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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표 방산업체 4곳 해부

by har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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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방산의 지도를 펴면 네 개의 굵은 점이 먼저 보인다. 한화, LIG넥스원, 현대로템, KAI. 이름의 무게가 다르고 사업 분야도 다르지만, 이들은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 “외부에서 사오던 것을 우리 손으로 만들겠다”는 집념이다. 그리고 “우리만의 것으로 세계 시장에 나가겠다”는 욕심도 있다. 이 두 문장이 지난 수십년 간 한국 방산의 눈부신 성과를 가능케 했다.


국내 4대 방산 업체의 출발선은 제각각이다. 누군가는 화약과 포신에서, 누군가는 레이더와 전자전에서, 또 다른 이는 궤도와 전차에서, 마지막 한 곳은 하늘과 우주에서 첫 발을 뗐다. 한화는 ‘폭약의 시대’에서 시작해 육·해·공 전영역으로 몸집을 키운 종합형 플레이어다. LIG넥스원은 ‘센서와 유도’로 대표되는 정밀의 세계를 파고들어, 보이지 않는 눈과 손이 되는 시스템을 다뤄왔다. 현대로템은 궤도와 장갑의 기술을 바탕으로, 철판이 움직이는 모든 것—전차·장갑차—의 신뢰성을 담당한다. KAI는 하늘을 업으로 삼았다. 훈련기에서 경공격기, 그리고 무인·우주로 이어지는 곡선 위에 한국 항공산업의 좌표를 찍는 회사다.


이 네 회사의 실루엣에는 한국 현대사의 큰 물결이 겹쳐진다. 부족했던 외화와 취약했던 안보, 수입 의존에서 벗어나려는 자립의 압박, 그리고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의 산업 전략. 어느 날 갑자기 도약한 기업은 없다. 군이 운용하는 장비의 결함을 현장에서 메모로 받아 적고, 시험장에서 밤을 새워 데이터가 튀는 원인을 찾아내고, 도면 위에 ‘이론상 가능’을 ‘실물의 가능’으로 바꾸는 과정이 켜켜이 쌓였다. 남의 부품에 기대던 시절에는 수리 하나도 제때 못 했다. 그래서 ‘내가 만든 걸 내가 고친다’는 단순한 문장이 현실에서 구현화는 데에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한국을 대표하는 4개의 방산업체. 이 말이 무겁게 들리는 까닭은 단지 매출 규모 때문만은 아니다. 서로의 빈칸을 메우는 구조를 갖췄기 때문이다. 지상(현대로템)–정밀유도·전자(LIG넥스원)–종합 체계와 포병·방공(한화)–항공우주(KAI)로, 큰 틀의 생태계가 그려진다.


군이 새로운 전력을 기획하면, 센서–지휘통제–타격–플랫폼이 한 줄로 묶여야 한다. 한 회사로는 안 되는 일, 네 회사가 엮이면 가능해지는 일들이다. 그래서 한국의 방산은 ‘기업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연결의 이야기’다. 한 축이 흔들리면 다른 축도 버거워진다. 반대로 어느 한 축이 확실히 올라서면, 전체가 덩달아 넓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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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영광의 순간만 있었던 건 아니다. 납기와 품질의 압박, 이전 계약의 ‘그림자’가 새 프로젝트의 발목을 잡던 시절도 있었다. 수출은 달러가 찍힌 계약서 한 장으로 끝나지 않는다. 정비·부품·업그레이드·교육까지 이어지지 않으면 다음 나라로 못 간다. 경쟁사는 미국·유럽 같은 전통 강자만이 아니다. 터키, 이스라엘처럼 탄탄한 틈새역량을 가진 나라들도 매섭다. 때로는 외교가, 때로는 국제 규범이 산업의 속도를 바꿔놓는다.


