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전쟁도 하지 않는데 왜 이렇게 무기를 많이 만들까요?”
방산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되면서 머릿속을 스쳤던 1차원적인 질문입니다. 전쟁은 교과서 속에서만 존재하는 듯했고, 제 일상과는 거리가 먼게 사실이니까요. 그런데 방산 관련 책을 찾아보고, 현장도 가보고, 방산 전문가와 얘기를 나누는 등 나름의 취재를 이어가다보니 오히려 이 질문은 거꾸로 되어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습니다. 다시 말해 전쟁을 하지 않기 위해서, 전쟁이 없게 만들기 위해서 방산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1953년 정전협정 이후 한반도에는 길고도 묘한 평화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평화는 언제든 흔들릴 수 있는 유리잔과 같습니다. 북한은 지금도 간간히 미사일을 쏘아 올리며 긴장을 높이고, 핵무기를 지렛대로 삼아 협상을 시도하는 중입니다. 한반도 주변을 둘러보면 중국, 일본, 러시아 같은 군사 대국들이 나란히 서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방산을 키우는 일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본능에 가깝습니다. 집이 아무리 고요하고 평화로워 보여도 튼튼한 자물쇠는 반드시 필요하듯 말입니다.
사실 방산의 의미는 단순히 안보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경제와 기술, 외교와도 깊숙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2022년 여름 한국과 폴란드 얘기를 해 볼까요. 당시 폴란드 국방부 청사에서 체결된 양국 간 약 20조원 규모의 계약은 한국 방산의 위상을 단숨에 바꿔놓았습니다. K-2 전차, K-9 자주포, FA-50 경공격기가 계약 대상이 됐습니다.
가장 놀라운 점은 속도였습니다. 보통 무기 거래는 수년의 협상을 거쳐야 하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위기가 닥친 상황에서 이 계약은 불과 몇 달 만에 성사됐습니다. 폴란드가 한국을 택한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빠른 납기, 합리적인 가격, 그리고 검증된 품질. 바로 한국형 방산의 경쟁력이었습니다.
한국 무기의 신뢰성은 이미 여러 나라에서 입증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K-9 자주포입니다. 핀란드는 혹독한 겨울 훈련에서 이 무기를 운용했는데, 영하 30도의 환경에서도 멈추지 않고 포를 발사했습니다. 당시 핀란드군 관계자는 “한국 자주포는 북극권에서도 버틸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비”라고 평가했습니다. 반대로 같은 시기 도입했던 다른 나라 장비는 종종 시동조차 걸리지 않아 애를 먹었습니다. 이 차이가 바로 한국 방산에 대한 신뢰를 키웠습니다.
이번엔 필리핀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FA-50 경공격기가 실제 전투에 투입된 적이 있습니다. 2017년 마라위에서 발생한 극단주의 무장단체 소탕 작전이었습니다. 필리핀 공군은 처음으로 FA-50을 실전에 띄웠고, 목표 지점을 정확히 타격했습니다. “한국에서 온 작은 전투기”라 불리던 FA-50은 그날 이후 필리핀 시민들에게는 ‘도시를 구한 비행기’로 기억됐습니다. 이 경험은 곧 FA-50의 추가 수출로 이어졌습니다. 전투기 한 대가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어떤 나라의 역사와 기억 속에 자리 잡는 순간이었습니다.
방산은 일자리와 기술을 동시에 만들어냅니다. 자주포 한 대를 조립하기 위해서는 수백 개 업체가 참여해야 합니다. 센서, 전자 장치, 정밀 가공 부품이 모두 필요합니다. 현장에서 만난 한 엔지니어는 “우리가 만드는 건 단순한 무기가 아니라, 국가가 가진 기술의 총합”이라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방산 기술은 민간 분야로 끊임없이 흘러갑니다. 위성 정찰 기술은 기상 예보에 활용되고, 드론 기술은 농업과 물류에 쓰입니다. 군수용 반도체 기술은 스마트폰과 가전제품의 안정성을 높이는 데 기여하기도 합니다. 방산은 연구개발의 거대한 실험실이자, 민간 산업을 끌어올리는 숨은 엔진입니다.
