한 로비와 뒷거래를 일삼은 것이다. 1990년대 이후 반복적으로 터진 방산비리 사건들은 국민들에게 씻기 어려운 불신을 남겼다. ‘군이 무기를 들여오는 과정은 국민이 알 수 없는 검은 상자’라는 인식이 퍼지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이후 방위사업청이 출범하고 제도적 투명성을 높이려 했지만, 여전히 제도의 벽은 높고 국민에게는 낯설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체계가 없었다면 한국군은 지금의 모습을 갖출 수 없었을 것이다. KF-21 보라매 전투기 개발, K-9 자주포 수출, 차세대 이지스 구축함 사업 모두 국방획득체계라는 레일 위에서 움직였다. 복잡하고 느린 절차지만, 그 과정을 통해 축적된 경험이 곧 한국 방산의 경쟁력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K-방산’이라는 이름으로 세계 시장에 내놓는 무기들 역시, 이 보이지 않는 체계의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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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의 국방획득체계는 과거와 달리 단순히 무기를 사오는 절차가 아니다. 기술 패권 경쟁이 치열한 21세기에서, 이는 국가의 미래 전략을 설계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인공지능, 드론, 사이버 무기 같은 신개념 전력이 속속 등장하는 시대에, 과거처럼 10년 넘게 기다리며 장비를 도입하는 방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한국군도 '신속획득제도' 같은 새로운 길을 찾고 있다. 민간 기술을 빠르게 접목하고, 긴급한 전장 상황에 맞춰 단기간 내에 장비를 현장에 배치하려는 시도다. 그러나 이런 시도 역시 기존 체계와 충돌하며 갈등을 낳고 있다. 속도를 높이면 검증이 약해지고, 검증을 강화하면 속도가 늦어지는 딜레마다.


결국 국방획득체계는 단순히 행정적 절차가 아니라 국가 안보와 산업, 정치와 경제를 엮는 종합 시스템이다. 병사의 손에 쥐어진 한 자루의 소총을 통해 국민은 이 복잡한 체계와 연결되어 있다. 기자로서 수많은 장비 도입 과정을 지켜보며 깨달은 건 단순했다. 국방획득체계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한국 국방의 심장이라는 사실이다.


군이 무기를 도입하는 과정은 겉으로 보기엔 단순해 보인다. 필요하다고 하면 예산을 세우고 사오면 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새로운 무기 체계를 들여오기 위해서는 수십 차례의 회의와 검증, 수많은 법적 절차를 밟아야 한다. 처음 소요가 제기될 때부터 이미 긴 여정이 시작된다.


현장에서는 병사들이 불편을 호소하고, 지휘관들은 작전 수행에 필요한 장비가 부족하다고 보고한다. 이 요구가 합참으로 올라가면 국가 전체의 전략 차원에서 검토된다. 단순히 지금 불편하다고 해서 당장 들여올 수 있는 건 아니다. 장기적인 군사 전략, 주변국의 군사 동향, 미래 전쟁 양상까지 고려해야 한다.


타당성이 검증되면 탐색개발 단계로 들어선다. 기술적으로 실현 가능한지, 국내 업체가 감당할 수 있는지, 해외 도입이 더 현실적인지 등을 따진다. 이 단계에서 많은 사업이 좌초된다. 지나치게 이상적이거나 현재의 기술로는 실현하기 어려운 요구사항들이 걸러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 단계에서 제대로 걸러내지 못하면 이후 체계개발과 양산 단계에서 막대한 예산 낭비로 이어진다. 국민 입장에서는 이 모든 과정이 보이지 않지만, 사실상 가장 중요한 ‘필터링’이 이곳에서 이루어진다.


체계개발 단계에서는 실제 시제품이 만들어지고, 군이 요구한 작전 환경에서 시험평가가 진행된다. 이 단계가 가장 길고 비용이 많이 든다. 업체들은 군의 까다로운 요구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 설계를 수정하고, 수차례 시험을 반복한다. 실패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성공적으로 통과하면 드디어 양산 단계에 들어간다. 방위사업청은 입찰을 공고하고, 업체들은 치열하게 경쟁한다. 이때부터는 언론과 국회의 관심도 집중된다. 수조 원이 걸린 계약이니만큼 정치적 논란도 뒤따른다.


이 과정에서 비리가 발생하기도 한다. 로비나 불투명한 계약, 리베이트 의혹은 한국 방산 역사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어 왔다. 그때마다 제도 개선이 있었지만, 국민의 눈에는 여전히 의심이 남아 있다. 국방획득체계가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선 단순히 절차를 늘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진정한 투명성과 책임성이 필요하다.


전력화 단계에 들어서면 무기가 실제 부대에 배치된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현장에서 장병들이 장비를 사용하면서 문제점을 발견하고, 이는 다시 개량사업으로 이어진다. 국방획득체계는 직선이 아니라 순환이다. 무기는 태어나고, 쓰이고, 고쳐지고, 결국 폐기되며, 이 모든 과정이 하나의 체계 속에서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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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획득체계의 느림은 언제나 비판의 대상이었다. 차세대 무전기 사업이 수년간 지연된 동안, 민간 통신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병사들이 쓰는 무전기가 민간인들의 스마트폰보다 뒤처지는 상황이 벌어졌다. 국민들은 납득하기 어려워했다.