‘무기’라는 특수성을 무시한 채 사업을 벌이면, 기술이 아니라 규제가 실패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최근 몇 년, 한국산 전차·자주포·미사일·훈련기가 잇달아 해외 들판과 활주로를 밟은 건 우연이 아니다. 수십 년간의 축적, 공급망 정비, 가격·성능·납기의 균형, 그리고 고객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수량을 맞추겠다는 운영 역량이 만들어낸 결과다.


이런 상황에서 4개의 한국 방산업체를 공부하는 것은 곧 한국 방산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다. 네 회사의 과거를 훑는 일은 단지 연표를 베끼는 작업이 아니다. 각 회사가 어떤 실패를 통해 기준을 만들었는지, 어떤 계약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어떤 공장과 시험장에서 어떤 방식으로 ‘현장감’을 축적했는지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그 속에 앞으로의 방향이 숨어 있다. 자율·무인, AI 기반 표적식별과 전장 네트워크, 극초음속·전자전·우주 영역으로 확장되는 전력의 좌표 위에서, 한국의 네 회사는 서로 다른 속도로 같은 길을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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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 | 화약에서 방산의 얼굴로


1952년, 전쟁의 연기가 채 가시지 않은 서울 외곽에 작은 공장이 세워졌다. 군복을 벗은 이들이 길바닥에서 담배 연기를 내뿜던 시절, 이 공장 굴뚝에서는 매캐한 화약 냄새가 퍼져 나왔다. 이름은 한국화약주식회사. 포연에 절여진 한반도에서 “다시는 총알 없는 총을 들지 않겠다”는 결심이 기업의 탄생을 이끌었다.


처음엔 화약을 만드는 곳이었다. 광산에서 암석을 깨고 도로를 뚫는 데 필요한 물자였다. 그러나 화약을 정밀하게 다루는 기술은 곧 탄약과 직결됐다. 불길이 번쩍이는 찰나의 순간을 제어하는 능력이야말로, 전장에서 ‘믿고 쏠 수 있는’ 무기를 만드는 토대가 되었다. 그 기술은 점차 군의 신뢰를 얻었고, 이 공장은 군수산업의 이름을 달기 시작했다.


세월이 흘러 1990년대 말, 한국군은 새로운 무기를 손에 쥐게 된다. 바로 K9 자주포였다. 방대한 궤도를 딛고 움직이는 검은색 포신이 포연을 내뿜는 순간, 한국군의 화력은 한 단계 높아졌다. 하지만 이 무기가 진짜 빛을 발한 건 해외였다. 폴란드의 훈련장에서, 노르웨이의 설원에서, 인도의 사막에서 K9은 각국 군인들의 곁을 지켰다. 제때 납품되고, 고장이 나면 즉각 지원이 따라붙는 시스템 덕에 “한국산 포는 믿을 만하다”는 평판이 퍼졌다. 어느새 ‘K9 유저 클럽’이라 불리는 모임이 생겨, 각국 장교들이 같은 무기를 쓰는 동료로 경험을 나누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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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병의 상징이 K9이라면, 하늘을 가르는 무기는 천무였다. 한반도의 산등성이에서 수십 발의 로켓이 동시에 솟구치는 광경은 보는 이들에게 묘한 전율을 안겼다. 국산 기술로 만든 다연장 로켓, 천무는 이제 유럽과 중동의 군 관계자들이 눈독을 들이는 무기다. 미국제 무기에만 의존하기 어려운 국제 정세가, 한국 기업의 기회를 열어준 셈이다.


한화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창원 공장의 전차 라인, 대전의 미사일 연구소, 사천의 항공기 시험 활주로, 울산의 잠수함 조립소… 전국 곳곳에 뿌려진 현장이 하나의 거대한 지도를 이뤘다. 이제 한화는 포와 탄약을 넘어 공중, 해양, 우주까지 손을 뻗는 종합 방산기업이라 불린다.


