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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방산, 부족함에서 시작된 신화

by har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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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방산의 출발점은 부족함이었다. 남북 전쟁 직후 군 창고에 남은 것은 무기라기보다 고철에 가까운 장비들이었다. 병사들이 손에 쥔 총은 각양각색이었다. 어떤 중대는 2차 대전 시절 미군이 쓰던 M1 개런드를 들고 있었고, 다른 중대는 칼빈 소총을, 또 다른 곳은 바주카포를 쓰고 있었다. 해병대 일부는 심지어 한국전쟁 때 쓰다 남은 M1 기관총을 들었다.


1960년대 들어 미군이 쓰다 남긴 M16이 조금씩 들어왔지만, 보급은 균일하지 않았다. 한 부대 내에서도 소대마다 총기가 달라, 사격 훈련에 들어가면 한쪽은 장탄이 되는데 다른 쪽은 “탄이 맞지 않는다”며 훈련을 취소하는 일이 벌어졌다.


정비는 더 큰 문제였다. 탄약 규격이 들쭉날쭉해 보급 장교들은 늘 골치를 앓았다. 고장 난 무기를 고칠 부품은 구할 수 없었고, 정비병들은 총을 분해했다가 맞는 부품을 찾지 못해 그대로 창고에 쌓아두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한 퇴역 장교의 회고록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우리는 총은 있었지만, 총알은 없었다. 포는 있었지만, 포탄은 없었다. 전쟁을 한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이 결핍의 민낯은 1968년에 폭로됐다. 1월 푸에블로호 납북 사건, 11월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이 연달아 터졌다. 사회는 충격에 빠졌다. 무장공비가 내려와 마을을 습격했는데, 한국군은 총탄조차 국산화하지 못하고 있었다. 청와대 회의실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지휘관들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총알부터 우리 손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 말은 한 나라가 외부 의존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절박한 선언이었다.


그래서 생긴 게 조병창이다. 조병창은 본래 일제강점기 일본군 병기창을 인수한 것이 뿌리였다. 한국전쟁 중에는 터져 나간 총열을 억지로 이어 붙이고, 부서진 포신을 깎아내며 겨우 무기를 ‘죽지 않게’ 유지하는 곳이었다. 부산, 진해, 대전 등지에 흩어져 있던 조병창은 휴전 후에도 ‘수리’에만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 그 임무가 달라졌다. “고쳐 쓰는 곳”에서 “찍어내는 곳”으로 변해야 했다.


2021091419020791222_l.jpg 1979년 국방부 연두순시를 끝낸 박정희 대통령이 전시된 국산 M16소총을 둘러보고 있다.


부산 조병창에는 M16 소총 면허 생산 라인이 설치됐다. 미국이 기술을 제공했지만, 라인을 돌릴 인력이 없었다. 이에 따라 1971년 국내 주요 언론을 통해 ‘M16 소총 제조공장 도미 훈련 기사 모집’을 공고했다. 당시 엄격한 자격요건(공대 기계과 졸업, 군필자, 기계 관련 분야 경력 5년, 미국인 기술자와 30분 이상 영어로 대화 가능한 자 등)에도 불구하고 전국에서 1800여명의 공학도들이 참여해 치열한 경쟁을 거쳐 27명의 ‘도미기사’들이 선정됐다. 이들은 미국의 총기 제작 회사인 콜트(Colt)社에서 기술연수를 받고 조병창에서 M16 소총 생산을 비롯해 국산 K시리즈 화기들을 개발하는데 많은 공을 세웠다.


귀국한 조미기사들은 낡은 선반과 프레스 기계 앞에서 밤을 지새우며 총열을 깎았다. 공장은 위험천만했다. 화약을 다루다 폭발 사고가 터지는 경우가 잦았고, 공장 천장은 늘 화약 냄새로 가득했다. 연구원들은 방탄모를 쓰고 드릴을 잡았다. 한 연구원은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도면대로 깎아낸 총열이 터져 나가 연구실 벽에 구멍이 뚫렸다. 그래도 다음 날 같은 도면을 들고 또 선반 앞에 앉았다. 실패가 일상이었고, 반복이 유일한 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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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기, 대전 유성의 허허벌판에는 국방과학연구소(ADD)가 세워졌다. ADD는 설계와 시험을 맡았다. 조병창이 몸이라면 ADD는 두뇌였다. ADD의 초창기 연구원들은 폭발음과 오발을 일상처럼 겪었다. 시험장에서 기관총이 터져도, 옆 연구원은 메모를 멈추지 않았다. 언론은 ADD를 “방탄모 쓰고 연구하는 과학자들의 집합소”라 불렀다. 연구소 마당에는 날마다 포탄 파편이 떨어져 있었고, 직원들의 작업복은 늘 화약 냄새로 젖어 있었다.