외교 무대에서도 방산은 강력한 카드가 됩니다. 무기를 수출한다는 것은 단순한 거래가 아니라, 상대국의 안보를 일정 부분 책임지겠다는 약속입니다. 폴란드 사례에서 보듯, 한 번의 무기 계약은 30~40년짜리 협력 관계로 이어집니다. 장비 유지와 보수, 부품 공급, 군사 훈련까지 모두 따라붙기 때문입니다. 한국이 무기를 공급하면 자연스럽게 외교적 신뢰와 동맹이 강화됩니다. 어떤 경우에는 총과 전차가 외교관의 명함보다 더 무겁고 오래가는 신뢰의 증표가 되기도 합니다.
물론 방산에 어두운 그림자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무기를 만드는 건 전쟁을 준비하는 일 아닌가?”라는 의문은 늘 따라붙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강력한 무기를 쥐었을 때, 전쟁은 오히려 멀어집니다. 냉전 시절 미국과 소련이 서로를 견제하며 핵무기를 끝없이 늘렸지만, 정작 두 나라는 정면으로 맞붙지 않았습니다. 억지력의 힘이었습니다. 한국이 방산을 키우는 이유도 같습니다. 총을 만들지만, 총구가 열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방산은 전쟁을 위한 산업이 아니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산업입니다.
앞으로의 과제도 분명합니다. 인공지능, 무인화, 우주, 사이버전 등 새로운 전장이 열리고 있습니다. 한국이 지금의 성과에 만족한다면 순식간에 뒤처질 수 있습니다. 동시에 방산이 가진 고질적인 문제, 즉 불투명성과 부패의 위험도 반드시 경계해야 합니다.
몇 년 전 해외에서 방산 비리가 터졌을 때, 한 국방 전문가는 “무기보다 무서운 건 부패”라고 말했습니다. 투명하고 공정한 시스템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방산의 성과는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전쟁을 억제하는 방산의 가치가 비리로 인해 무뎌지고, 결국 평화를 제대로 지키는 역할을 수행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다시 한번 저는 “전쟁은 없는데 왜 방산이 중요한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하고 싶습니다. “전쟁이 없게 하기 위해서 방산은 필요하다”라고요. 방산은 단순한 군수 산업이 아니라, 국가를 지탱하는 버팀목입니다. 안보를 담보하고, 경제를 살리고, 기술을 발전시키며, 외교의 길을 열어주는 힘. 전쟁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억제하고 평화를 붙드는 힘. 그것이 지금 한국이 방산을 키워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방산 산업이 앞으로 더 큰 가치를 가지려면 단순히 무기를 잘 만들고 수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방산은 태생적으로 국가 예산과 직결되고, 극도로 보안이 필요한 분야이다 보니 투명성이 떨어질 위험이 큽니다. 부패나 비리는 한순간에 수십 년간 쌓아 올린 신뢰를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해외에서도 방산 계약 과정에서 로비나 뇌물 사건이 터질 때마다 그 나라 산업 전체가 치명타를 입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한국이 지금처럼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라는 이미지를 이어가려면 무엇보다 깨끗한 제도를 갖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계약 과정과 연구개발, 생산과 납품에 이르기까지 투명하게 관리되고, 국민들이 안심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돼야 합니다. 그래야만 방산이 단순히 “총과 전차를 파는 산업”이 아니라, 국가 기술력과 신뢰를 대표하는 미래 산업으로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한국형 방산의 강점이 빠른 납기와 합리적 가격에서 출발했다면, 앞으로는 “투명하고 공정한 산업”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덧입혀야 합니다. 이것이 가능할 때, 방산은 더 이상 전쟁의 언어가 아니라 평화와 신뢰의 언어로 한국을 빛내는 힘이 될 것입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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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국제정치연구소(ISPI), 「한국 방위산업의 세계 진출과 기술 투자」
사사카와 평화재단(SPF), 「한국 방위산업의 세계화」
워 온 더 록스(War on the Rocks), 「한국 방산 수출 확대와 미래 전망」
더 디플로맷(The Diplomat), 「한국 방위산업의 경쟁력과 폴란드 수출 사례」
AP 통신(AP News), 「폴란드, 한국산 무기 대규모 도입 계약 체결」
로이터통신(Reuters),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유럽 육상 무기 매출 2배 확대 계획」
파이낸셜타임스(Financial Times), 「한국, KF-21 전투기 엔진 독자 개발 추진」
더 디플로맷(The Diplomat), 「유럽-한국 안보 협력의 중요성」
퀸시 연구소(Quincy Institute), 「안정을 촉진하는가, 갈등을 부추기는가: 미국 무기 판매의 영향」
초국경연구소(Transnational Institute), 「적 없이는 장사 없다: 전쟁과 무기 거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