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글로벌 방산 시장은 구조적으로 다시 짜이고 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미국은 동맹국들에게 더 이상 완곡한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방위는 각자의 책임이라는 메시지가 분명해졌고, 그 수단은 국방비 증액 요구였습니다.
아쉽게도 한국과 일본, 유럽연합(EU)은 그 압박의 직접적인 대상이 됐습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지난 6월 정상회의에서 2035년까지 회원국 국방비를 국내총생산(GDP)의 5%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를 공식 합의했습니다. 선언이 아니라 일정이 제시된 합의였다는 점에서 시장은 즉각 반응했습니다.
여기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 중동 분쟁의 상시화가 겹쳤습니다. 단기 충돌이 아니라 장기 소모전이 일상이 되면서 각국은 비축 물량과 후속 군수지원까지 계산하기 시작했습니다. 무기를 한 번 사고 끝내는 시대가 아니라, 최소 10년 이상을 내다보는 계약 구조가 일반화됐습니다.
이 환경은 가격 대비 성능과 납기, 생산 안정성을 동시에 충족할 수 있는 국가에게 유리하게 작용했고, 그 조건에 한국 방산이 정확히 들어맞았습니다.
K-방산 수주잔고 100조원의 경사
국제적 기류에 힘입어 2025년 3분기 기준 한국 방산 빅4의 수주잔고는 약 91조 원으로 집계됐습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 31조4106억 원, 현대로템 29조6088억 원, 한국항공우주산업(KAI) 26조2673억 원, LIG넥스원 23조4300억 원입니다. 연말까지 신규 계약과 후속 물량이 더해질 경우 100조 원 돌파는 시간문제로 평가됩니다.
이 숫자가 갖는 의미는 단순한 규모 확대에 있지 않습니다. 2021년 말 42조 원 수준이던 수주잔고가 4년 만에 두 배 이상 늘어났다는 점도 중요하지만, 더 핵심적인 변화는 수주의 성격입니다.
과거 수주잔고는 인도 시점이 불확실한 계약이 상당 부분 포함돼 있었습니다. 반면 현재의 수주잔고는 이미 생산 라인이 돌아가고 있고, 일정이 촘촘하게 관리되는 계약이 다수입니다. 말 그대로 ‘일감’이 아니라 ‘실행 중인 사업’이 쌓여 있는 구조입니다.
실적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방산 빅4의 2025년 누적 영업이익은 3조4000억 원을 넘기며, 3분기 만에 지난해 연간 실적을 이미 초과했습니다. 수주가 매출과 이익으로 전환되는 속도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졌다는 의미입니다.
2025년 방산 수출의 또 다른 특징은 방식의 변화입니다. 과거처럼 무기 한 종을 팔고 끝나는 구조는 빠르게 줄어들고 있습니다. 기술 이전, 현지 생산, 유지·보수·정비(MRO)를 묶은 패키지 수출이 기본값이 됐습니다. 이는 수주금액을 키우는 효과도 있지만, 무엇보다 계약 기간을 길게 만들고 관계를 단단하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유럽과 중동을 중심으로 한국 방산 기업이 ‘장기 안보 파트너’로 인식되기 시작한 배경도 여기에 있습니다. 가격과 성능, 납기라는 전통적인 강점 위에 운영과 관리 능력이 더해지면서 신뢰의 축이 형성됐습니다. 수주잔고가 급증한 이유 역시 이 구조 변화와 맞닿아 있습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 가장 공격적인 확장
2025년 K-방산을 상징하는 기업을 하나 꼽으라면 한화에어로스페이스를 빼기 어렵습니다. 폴란드, 노르웨이, 루마니아 등 유럽을 중심으로 K9 자주포 공급이 이어졌고, 중동과 아프리카 시장에서도 존재감을 확실히 각인시켰습니다. 2022년 체결한 이집트 K9 자주포 패키지 계약은 단순 납품이 아니라 현지 운용과 유지·보수를 포함한 장기 사업으로 전환되고 있습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공격적 행보에는 분명한 배경이 있습니다. 올해 3월 단행한 대규모 유상증자가 시장의 우려와 달리 성공적으로 마무리됐기 때문입니다.