이 두 축—조병창과 ADD—가 한국 방산의 기초였다. 부족함이 자립을 불렀고, 자립은 실패를 낳았으며, 그 실패는 데이터로 남아 또 다른 무기를 낳았다.


1980년대에 이르러 드디어 K총기가 등장했다. K1과 K2 소총은 단순한 무기가 아니었다. 병사들은 처음으로 “미제는 아니지만 우리 총”을 손에 쥐었다. K1은 짧아 특전사 차량에 싣기 편했고, K2는 야전에서 정비가 쉬웠다. 과거에는 부품이 없어 며칠을 기다려야 했지만, 이제는 국내 생산 라인에서 바로 공급할 수 있었다. 군 내부 보고서에는 “부품 자립률 60% 이상”이라는 문장이 자랑처럼 쓰였다.


총기에서 시작된 자립은 전차로 이어졌다. 한국군은 당시 M48 전차를 운용하고 있었다. 1950년대 설계라 성능은 이미 낡았고, 북한은 T-62를 도입해 전력 격차가 벌어지고 있었다. 미국은 최신형 M60이나 M1을 줄 생각이 없었다. 결국 한국은 자력으로 전차 개발에 나섰다. 1970년대 율곡사업 예산이 투입되면서 ADD와 현대정공이 K1 전차 개발에 착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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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 과정은 난관 투성이였다. 궤도가 끊어져 눈밭에서 밤새 궤도를 다시 연결하는 엔지니어들의 모습은 유명하다. 엔진 열처리는 실패를 거듭했고, 차체는 움직이지 않는 날이 많았다. 미국 자문단과의 회의는 팽팽했다. “이 사양으로는 한반도 지형을 버틸 수 없다”는 한국 측 주장과 “비효율적이다”라며 고개를 젓는 미국 측 반론이 부딪혔다. 그러나 결국 한반도 지형을 고려한 K1 전차가 완성돼 1980년대 초 배치되었다. 병사들은 처음으로 스스로 만든 전차에 탑승했다. 부족함이 자립으로 변모한 순간이었다.


포병의 길은 더 극적이었다. 한반도는 산악이 많아 기갑 돌파보다 포격 지원이 중요했다. 북한은 이미 수천 문의 방사포를 전방에 배치해 남한 전역을 위협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군의 M109 자주포는 사거리와 속도에서 크게 뒤처졌고, 고장도 잦았다. 포병 장교들은 “포가 서면 부대가 선다”고 외쳤지만, 현실은 “포가 서면 부대가 멈춘다”에 가까웠다.


1989년, 삼성항공(훗날 한화)과 ADD는 K9 자주포 개발에 착수했다. 목표는 명확했다. 사거리를 늘리고, 고속 사격이 가능하며, 신속한 재보급이 가능한 자주포. 연구진은 혹한의 시험장에서 밤새 포를 쏘며 성능을 검증했다. 눈보라 속에서 엔진에 담요를 덮어두고 다음 날 시동을 걸자 그대로 작동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훗날 노르웨이 시험장에서 이 경험담은 그대로 재현됐다. 경쟁 자주포가 멈춰섰을 때, K9은 멀쩡히 굴러갔다. 시험관은 “정말 한국산 맞느냐”고 되물었다. 1999년 K9이 군에 배치되자 한국은 아시아 최강의 포병 전력을 갖게 되었고, 세계 시장에서는 “가동률 최고”라는 별명을 얻었다.


하늘에서는 KT-1 훈련기 개발이 시작됐고, 1991년 초도 비행에 성공했다. 그러나 문제는 팔 곳이었다. 항공기 개발 경험이 없던 나라의 훈련기를 누가 사겠는가. KAI는 단순히 기체만 팔지 않았다. 조종사 훈련 교재, 시뮬레이터, 정비 교육까지 한 세트로 묶어 내놨다. 2003년 인도네시아가 이 패키지를 도입하며 한국 항공기 첫 수출이 성사됐다. 언론은 “우리 비행기를 다른 나라 공군이 탄다”고 대서특필했지만, 업계 사람들은 알았다. 이제 한국이 진짜 항공기 수출국이 되었다는 것을.