물론 과제도 있다. 네 영역을 동시에 아우르려는 확장은 자칫 집중력을 잃게 만들 수 있다. 독일 라인메탈이나 미국 레이시온에 비하면, 한화라는 이름의 무게는 여전히 가볍다. 무기 수출이 늘어날수록 “한국산 무기가 분쟁지에 쓰인다”는 시선과도 마주해야 한다. 포성이 울린 전장만이 아니라, 국제 사회의 윤리적 잣대에서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숙제가 붙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화의 발걸음은 더 멀리 향하고 있다. 극초음속 무기와 인공지능 기반 화력 체계, 정찰 위성과 우주 항법 기술에까지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화약 한 포대를 만들던 작은 공장에서 출발해, 이제는 세계 무대와 우주까지 내다보는 기업으로. 한화의 여정은 한국 산업사의 굴곡과 집념을 고스란히 비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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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G넥스원 | 하늘을 지키는 눈과 손


1970년대 초, 박정희 정권이 ‘자주국방’을 외치던 시절, 한국은 첨단 무기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총과 포는 국산화의 길을 걸었지만, 레이더와 미사일 같은 정밀 무기는 그림의 떡이었다. 그때 정부는 “우리도 유도탄을 만들어야 한다”는 결심을 했다. 그렇게 1976년 금성정밀이라는 이름의 작은 연구소가 문을 열었고, 이곳이 훗날 LIG넥스원의 뿌리가 된다.


처음 개발한 무기는 ‘현무’ 탄도미사일과 ‘천마’ 지대공 미사일 같은 기초형 유도탄이었다. 엔지니어들은 불이 꺼진 연구실에서 밤을 지새우며 낡은 교본과 해외 문헌을 뒤졌다. 어떤 이는 “반도체가 한국 산업의 심장이 되었다면, 유도무기는 한국 방산의 신경계가 되었다”고 회상한다. 목표를 정확히 찾아가 타격하는 능력, 보이지 않는 적을 포착하는 능력은 그때부터 이 회사의 DNA가 되었다.


세월이 흘러 LIG넥스원의 대표 무기로 자리잡은 것은 ‘천궁’ 시리즈였다. 하늘을 수놓듯 솟아오르는 미사일은 이름 그대로 ‘하늘의 궁수’를 닮았다. 천궁은 중거리 지대공 미사일로, 한국판 패트리엇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최근 업그레이드된 ‘천궁-II’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에 수출되며 한국 미사일 기술의 위상을 보여주었다. 사막의 군 기지에서 발사 시험이 성공하자, 현지 장교들이 환호성을 터뜨렸다는 일화는 방산 업계에 회자됐다.


260WFJ2YJV_5.jpg 천궁


LIG넥스원이 강점을 가진 분야는 단지 미사일만이 아니다. 정밀 센서와 전자전 장비, 즉 하늘을 읽고 귀신같이 듣는 기술이다. 전투기 코끝에 달린 레이더, 해군 함정 위에 돌아가는 위상배열 안테나, 적의 전파를 교란하는 전자전 장치까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전장을 지배하는 이 기술들은, 한국군이 ‘보이지 않는 전쟁’에 대응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회사의 본거지는 경기 분당과 안산, 대전 연구단지에 흩어져 있다. 분당의 연구동 복도에서는 흰 가운을 입은 연구원들이 회로 기판을 들고 분주히 오간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건물 외벽에는 ‘Precision, Reliability’라는 문구가 붙어 있다. 정밀성과 신뢰성, LIG넥스원이 스스로에게 붙인 약속이다.


