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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dy Aug 17. 2019

선과 악


권선징악의 시대는 지났다. 고전이나 드라마 속에만 존재하는 이야기다. 세상에는 100% 선도 없고, 100% 악도 없다. 웹툰 작가 '랑또'의 '악당의사연'을 보며 정말 맞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세상의 정복하려는 빌런들의 과거를 유심히 살펴보자. 아픔을 당한 존재들이 많다. 사회적 외톨이로 자라거나 부모가 어렸을 적 사망했거나. 사회 질서에 소외되어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다가 세계 정복 혹은 우주정복을 위해 출전한다. 그들의 의도는 분명 잘못됐다만 따져보면 악은 누군가에 의해 결정되고 정해진 것이다. 악당의 사연에는 일반 회사처럼 돌아가는 악당 조직이 나온다. 각자 먹고살기 위해 괴물을 만들고, 러브레인저(파워레인저의 오마주 인듯)가 나타나 괴물을 물리친다. 흥미로웠던 것은 악당이 세상을 정복하자 러브레인저가 악이 되어 모두가 그들을 쫓는 장면이다. 승자가 선이고 패자가 악이되는 기묘한 현상이다.



뻔하지 않은 우리 사회를 담아낸 작품들은 무수히 많다. 일본 애니메이션 '도쿄구울'을 보면 종국에는 누가 선이고 악인지 모를 지경이 된다. 구울이라는 존재는 분명 사람을 잡아먹는 악이지만 이들을 이용해 음모를 꾸미고, 구울을 잡아다가 세뇌시키는 인간 조직은 구울보다 더 비인간적으로 느껴진다. 영화 '다크나이트'도 참 좋았다. 뻔하지 않은 악당(히스레저가 연기한 조커)와 함께 정의가 한순간에 악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배웠다. 평화로운 세상에 영웅은 필요하지 않다. 항상 악이 있어야 선도 있다. 거래이자 공생관계다. 그렇다면 진짜 선과 악은 무엇일까 혼란스러운 지경에 이른다.



영화 쓰리빌보드가 신선했던 것도 전형적인 선과 악 프레임을 탈피했기 때문이다. 강간 당한 뒤 죽은 딸의 복수를 결심하는 주인공은 일반 영화와 달리 약하지 않다. 욕설을 내뱉고, 무능한 경찰에게 화염병을 내던진다. 한국 영화 같으면 해당 사건에 정치권 등 윗선이 개입하고, 진범을 숨기는 경찰 등이 나올 거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윌러비 경찰서장은 선하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다. 증거가 없어 범인을 못잡는게 무능이라면 경찰은 무능하지만 현실적으로 방법이 없다. 딸은 죽었고 누군가 책임을 져야하는데 딱히 화를 풀 상대도 없는 상황에서 주인공은 애매한 곳으로 분노를 터뜨린다. 분명 주인공은 약자고, 피해자다. 그러나 주인공이 애꿎은 사람들에게 분풀이를 하는 것만 놓고보면 그도 악이 된다. 우리가 사는 세상엔 명쾌한 것이 하나도 없다. 그게 우리 인간이고, 그게 우리가 사는 사회다.


나는 대학생 때 부터 이런 생각을 가져왔다. 2학년 때 조사기자협회와 한국일보가 주최하는 논술대회에 나가서 상을 탄 적이 있는데 주제가 '오사마 빈라덴 사망과 정의' 였다. 그냥 평소 생각이 많던 주제라 30분만에 쓰고 나왔는데 좋은 결과를 받았다. 내용을 옮겨 본다.




오사마 빈 라덴 사망 – 보복과 일방적 정의를 넘어 보편적 정의를 향한 단초 되길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함무라비 법전이 담고 있는 보복논리는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지배적인 담론으로 자리잡았다. 자식이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무협영화가 인기를 끌고, ‘몽테 크리스토 백작’ 류의 소설이 스테디셀러가 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대중은 받은 만큼 돌려주는 삶의 방식을 정의라 인식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원수를 찾아내 처절히 복수하는 행위가 과연 정의가 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에드몽 당테스’가 결국엔 복수를 후회했듯이, 정의가 보복의 원리로 이용될 때, 그 결과는 개운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피는 피를 부르고, 복수는 복수를 낳기에 하는 말이다.


국제관계에서, 보복의 정의는 이미 일상화되었다. 얼마 전 사망한 ‘오사마 빈 라덴’이 좋은 예다. 전대미문의 테러로 충격과 공포에 빠진 미국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초강대국으로서 세계를 주도해온 자존심에 상처도 입었을게다. 테러의 원흉을 처단하는 ‘성전’이 지난 10년간 미국의 주요 어젠다로 기능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제 국가의 안녕을 위협했던 위험인물이 사라졌으니 평화의 도래만 남은 것 같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다. 테러단체 ‘알 카에다’가 보복 공격을 예고했기 때문이다. 폭로전문 웹 사이트 ‘위키리스크’가 발표한 자료도 추가 테러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산 넘어 산이다. 보복의 정의는 끝이 없다. 대립하는 양측이 공멸하기 전까진, 진정한 평화는 미명에 불과하다. 오바마 대통령의 “정의가 실현됐다.”는 발언이 못 미더운 건 이 때문이다.


