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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dy Jan 10. 2020

돌고 도는 과외인생


최근 한국 영화 최초 미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기생충'을 보며 다년 간의 과외 경험이 떠올랐다. 학창시절 부모님의 도움으로 과외를 받던 나는 대학생이 된 후 선생으로 학생 몇몇을 가르쳤다. 학생때는 '선생님이 받는 돈에 비해 열심히 안 한다'고 불평했는데 처지가 바뀌니 만만치가 않았다. 고려해야 할 게 많았다. 아무리 열심히 가르쳐도 학생 성적이 오르지 않는 등 변수도 있었다. 단정한 옷차림과 시간 늦지 않기는 기본이다. 20점인 성적을 몇달 안에 80점으로 올려달라는 학부모의 무리한 부탁에 더해 학생과 좋은 관계도 유지해야 한다. 


우선 나는 공부를 잘하진 못했다. 중학교때는 그럭저럭 이었는데 사춘기가 늦게 오면서 고등학교 1학년때 성적이 바닥을 쳤다. 학원도 곧장 빼먹었다. 부모님께선 특단의 조치를 내려 첫 과외를 하게 됐다. 동생과 함께 받는 과외였는데 은근 경쟁심도 생기고 기대가 됐다.


첫 과외 교사는 전문 선생님이었다. 대학생이나 대학원생이 아닌 중년의 남성이었다. 어딘가 모르게 뺀질한 인상이었는데 실제로 그랬다. 우리 형제는 수학을 못해서 주로 수학 과외를 했는데 선생님의 풀이 방식은 해답집에 나와있는 것과 똑같았다. 그냥 공식에 맞춰 대입하는 식이었다. 선생님은 수업보단 간식에 관심이 많았다. 키위나 사과, 빵 등을 먹으며 자율학습을 시켰다. 성적이 오를 리 없었고, 과외는 몇달만에 끝났다. 첫 기억이 좋지 않았다.


다음 선생님은 '엄친아' 의대생이었다. 꼼꼼한 성격에다, 수능을 본지 얼마 되지 않은 젊은 분이라 말이 잘 통했다. 이분 덕분에 수학 점수가 많이 올랐다. 전문 강사와 대학생은 각자 장단이 있다. 대학생의 경우 각종 시험과 스케쥴 탓에 과외에 소홀해질수 있지만 요즘 애들의 경우 책임감이 크고 열정이 있다. 전문 과외선생은 커리큘럼 등은 체계적일수 있지만 매너리즘으로 인해 뜨뜻미지근한 수업이 계속될 수도 있다. 결국 학생이 과외를 통해 얻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명확히 하고 알음알음으로 이 기준에 맞는 좋은 선생을 구하는 것이 좋겠다.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처음으로 과외선생 자리를 구했다. 중학교 2학년 여학생이었는데 인터넷 과외사이트에서 매칭이 됐다. 부모님은 조금 깐깐한 편이었다. 집 안에 복사기가 있었는데 내 신분증을 복사하고, 수능 성적까지 물어봤다. 그리고 항상 오는 시간을 정해줬다. 내가 남자라서 좀 걱정이 된다고 했다. 그런데 왠걸, 두달 정도 지나니까 아예 부모님은 집을 비우는 경우도 많았다. 그만큼 순진하고 선하게 잘 보인 것 같다.


수지(가명)는 착한 아이였지만 공부에 뜻이 없었다. 과목은 영어였는데 당시 나는 열의가 가득해서 교과서뿐 아니라 영영사전에 단어장까지 직접 만들어서 다녔다. 그는 잘 따라줬지만 불행히도 성적이 많이 오르진 않았다. 다음은 영아(가명)이었는데 얘는 더 심했다. 학교에서 짱까지는 아니더라도 노는 축에 속하는 아이였다. 그한테서 무서운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누구누구는 은따인데 피구하는 시간에 일부러 걔한테만 공을 던진다는 식이었다. "그러면 안된다"고 훈계했지만 영아는 신나서 더 얘기를 했다. 


