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산이라는 단어를 제대로 붙잡아본 건 몇 해 전이었다. 기자로서 여러 분야를 취재해왔지만, 방산만큼은 나와는 거리가 먼 세계라고 생각했다. 늘 뉴스 속에 등장하는 장면은 전투기와 미사일, 국방부의 훈련 장면이었다. “그건 군사 전문가들의 영역이지, 내가 깊게 들여다볼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자료를 뒤적이다가 눈에 걸린 문장이 있었다. “GPS는 원래 군사용으로 개발됐다.” 그 순간, 우리가 매일 쓰는 지도 앱의 뿌리가 사실 군사 연구였다는 사실에 멈칫했다. 내가 무심코 쓰던 기술이 방산의 자식이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 뒤로 방산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단순히 무기를 만들고 파는 게 아니라, 기술과 외교, 경제가 교차하는 산업이라는 사실이 서서히 드러났다.
방산의 역사를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도 그런 장면은 차고 넘친다. 미국 국방부의 실험실에서 태어난 ARPANET은 훗날 인터넷이 되었고, 군사용으로 시작된 GPS는 지구촌의 시계를 맞추는 기본 인프라가 됐다. 전투기 개발 과정에서 나온 신소재는 민간 항공기에 응용됐고, 전장에서 쓰던 드론은 어디서나 날아다니고 있다.
기술은 군에서 민간으로, 민간에서 다시 군으로 흘러가며 끝없는 순환을 만든다. 반도체 역시 그렇다. 원래는 게임을 더 실감 나게 즐기기 위한 그래픽 칩셋이었지만, 지금은 인공지능과 군사 시뮬레이션의 심장이 됐다. 기술과 군사, 민간의 경계는 생각보다 낮고, 그래서 더 치열하다.
기술이 국제 정치와 만날 때 방산의 진짜 얼굴이 드러난다. 미국에는 ITAR이라는 제도가 있다. 미국산 부품이 단 1g이라도 들어간 무기는 수출할 때 반드시 미국 정부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규정이다. 그래서 한국이 만든 무기라도, 부품 어딘가에 미국산이 들어가 있다면 수출길은 워싱턴의 손아귀에 달린다. 이 규정 하나 때문에 한국이 수출 계약 직전까지 가서도 뒷걸음질 친 사례들이 있다. 작은 부품 하나가 외교의 키가 되어버리는 순간이다.
아르헨티나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몇 년 전 한국산 FA-50 전투기를 사려던 아르헨티나는 결국 계약을 접어야 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전투기 안에 영국산 사출좌석 등 부품 몇 개가 들어가 있었는데, 포클랜드 전쟁의 상흔을 간직한 영국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한국이 만든 전투기였지만, 사실상 영국이 ‘거부권’을 행사한 셈이다. 기자들 사이에서는 “전투기는 한국 국적이지만, 부품은 다국적 시민권자”라는 농담이 돌았다.
방산이 외교의 언어로 작동하는 장면은 여러 차례 목격됐다. 터키가 러시아제 S-400 미사일을 도입했을 때 미국은 즉각 터키를 F-35 프로그램에서 퇴출시켰다. 단순한 무기 구매가 아니라, 동맹의 균열이었다. 터키는 미국의 견제를 받는 대신 드론 개발에 올인했고, 그 결과 탄생한 바이락타르 TB2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값싼 드론이 고가의 전차를 무력화시키는 장면은 전 세계 군사 관계자의 이목을 끌었다. 외교적 부담이 오히려 기술의 승리로 이어진 사례였다.
호주의 잠수함 계약 파기도 빼놓을 수 없다. 호주가 오랫동안 프랑스와 진행해온 디젤 잠수함 계약을 하루아침에 깨고, 미국·영국과 핵잠수함 동맹(AUKUS)을 맺은 사건이다. 프랑스는 분노했고, 주미·주호주 대사를 본국으로 불러들였다. 신문 1면에는 “동맹의 배신”이라는 제목이 떴다. 잠수함은 그저 철덩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신뢰와 배신, 동맹과 선택의 상징이었다. 계약서 한 장이 대사의 귀국길을 정하는 풍경은 방산의 세계에서 결코 낯설지 않다.
이스라엘과 중국 사이에서 벌어진 팔콘 조기경보기 사건은 방산의 불확실성, 외교적 영향을 여실히 드러낸다. 2000년대 초, 이스라엘은 중국에 팔콘을 수출하려 했지만 미국이 강력히 반대했다. 결국 계약은 파기됐고, 이스라엘은 중국에 거액의 위약금을 물어야 했다. 방산 계약서가 국제 정치의 메모지처럼 찢겨 나간 순간이었다.
경제적 측면에서도 방산은 거대한 힘을 발휘한다. 미국의 F-35 전투기 프로그램은 미국 전역에 25만 개 이상의 일자리를 만들어냈다. 그래서 이 전투기를 둘러싼 의회 표결은 언제나 안보 논리와 ‘내 지역 일자리’가 얽힌다.