KT-1의 성공은 T-50 고등훈련기와 FA-50 경전투기로 이어졌다. 필리핀, 이라크, 인도네시아가 FA-50을 도입했다. 결정적 순간은 2017년 필리핀 마라위 시가전이었다. 필리핀 공군은 FA-50으로 정밀 폭격을 감행했고, 언론은 “10년 만에 초음속 전투기를 되찾았다”고 보도했다. 한 조종사의 말은 단순했지만 강렬했다. “작고 빠르고, 우리가 유지할 수 있었다.” 이 문장은 한국산 전투기의 명함이 되었다.


해군은 중고 군함 외교로 첫발을 떼었다. 퇴역한 포항급 초계함을 필리핀에 넘기자, BRP 콘라도 야프라는 새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필리핀 해군은 “정비가 쉽고 운용이 단순하다”며 환영했다. 취역식은 한국 해군 퇴역식과 불과 몇 달 차이였다. 같은 배가 다른 나라에서 다시 국기를 달고 바다로 나가는 장면은 상징적이었다. 이 경험은 신뢰로 이어졌다. 필리핀은 현대중공업에 신형 프리깃, 호세 리살급을 발주했다. 언론은 이를 “필리핀 해군이 50년 만에 얻은 첫 현대식 프리깃”이라 보도했다. 베트남과 콜롬비아도 같은 길을 밟았다. “중고 → 신조 → 현지 운용체계”라는 수출 사다리가 완성된 것이다.


방공 분야는 천궁-II가 돌파구였다. ADD와 LIG넥스원이 개발한 이 중거리 미사일은 2022년 UAE, 2024년 사우디에 각각 수십억 달러 규모로 수출됐다. 미국과 유럽이 독점하던 중동 미사일 방어 시장에 한국이 이름을 올린 순간이었다. 사우디 언론은 “한국은 신뢰할 수 있는 대안”이라고 보도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가격, 납기, 조건. 한국은 몇 년 뒤가 아니라 몇 달 뒤 장비를 인도했고, 현지화 조건까지 맞춰 주었다.


그리고 2022년, 폴란드가 등장했다. 러시아의 침공으로 전력이 급했던 폴란드는 한국과 초대형 계약을 맺었다. K2 전차, K9 자주포, FA-50 전투기, 천무 다연장로켓. 계약 몇 달 만에 첫 K2와 K9이 폴란드 항구에 도착했다. 세계 언론이 놀란 것은 스펙이 아니라 속도였다. “계약서 쓰자마자 장비가 온다”는 장면은 기사 제목이 되었다. 폴란드판 천무는 현지에서 조립돼 ‘호마르-K’라는 이름을 달았다. 한국은 무기를 판 것이 아니라 시간을 판 것이었다. 폴란드 언론은 이렇게 썼다. “한국은 무기를 판 게 아니라 시간을 팔았다.”


모든 흐름은 결국 같은 구조였다. 부족한 현실에서 출발해 자립을 시도하고, 시행착오 끝에 성과를 내고, 그 성과가 신뢰를 낳아 해외 시장으로 확장됐다. 결핍이 자립을 낳고, 자립이 신뢰를 만들며, 신뢰가 세계 시장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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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함에서 시작된 자립, 시행착오 끝에 얻은 성과, 첫 수출을 거쳐 쌓아 올린 신뢰. 한국 방산의 서사는 늘 같은 구조로 이어졌다. 결핍, 자립, 성과, 신뢰, 확장. 총기와 전차, 자주포, 항공기, 해군 함정, 미사일을 거쳐 하나의 거대한 산업 신화로 이어졌다.


앞으로도 도전은 남아 있다. 일부 핵심 부품은 여전히 외산에 의존하고 있고, 수출과 국내 전력화를 동시에 맞추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지난 반세기의 경험은 분명히 말해 준다. 부족함이 자립을 낳고, 자립이 신뢰를 만들며, 신뢰는 결국 세계 시장에서 한국 방산의 이름을 키운다는 것을. 한국이 만들어낸 무기는 단순한 철과 화약이 아니다. 그것은 운영이 끊기지 않는 시간이다. 그 시간을 팔 수 있었기에, 부족함에서 출발한 한국 방산은 신화라는 이름을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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