하지만 이 회사도 고민이 있다. ‘미사일 명가’라는 명성은 자랑이지만, 동시에 좁은 틀로 갇힐 위험도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하려면 단순히 ‘한국형 무기’가 아니라, 국제 규격을 충족하고 장기간 신뢰할 수 있는 브랜드로 자리잡아야 한다. 유럽의 MBDA나 미국의 레이시온 같은 경쟁자들과 비교하면, LIG넥스원의 이름은 아직 낯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회사가 가진 무기는 기술자들의 땀과 끈기다. 수출 계약 뒤에는 현지 군인들을 상대로 직접 교육하고, 실전 운용 데이터를 모아 개량하는 ‘묵묵한 지원팀’이 따라붙는다. 무기를 넘기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운용자와 함께 성장하는 방식이다. 이는 한국 방산업이 ‘제조업’에서 ‘서비스 산업’으로 변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앞으로 LIG넥스원이 내다보는 길은 분명하다. 인공지능 기반 탐지 시스템, 극초음속 요격 미사일, 그리고 우주기반 정찰 기술.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전장을 장악하는 기술을 더 정교하게, 더 빠르게 다듬어야 한다. 금성정밀의 작은 연구실에서 시작된 이 회사가 이제는 중동 사막과 동유럽 하늘까지 시선을 확장하고 있다. 하늘을 지키는 눈과 손이 된 LIG넥스원의 이야기는, 한국 방산이 ‘수입 의존’에서 ‘수출 강자’로 변해온 길과 겹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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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로템 | 궤도를 달리는 강철의 심장


한국군의 전차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한 장의 사진이 떠오른다. 1980년대 초, 미군의 M48 전차를 개량하던 젊은 기술자들이 용산 기지의 야전 시험장에서 땀을 훔치던 장면이다. 그때만 해도 한국군은 ‘빌려 쓰는 탱크’에 의존하고 있었고, 국산 전차라는 발상은 요원한 꿈에 가까웠다. 하지만 정부는 자주국방을 선언하며, “우리 손으로 만든 전차를 굴려보자”는 목표를 세웠다. 이 프로젝트에 뛰어든 기업이 훗날 현대로템이 된다.


첫 결실은 K1 전차였다. 1980년대 후반 미 국방업체 제너럴 다이내믹스의 도움을 받으며 만들어낸 이 전차는 ‘한국형 에이브럼스’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 시절 창원 공장에서는 철판을 절단하는 굉음과 용접 불꽃이 밤낮을 가르지 않았다. “우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만든 게 아니라도, 이제 우리 군이 우리 전차를 굴린다”는 자부심은 기술자들의 눈빛을 빛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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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흘러 등장한 K2 흑표 전차는 한층 진화한 모습이었다. 자동변속기와 수소연료 전지 보조전원, 능동방호체계 같은 첨단 장비가 탑재되며, 단순한 모방을 넘어 독자적인 전차로 자리 잡았다. 시험주행 당시 궤도가 진흙을 박차고 나아가자, “이제는 우리가 만드는 시대가 왔다”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해외에서도 관심을 보였다. 특히 폴란드와의 대규모 수출 계약은 한국 전차가 유럽 전장에서 활약할 수 있다는 기대를 키웠다.


현대로템의 무대는 전차만이 아니다. K808 장갑차, K600 장애물개척전차, 철도 기반 군수지원차량까지, 궤도와 바퀴가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 기술을 쏟아부었다. 흥미로운 건 이 회사가 민수 부문에서는 고속철도와 도시철도를 만들면서, 군수 부문에선 전차와 장갑차를 만드는 이중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창원과 의왕의 공장에서는 낮에는 전차 궤도가 굉음을 내고, 옆동에선 철도 차량이 매끈하게 완성된다. 강철의 심장이 전쟁터와 일상 양쪽을 동시에 뛰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현대로템이 안고 있는 짐도 크다. K2 전차 수출 과정에서 불거진 엔진·변속기 문제는 큰 교훈을 남겼다. 해외 언론은 “좋은 전차지만 파워팩이 약하다”는 지적을 내놨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국산 엔진 개발에 매달려야 했다. 또 다른 문제는 수익성이다. 철도와 방산을 동시에 끌고 가는 구조가 장점이기도 하지만, 방산 부문이 불황을 겪을 때는 철도가 버팀목이 되고, 반대의 경우에는 서로 부담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로템의 존재감은 여전히 굳건하다. 전차는 단순히 강철 덩어리가 아니라, 한 나라의 상징적 전력이기 때문이다. “탱크를 만드는 나라”라는 사실은 곧 기술력과 산업 기반을 보여주는 증표가 된다. 전차의 궤도가 진흙을 가르는 소리는 한국이 이제는 스스로 지킬 힘을 가진 나라가 되었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앞으로 현대로템은 단순한 전차 제조사를 넘어 미래 전장 플랫폼을 꿈꾸고 있다. 무인 전차, 하이브리드 장갑차, 자율주행 군수 차량 등 인간이 직접 타지 않아도 움직이는 시스템이 그들의 다음 목표다. 창원의 용접 불꽃이 여전히 타오르는 공장 한쪽에서는, 연구원들이 VR 시뮬레이터 안에서 ‘사람이 없는 전차’를 시험하고 있다. 강철의 심장이 이제는 인간의 손을 벗어나 스스로 뛰려는 순간을 준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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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 | 하늘을 넘어 우주로