보복의 정의 이전에 대립 세력간 정의의 성격이 판이한 것도 문제다. 미국의 정의는 ‘많은 사람을 살상한 테러범을 척결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중동의 시각은 어떨까? 9•11 테러의 배경에는 미국의 권력 남용이 있었다. 미국은 자본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고립주의와 개입주의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국제 관계를 불균형 상태로 내몰곤 했다. 냉전 이후, 대량살상무기의 확산을 방지한다는 명분하에 회교 근본주의자들을 포용하고, 잠재적 위험요소를 완화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했다. 석유 확보를 위해 중동지방에 압박을 가하며, 기독교를 무기로 이슬람 세력을 억압하기도 했다. 미국의 정의는 중동에겐 불의였다. 알 카에다가 테러를 감행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무고한 생명을 산화시킨 폭력적 방법은 결코 정당화 될 수 없다. 그러나 미국의 권력이 정의담론을 선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중동의 억울함과 피해의식을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누가 정의이고, 누가 악인가?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따라서 보다 멀리 내다보는 거시적 시각과 함께, 양면을 함께 둘러보는 개방적 자세, 현상의 배경까지 탐구하는 깊은 사유의 눈이 필요하다. 미국은 테러의 배경보다 현상 자체에 치중했다. 자연히 복수를 강조하게 되었다. 국민들의 감정을 동원해 전쟁에 정의를 덧입혔다. 1차 목표를 달성했는데도 국제상황은 여전히 불안하지 않은가. 미국의 뼈아픈 자기반성과 성찰이 필요하다. 세계각국의 ‘반미 신드롬’의 배경과 원인을 반추해야 한다. 지구 반대편의 그들에겐, 미국이 정의의 사도가 아니라 악의 축 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동시의 폭력의 수단으로 한 보복으로 한 보복을 그만둬야 한다. 울분과 감정이 중첩되어 결국 모두를 파멸로 이끌 수 있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면, 강자가 그 모범을 보여야 하지 않을까. 성숙한 태도와 차분한 이성을 바탕으로 사적 정의가 아닌, 보편적 정의를 탐색할 때, 비로소 미국의 진심은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언론이 주목했던 오사마 빈라덴 사살 당시 상황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악감정이 남아있는 양자의 화해와 평화는 한쪽의 양보와 대화의 노력을 요구한다. 빈 라덴의 사망으로 위험이 극대화 된 지금, 객관적 강자이자 원인 제공자인 미국의 결단이 시급하다. 공멸을 막기 위해 손을 내밀 때 세계 속 미국의 이미지는 긍정적으로 쇄신될 수 있다. 동시에 ‘빈 라덴 사살’도 폭력을 재생산하는 기제가 아니라 용서와 관용 속에 보편적 정의를 이룩하는 단초로 작용할 것이라 확신한다.  


출처: https://josa1987.tistory.com/76 [한국조사기자협회]




그래서 나는 함부로 선악을 나누는 행위를 경계한다. 기자는 더 그렇다. 한쪽 이야기만 듣고 상대방을 '저런 나쁜놈' 해버리면 그 속에 깔린 복잡한 인간들의 속내를 보지 못한다. 약자를 위한 기자는 그래서 위험하다. 누가 약자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사회 정의를 세우겠다'는 초짜 기자의 일성은 대견하되, 동시에 오만하다. 무엇이 사회정의인지 무수한 기자생활을 거치며 배워나가야 할 일이다. '의심하지 않는 정의'가 종국에는 민폐를 끼치고 사회를 더 퇴보시키는 안타까운 결과를 많이 봐 왔다. 계속해서 이 길이 맞는 것인가 성찰하고 의심하고 잘못이 있으면 고치는 유연한 사고가 기자 뿐 아니라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한다. 특히 정치인과 내각 분들께서 제발 이런 생각을 해주셨으면 한다. 물 들어온 김에 노젓고, 쇠뿔도 당김에 빼는 추진력이 중요하긴 하다만 "우리만이 정의"라는 오만이 결국 자신들에게 큰 상처와 피해로 돌아갈 수도 있으니까.


물론 빼도박도 못할 선악은 있을 것이다. 그렇대도 계속 고민해야 한다. 한 사례로 다른 사례를 덮고, 내 편견과 사고로 삼라만상을 넘겨짚는 행위는 삼가야 할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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