하지만 군 관계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민간에서 쓰는 기술은 문제가 생기면 교체하면 그만이지만, 군에서 쓰는 무기는 생명과 직결되기 때문에 1%의 위험도 허용할 수 없다.”


이 주장은 타당하다. 그러나 지나치게 보수적인 태도는 오히려 더 큰 위험을 낳는다. 북한은 값싼 드론으로 한국 영공을 수차례 침범했다. 그때마다 군은 탐지와 대응에 허둥댔다. 이미 민간에서 흔하게 쓰이는 드론이 군에게는 위협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여기서 드러난 것은 국방획득체계의 경직성이었다. 새로운 위협이 나타나도 기존 절차를 밟아야 하니 대응이 느릴 수밖에 없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신속획득제도가 도입됐다. 긴급히 필요한 장비는 1~2년 안에 들여올 수 있도록 절차를 대폭 줄였다. 실제로 북한 무인기 사건 이후 드론 탐지 장비가 이 제도를 통해 빠르게 배치되었다. 하지만 신속획득제도 역시 만능은 아니다. 속도를 높이는 만큼 검증이 줄어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만약 서둘러 들여온 장비가 실전에서 오작동한다면 그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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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나라들의 사례는 시사점을 준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획득체계를 운영한다. DARPA 같은 기관이 민간 기술을 빠르게 흡수하는 데 능하지만, 초대형 사업들은 오히려 지연과 예산 낭비로 악명이 높다. F-35 전투기 사업이 대표적이다. 반면 이스라엘은 긴급한 안보 환경 덕분에 빠른 결정을 내린다. 아이언돔은 불과 몇 년 만에 개발돼 실전에 배치됐다. 작은 나라의 생존 전략이 체계의 속도를 바꾸어놓은 것이다.


한국은 이 두 극단 사이에서 길을 찾아야 한다. 규모와 신속성,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아야 하는 운명이다. 하지만 현재의 국방획득체계는 여전히 무겁고 느리다. 그 속에서 병사들은 낡은 장비를 손에 쥔 채 임무를 수행한다. 국민들은 수십 년간 반복된 방산비리 뉴스를 보며 불신을 키운다. 체계의 본래 목적은 신뢰와 투명성을 보장하는 것이었지만, 어느새 불신의 상징이 되어버린 아이러니가 여기 있다.




국방획득체계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몇 가지 과제가 분명하다.


첫째는 기술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는 것이다. 인공지능, 양자 기술, 사이버 무기, 드론과 같은 신개념 전력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과거처럼 10년 동안 개발과 검증을 거쳐야 한다면 이미 실전에선 쓸모없는 무기가 될 수 있다.


둘째는 예산과 인구라는 현실적 제약이다. 병력이 줄어드는 시대에 더 효율적인 장비를 더 빠르게 들여와야 한다.


셋째는 민군 협력의 확대다. 이미 많은 민간 기업과 스타트업들이 국방 분야에 뛰어들고 있다. 하지만 기존 체계는 이들의 참여를 가로막는 벽이 높다. 민간의 혁신을 흡수할 수 있는 유연한 제도가 필요하다.


넷째는 투명성이다. 단순히 절차를 늘려서 시간을 지연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국민에게 데이터를 공개하고, 감시를 강화하며,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는 방식으로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국방획득체계는 국민의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뉴스에 등장해도 눈길을 끌지 못한다. 그러나 이 체계야말로 장병의 안전과 국가의 미래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엔진이다. 총알 한 발, 무전기 하나, 전투기 한 대가 부대에 들어오기까지 수많은 단계와 수년의 시간이 걸린다. 복잡하고 답답해 보이지만, 그 복잡함 속에 안전과 투명성이 숨어 있다.


국민이 이 과정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국방획득체계라는 낯선 단어는 더 이상 딱딱한 행정용어가 아니다. 그것은 곧 국민 세금이 흘러가는 길이자, 한국의 안보를 떠받치는 기둥이다. 방위사업청은 곧 이러한 국방획득체계 개선을 위한 공청회를 연다고 한다. 그 공청회도 한번 취재해 보고 싶다.


이렇듯 국방획득체계는 단순히 군의 장비를 마련하는 절차가 아니라, 국가의 미래를 설계하는 과정이다. 빠르게 변하는 전쟁 양상 속에서 이 체계가 얼마나 투명하고 유연하게 작동하느냐에 따라 우리 군의 대응력과 국민의 신뢰가 갈린다. 결국 국방획득체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무기를 넘어서 나라가 안전을 지켜내는 방식을 이해하는 일이며, 이는 민주사회 시민으로서 우리가 함께 짊어져야 할 책임의 일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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