하늘을 나는 기계는 언제나 한국군의 오랜 갈망이었다. 1950년대 전쟁 직후, 한국은 미군이 남겨둔 노후 항공기에 의존했다. 조종사들은 하늘을 날았지만, 그 기체를 만든 이는 외국에 있었다. “언젠가는 우리 손으로 만든 비행기를 띄우자”는 꿈은 몇십 년간 숙원처럼 이어졌다. 그 결실이 모여 1999년,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이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기업이 출범한다.


출범의 계기는 군수용 항공기 국산화였다. 당시 대우, 삼성, 현대가 따로 하던 항공 사업을 정부가 하나로 묶어 KAI를 만들었다. “산업이 흩어지면 결코 날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경남 사천의 활주로 옆에 둥지를 튼 KAI는 곧 한국 하늘을 바꿔놓기 시작했다.


대표작은 단연 T-50 골든이글 훈련기다. 미국 록히드마틴과 손잡고 개발한 이 초음속 훈련기는 2000년대 초 첫 비행에 성공했다. 활주로를 박차고 솟구친 순간, 한국은 세계에서 몇 안 되는 초음속 항공기 생산국 반열에 올랐다. 이후 T-50 계열은 전투용 FA-50으로 발전했고, 필리핀·인도네시아·폴란드 등 해외 하늘을 날며 KAI의 간판이 되었다. 폴란드에서 열린 FA-50 도입식에서는 “폴란드 하늘을 함께 지킨다”는 문구가 걸렸고, 그 장면은 한국 방산 수출사에 상징적인 순간으로 남았다.


cf79fac4-e8e4-415d-bff6-352142facf45.jpg T-50 골든이글 훈련기


KAI의 또 다른 성취는 수리온 헬기다. 한국형 기동헬기로 개발된 이 기체는 경찰, 소방, 해경까지 운용 범위를 넓혔다. 산불 현장에선 붉은 불길 위로 물을 뿌리고, 해상 구조 현장에선 거센 바람을 가르며 사람들을 끌어올렸다. 비판도 있었다. 초창기에는 결빙 결함 등 안전 문제가 불거져 곤욕을 치렀다. 하지만 끊임없는 개량과 추가 시험 끝에 수리온은 이제 한국군의 주력 헬기로 자리 잡았다.


오늘날 KAI는 우주로도 시선을 돌리고 있다. 누리호 위성 탑재체 제작, 군 정찰위성 개발, 한국형 소형위성 플랫폼 등은 단순한 항공 기업에서 ‘항공우주 기업’으로의 도약을 보여준다. 사천 본사 한쪽 건물에는 위성 조립 라인이 들어섰고, 흰 방진복을 입은 연구원들이 작은 위성 모듈을 들고 분주히 오간다. 창문 너머로 활주로에 전투기가 이륙하는 모습과, 실내에서 조용히 위성을 조립하는 장면이 동시에 펼쳐지는 풍경은 이 회사가 가진 ‘두 개의 하늘’을 상징한다.