한국도 다르지 않다. K9 자주포와 K2 전차, 천궁-II 미사일 같은 무기는 수출 계약 자체로 수조 원의 외화를 벌어들이지만, 더 중요한 건 협력업체와 중소기업, 연구기관을 함께 움직인다는 점이다. 방산은 단순히 군수기업만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지역 경제와 산업 생태계를 흔드는 거대한 톱니바퀴다.
폴란드 사례를 보자. 우크라이나 전쟁 직후 한국산 무기를 대량으로 도입하기로 발표한 자리에서, 폴란드 장관은 “이 전차는 폴란드와 한국의 미래 협력”이라고 말했다. 처음엔 과장된 정치적 수사처럼 들렸지만, 곧 그것이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초기 물량은 한국에서 납품됐지만, 이후 폴란드 남부에는 조립 공장이 세워졌다. 국경에는 전차가 배치됐고, 지역 주민들에게는 일자리가 생겼다. 전쟁의 공포와 산업의 희망이 한 장면에 겹쳐 있었다.
특히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방산 시장의 판도를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에서 드론이 전장의 주인공으로 떠올랐다면, 우크라이나에서는 포탄이 모든 것을 좌우하는 자원이 됐다. 한국이 미국에 155mm 포탄을 대량으로 빌려주면서 우회적으로 우크라이나를 지원했다는 분석이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무기는 이제 성능과 가격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얼마나 빨리, 얼마나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느냐가 곧 경쟁력이다.
한국 방산은 지금 그 교차점 위에 서 있다. 빠른 납기, 적절한 가격, 안정적 생산 능력. 이 세 가지는 전쟁 중 무기 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자산이다. 한국은 그 세 박자를 맞추며 수출을 늘려가고 있다. 중동에는 첨단 미사일을, 유럽에는 전차와 자주포를 보냈다. 하지만 여전히 숙제가 있다. KF-21 전투기의 엔진은 미국산이다. 부품 하나가 언제든 수출 길목에서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뜻이다. “핵심 부품의 주권”을 확보하지 못하면 한국 방산은 완전한 자율성을 가지기 어렵다.
돌아보면 방산을 단순히 ‘무기 산업’이라고 부르는 건, 이 복잡한 퍼즐의 일부만 보는 셈이다. 방산은 기술의 시험장이자 외교의 언어이고, 경제의 엔진이다. 전시장에서 반짝이는 건 철덩이가 아니라 그 뒤에 서 있는 신뢰와 동맹, 약속과 이해관계다. 그래서 방산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총의 구경보다 계약서의 각주를 먼저 읽어야 한다. 그 각주 속에 기술, 외교, 경제가 모두 숨어 있다.
기자로서 방산을 다시 보게 된 건 일종의 ‘각성’이었다. 처음엔 나와 무관한 세계 같았다. 하지만 들여다보니 방산은 세계를 움직이는 가장 복합적인 산업이었다. 총포와 미사일의 그림자만 본다면 무섭고 낯설겠지만, 그 안에 얽힌 기술의 진화, 동맹의 언어, 경제의 동력까지 함께 본다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진다. 방산은 단순히 무기를 파는 산업이 아니다. 그것은 국가와 국가가 서로를 시험하고, 협력하고, 견제하는 거대한 교차로다. 그리고 그 교차로 위에 한국도 서 있다.
<참고문헌>
에어로스페이스 코퍼레이션(The Aerospace Corporation), Brief History of GPS
테크타겟(TechTarget), What is ARPANET and what's its significance?
U.S. Department of State, International Traffic in Arms Regulations (ITAR)
DefenseNews, Turkey officially kicked out of F-35 program
TRT 리서치 센터(TRT Research Centre), 「터키의 S-400 도입과 그 의미」
U.S. Department of Defense, U.S. Begins Process of ‘Unwinding’ Turkey From F-35 Program
가디언(The Guardian), 「호주, 프랑스 잠수함 계약 파기 보상금 8억 3천만 달러 지급」
르몽드(Le Monde), 「오커스 협정: 프랑스, 굴욕을 받아들이기까지의 시간」
BBC 뉴스(BBC News), 「아르헨티나, 한국산 FA-50 전투기 구매 계약 무산 배경」
제인스 디펜스 위클리(Jane’s Defence Weekly), 「FA-50 전투기 수출 제한과 영국 부품 문제」
The New York Times, Israel Scraps AWACS Deal With China
로이터통신(Reuters), 「미국 압박으로 이스라엘-중국 방산 계약 취소」
AP News, Poland signs major arms deal with South Korea
The Diplomat, Poland-South Korea defense cooperation and local production plans
The Washington Post, In Ukraine, artillery is breaking the stalemate
Financial Times, South Korea supplies US with 155mm shells in indirect aid to Ukra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