회사는 당시 국방비 증가와 맞물린 각국의 방산 자국화 흐름을 명확히 짚었습니다. 무기를 사되, 생산과 정비는 자국에서 하겠다는 요구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선제적으로 현지 생산기지를 확보하겠다는 전략이었습니다.
투자 계획의 규모는 이를 잘 보여줍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동유럽 천무 유도탄 합작법인, 사우디 국가방위부와의 합작 투자, 미국 탄약 스마트팩토리 구축, 무인기 체계와 엔진 시설 확충, 유럽 유도탄·탄약·지상장비 거점 확보 등에 총 6조2700억 원을 투입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단순 수출 기업이 아니라 글로벌 방산 생태계의 일부로 들어가겠다는 선언에 가깝습니다.
LIG넥스원, 눈에 띄지 않게 쌓은 체력
LIG넥스원의 2025년은 화려하지 않지만 단단했습니다. 미사일과 레이더, 전자전 분야에서 대한항공, HD현대중공업과 협력하며 굵직한 국내 수주를 잇달아 따냈습니다. 대한항공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1조7775억 원 규모의 한국형 전자전기 체계개발 사업을 수주한 것이 대표적입니다. 기존 항공 강자로 평가받던 KAI를 제쳤다는 점에서 업계의 시선이 쏠렸습니다.
LIG넥스원의 수주잔고 약 23조4000억 원은 단순히 큰 숫자가 아니라, 약 6년치 매출에 해당하는 규모입니다. 회사는 이를 바탕으로 생산과 연구 인프라 확충에 속도를 냈습니다. 판교 R&D 센터, 구미 CIWS-Ⅱ 조립동, 대전 위성·레이저 조립동 등 핵심 설비 투자가 이어졌고, 최근에는 경북 구미 하우스에 3470억 원 규모의 신규 시설 투자도 결정했습니다.
2029년까지 생산설비를 단계적으로 확충하겠다는 계획은 단기 실적보다 중장기 파이프라인을 중시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다만 내부적으로는 잡음도 있었습니다. 미국 로봇기업 고스트로보틱스 지분 인수 이후 가시적인 성과가 아직 드러나지 않았고, 성과 분배를 둘러싼 노사 갈등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기술 기업으로서의 위상과 조직 내부 신뢰를 어떻게 함께 관리할지가 향후 과제로 남았습니다.
현대로템, 계약은 컸고 책임도 커졌다
현대로템의 2025년은 수치만 놓고 보면 성공적인 해였습니다. 지난 8월 폴란드 군비청과 체결한 K2 전차 2차 이행 계약 규모는 약 65억 달러, 원화로 환산하면 9조 원에 이릅니다. 단일 방산 계약으로는 국내에서도 손꼽히는 수준입니다. 2022년 1차 계약 이후 물량 인도가 차질 없이 진행되면서 현대로템의 ‘이행 능력’에 대한 신뢰도 함께 쌓였습니다. 방산 시장에서 계약 체결만큼 중요한 것이 약속을 지키는 능력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 부분은 현대로템의 가장 큰 자산입니다.
중남미 시장에서도 성과가 이어졌습니다. 현대로템은 페루 육군과 현지 국영 방산기업과 함께 K2 전차 54대와 차륜형 장갑차 141대를 포함한 총 195대 지상장비 공급에 대한 총괄합의서를 체결했습니다. 최종 계약이 성사될 경우 수주 금액은 최대 3조 원 규모로 추산됩니다.
유럽에 이어 중남미까지 K2 플랫폼이 확장되는 셈입니다. 단순한 수출이 아니라 현지 생산과 기술 이전을 병행하는 모델이라는 점에서, 현대로템의 수출 전략이 한 단계 진화했다는 평가도 나옵니다.
다만 성과의 크기만큼 부담도 커졌습니다. 담합 논란이 불거지며 기업 이미지에 타격을 입었고, 노동조합과의 임금 협상 역시 장기간 표류했습니다. 여기에 윤석열 정부 시절 방산 분야에서 특혜를 받았다는 정치적 의혹까지 더해지며 경영 리스크는 단순한 실적 문제를 넘어선 양상을 띠었습니다. 방산 기업이 커질수록 기업 내부의 관리 능력과 외부 신뢰가 동시에 시험대에 오를 수밖에 없다는 점을 보여준 사례입니다.