물론 도전은 여전하다. 보잉, 에어버스, 록히드마틴 같은 글로벌 항공우주 기업에 비하면, KAI의 브랜드는 아직 작다. 기술과 안전성 논란이 완전히 해소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회사의 강점은 정부와 군의 꾸준한 지원, 그리고 축적된 실전 운용 경험이다. 수출 시장에서 “한국산 기체는 믿을 만하다”는 평판을 쌓아가는 과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앞으로 KAI가 내다보는 길은 더욱 크다. 무인 전투기, 차세대 전투기 KF-21 보라매, 그리고 군 정찰 위성. 한국이 더 이상 단순히 지상에서만 방어하는 나라가 아니라, 하늘과 우주까지 감시하고 지배하는 나라로 가려는 발걸음의 중심에 KAI가 서 있다.




경쟁, 또 협력 - 방산 빅4의 무대


한국 방산 산업을 이야기할 때 한화, LIG넥스원, 현대로템, KAI를 따로 떼어 설명하면 뭔가 빠진 느낌이 든다. 네 회사는 마치 같은 연극 무대 위에서 서로 다른 배역을 맡은 배우들 같다. 어떤 장면에서는 협력해 호흡을 맞추고, 어떤 순간에는 관객의 시선을 차지하려 치열하게 경쟁한다.


대표적인 예가 현대로템의 K2 전차와 한화의 K9 자주포다. 두 무기는 겉보기에 전혀 다르지만, 해외 수출전에서는 종종 같은 테이블에 놓인다. 폴란드 사례가 그렇다. 폴란드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대규모 무기 도입을 추진하면서 K2와 K9을 동시에 선택했다. 전차와 자주포가 ‘세트 메뉴’처럼 팔린 것이다. 현지 언론에서는 “한국 방산 기업들이 동반 진출했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하지만 이면에는 묘한 경쟁도 있었다. K2의 가격과 납기 문제를 두고 협상이 지지부진하면, 상대적으로 가격 경쟁력이 높은 K9이 더 주목을 받는 식이다. 한 몸처럼 묶여 나가지만, 계약서를 열어보면 수익 배분과 책임 소재를 두고 팽팽한 신경전이 벌어지는 셈이다.


KAI와 LIG넥스원의 관계도 흥미롭다. KAI가 하늘을 나는 기체를 만들면, 그 기체의 눈과 귀는 대개 LIG넥스원이 담당한다. KF-21 보라매 전투기의 레이더와 센서, 전자전 장비 대부분은 LIG넥스원이 납품한다. 사천 활주로에서 KAI가 시험비행을 하면, 분당 연구소에서 LIG넥스원 엔지니어들이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데이터를 체크하는 장면이 동시에 벌어진다. 겉으로는 두 회사가 각자 성과를 자랑하지만, 사실상 한쪽이 빠지면 다른 쪽도 날개를 펼 수 없는 구조다.


한화와 현대로템은 지상무기에서 자주 협업·경쟁을 하지만, 최근엔 해양 무기에서도 부딪힌다. 특히 잠수함 분야에서 그렇다. 원래 현대중공업 계열에서 맡던 사업 일부를 한화가 인수하면서, 현대로템과의 ‘밥그릇 경계선’이 흔들렸다. “궤도는 로템, 화력은 한화”라는 기존 구도가 바다에서는 모호해진 것이다. 국방부가 신규 사업을 발주할 때마다 어느 쪽 손을 들어주느냐에 따라 업계 판도가 달라진다. 회식 자리에서는 웃으며 건배를 하지만, 막상 입찰 공고가 뜨면 “저쪽이 또 들어왔다”는 말이 흘러나오는 식이다.


이런 경쟁 구도에도 불구하고 해외 무대에 나가면 네 회사는 한 팀으로 뭉친다. 국방부와 방사청이 꾸리는 K-방산 수출단 행사에 가보면, 같은 부스 안에 한화의 자주포 모형, KAI의 FA-50 모형, LIG넥스원의 미사일, 현대로템의 전차가 나란히 전시된다. 해외 장교들이 찾아와 “이 무기들은 어떻게 연결되느냐”고 묻는 순간, 각사 직원들은 일제히 같은 설명을 꺼낸다. “전차와 장갑차로 지상을 지키고, 자주포가 화력을 지원하며, 하늘에선 전투기와 미사일이 적을 막는다.” 이렇게 네 회사는 하나의 ‘통합 패키지’를 파는 셈이다. 서로 경쟁하며 기술을 다듬은 덕에, 묶어놓으면 더 설득력 있는 그림이 되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얽힘이야말로 한국 방산의 경쟁력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한화가 포를 잘 만들면, 로템은 더 강력한 전차를 설계하려 애쓴다. KAI가 기체를 수출하면, LIG넥스원은 더 정밀한 센서를 내놓는다. 치열한 경쟁이 곧 서로를 끌어올리는 ‘선의의 긴장감’이 조성된 것이다. 이런 역학은 해외에서도 주목받는다. 한 무기체계만으로는 외국 군의 신뢰를 얻기 어렵다. 그러나 네 회사가 서로의 빈틈을 메우며 움직이니, 한국은 짧은 시간에 방산 수출 10대 국가로 올라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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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직후 화약 냄새 가득한 공장에서 출발한 한화, 작은 연구소에서 미사일을 시험하던 LIG넥스원, 빌려 쓰던 전차를 국산화하겠다며 용접 불꽃을 일으킨 현대로템, 그리고 언젠가 우리 손으로 만든 비행기를 띄우자던 꿈을 현실로 만든 KAI. 네 회사의 길은 시작부터 달랐지만, 오늘날 한국 방산 산업의 얼굴을 함께 빚어내고 있다.


이들은 서로를 밀어내듯 경쟁하면서도, 빈틈을 채우듯 보완한다. 전차가 앞으로 나가면 자주포가 뒤를 받치고, 하늘을 나는 전투기에는 정밀한 눈과 귀가 달린다. 그렇게 얽히고설켜 나온 무기체계들이 지금은 해외 전시회장에서 ‘K-Defense’라는 이름 하나로 묶여 세계 군 관계자들 앞에 선다.


물론 과제는 여전히 많다. 국제적 신뢰를 확보해야 하고, 무기 수출이 안고 있는 윤리적 논란에도 답해야 한다. 그러나 네 회사가 만들어온 궤적은 분명하다. 짧은 시간 안에 한국이 수입국에서 수출국으로, 의존에서 자립으로 바뀌는 과정 그 자체였다.


앞으로의 길은 더욱 험난할 것이다. 인공지능, 극초음속, 우주 방위 같은 미래 기술의 문턱은 높고, 세계 시장의 문은 그보다 더 좁다. 하지만 한국 방산 빅4가 지난 세월 보여준 집념과 경쟁, 협업의 드라마는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결국 이들의 이야기는 기업사의 차원을 넘어, 한국이 어떻게 스스로를 지키는 나라가 되었는지 보여주는 산업사(史)이자,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도전의 기록이다. 네 갈래 길이 모여 하나의 힘을 만들어온 것처럼, 한국 방산의 내일도 그 힘 위에서 다시 쓰여질 것이다.


<참고문헌>


-방위사업청, 『국방과학기술조사서』(매년 발간).

-국방부, 『국방백서』 2022, 2020, 2018 등.

-통계청, 「국내 방산수출입 통계」.

-국회예산정책처, 「방위산업 관련 예산 분석 보고서」.

-연합뉴스, 「폴란드와 K2·K9 대규모 방산 계약 체결」 (2022.08).

-조선일보, 「FA-50, 폴란드 하늘을 날다」 (2023.09).

-한국경제, 「한화 K9 자주포 세계 9개국 수출」 (2023.12).

-매일경제, 「KAI, KF-21 보라매 첫 비행 성공」 (2022.07).

-한국국방연구원(KIDA), 『한국 방위산업 발전전략 연구』.

-최윤희, 한국 방산기업의 해외수출 사례와 과제」, 『군사학논집』, 2021.

-이재명, 「K-방산 수출과 국제정치 환경」, 『국제정치논총』,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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