KAI, 실적보다 뼈아팠던 공백
2025년 KAI의 성적표는 방산 빅4 가운데 가장 복잡한 평가를 받습니다. 3분기 영업이익은 602억 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21.1% 감소했습니다. 같은 기간 한화에어로스페이스와 LIG넥스원, 현대로템이 역대급 실적을 기록한 것과 대비되는 결과입니다.
단기 실적 부진보다 더 뼈아팠던 것은 연이은 수주 실패였습니다. 한국형 전자전기 체계개발 사업에서 LIG넥스원-대한항공 컨소시엄에 밀렸고, 1조 원 규모의 블랙호크(UH-60) 성능개량 사업에서도 대한항공에 주도권을 내줬습니다.
업계에서는 이 같은 결과의 배경으로 리더십 공백을 지목합니다. KAI는 올해 6월 정권 교체 직후 대표이사 사장이 자리에서 물러났고, 이후 최종 사장 선임 절차가 해를 넘길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습니다. 최고경영자의 부재는 단순히 의사결정 속도 문제에 그치지 않습니다. 대형 국책 사업이 얽힌 방산 업계에서는 정치적 신뢰, 조직 안정성, 장기 전략이 동시에 작동해야 하는데, 이 축이 흔들리면 경쟁력은 빠르게 약화됩니다.
KAI는 FA-50과 KF-21이라는 분명한 핵심 자산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완제기 수출에 더해 훈련과 정비, 군수지원을 포함한 통합 패키지 전략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주주가 한국수출입은행인 지배구조, 정권 변화에 따라 흔들리는 경영 안정성은 반복적으로 지적되는 구조적 한계로 남아 있습니다.
숫자 너머에 드러난 공통과제
2025년 방산 빅4의 실적을 종합하면 한 가지 공통점이 분명해집니다. 잘 팔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수주잔고 100조 원, 연간 영업이익 5조 원이라는 숫자는 인상적이지만, 그 숫자를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은 점점 까다로워지고 있습니다.
방산 산업은 이제 기술력과 가격 경쟁력만으로 평가받지 않습니다. 보안 관리, 내부 통제, 의사결정의 투명성, 노사 관계까지 포함한 전반적인 운영 능력이 동시에 요구됩니다.
이는 글로벌 시장의 시선 변화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유럽과 중동의 주요 발주국들은 단순히 무기를 잘 만드는 회사를 찾지 않습니다. 정치적 리스크를 관리할 수 있는지, 장기간 협력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지, 계약 이행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책임 있게 대응할 수 있는지를 함께 봅니다. 방산이 국가 안보와 직결된 산업인 만큼, 기업의 신뢰도는 곧 국가의 신뢰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2025년은 K-방산이 분기점을 넘어선 해로 기록될 가능성이 큽니다. 수출 규모와 실적 측면에서는 분명 전성기입니다. 반도체에 이어 제조업 수출의 또 다른 축으로 자리 잡았다는 평가도 과장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성과는 동시에 새로운 기준을 요구합니다. 잘 팔리기 때문에 더 엄격한 관리가 필요해졌고, 커졌기 때문에 더 많은 감시를 받게 됐습니다.
방산 기업들은 이제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단기 실적과 주가에 집중하는 기업으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장기적인 신뢰와 전략을 쌓아가는 국가 핵심 산업으로 자리매김할 것인지의 문제입니다. 정치 환경 변화, 노사 갈등, 지배구조 문제는 더 이상 부차적인 이슈가 아닙니다. 실적만큼 중요한 경영 변수로 전면에 등장했습니다.
더 어려운 시험이 남았다
2025년 K-방산 성적표는 대체로 A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이 성적표는 기말고사가 아니라 중간고사에 불과합니다.
다음 시험은 훨씬 복잡합니다. 글로벌 방산 시장의 경쟁은 더 치열해질 것이고, 기술 이전 요구는 더 노골적으로 제기될 것입니다. 정치적 환경은 언제든 바뀔 수 있고, 내부 갈등은 외부 신뢰를 한순간에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결국 질문은 하나로 모입니다. 한국 방산은 잘 팔리는 산업을 넘어, 계속 믿을 수 있는 산업이 될 수 있는가입니다.
2025년은 그 가능성을 보여준 해였고, 동시에 그 가능성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를 드러낸 해였습니다. 성적표는 나왔고, 이제는 그 다음 장을 어떻게 써 내려갈지가 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