영아는 부모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부모에겐 이런 이야기를 안했다. 부모는 일하느라 바빠서 영아에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과외도 남들 다 한다니까 수소문해서 구한 것이다. 영아는 공부보다 얘기를 더 하고 싶어했다. 친구들끼리 나누는 대화가 아니라 자기보다 조금 더 살았지만 젊은 존재에게 자신의 속내를 터놓고 싶어했다. 그런 측면에서 과외 선생과 학생의 사이는 공부 뿐 아니라 인생과 삶, 인간관계 경험을 논의하고 들어주고 조언하는 그런 관계인 것 같다. 요새 학교에선 이런 게 잘 안되지 않나. 학교에선 친구들 눈치도 있고 솔직한 이야기를 하기가 어려울 거다. 영아와는 1년 정도 과외를 같이했고 영어 성적이 꽤 많이 올랐다(워낙 성적이 바닥이었어서..). 상위권 학생도 한번 맡아봤다. 외고를 준비하는 아이라 괜히 긴장이 됐는데 공부 잘하는 애들은 기본적인 지식보다는 문제를 푸는 다양한 방식을 짚어주는 것이 좋다. 영영사전을 함께 찾아보고 교과서뿐 아니라 원서를 함께 읽으며 나부터가 공부가 됐던 것 같다. 가격은 최소 40만원, 최대 50만원을 받았다. 일주일에 2번 2시간씩 했으니 남는 장사였다. 번 돈은 대부분 술값으로 쓴 것 같다만..

     



과외는 1960~70년대부터 크게 유행했다고 한다. 주로 입주과외가 성행했다. 선생이 학생 집에서 하숙하면서 수시로 공부를 봐주는 것이다. 잘사는 집의 자녀와 머리는 똑똑한데 형편이 조금 어려운 선생의 수요-공급이 일치한 경우다. 상대 여성의 동의없이 일방적으로 혼인 신고를 한 전력이 드러나 사퇴했던 안경환 전 법무부장관 후보자도 이러한 입주과외 형태를 통해 상대 여성을 만났다고 한다(여성이 학생). 화제가 됐던 jtbc 드라마 '스카이캐슬'에서도 입주과외가 나온다. 머리가 좋지만 집이 어려운 학생이 잘사는 집 딸네 집에 얹혀 살면서 공부를 가르치는 모습이다. 가난한 집 딸인 혜나가 태생적으로 머리가 좋은 거 부터가 모짜르트-살리에르를 연상시킨다는 지적도 있지만.. (나는 천재라서 악상이 막 떠오르는 모짜르트보다 죽어라 노력해서 성과를 내는 범인인 살리에르를 더 좋아한다) 


입주과외를 다룬 드라마 스카이캐슬


과외는 사교육의 절정이다. 비싼 교육비에 맞춤 교육, 1대1 혹은 1대 소규모 과외는 단기간에 학생의 실력을 끌어올리는 필수적인 요소처럼 됐다. 이를 경계한 신군부는 1980년 7월 30일 전격적으로 과외를 전면 금지시켰다. 그러다 문민정부의 단초가 된 1987년쯤부터는 과외규제가 약해졌고, 과외 단속을 피해 이뤄지는 값이 더해져 과외비가 껑충 뛰게 된다. 


대학생 과외가 허용된 건 1989년 2월이다. 일반인은 여전히 과외가 금지였으나 누구나 다 하는 추세가 됐다. 90년대부터는 이러한 일반인 과외 금지 규정이 해제됐고 2000년 4월 헌법재판소에 의해 1980년대 시행되었던 과외 금지 조치에 대해 위헌판결이 났다. 그러다 특목고, 자사고, 외고, 국제고 등이 유행하면서 다시한번 과외 전성시대가 왔다. 대학 입시 위주였던 과외 시장이 이제 고등학교, 중학교 입시까지 접점을 넓히고 있는 셈이다.


과외 열풍은 소위 ‘붉은 여왕 효과’로 비유된다. 루이스 캐럴의 소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의 후속작 ‘거울을 통하여’에서 붉은 여왕의 워딩에서 비롯된 말이다. “아무리 달려도 주변 세계가 함께 움직이기 때문에 제자리에 머물기 위해서는 죽을 힘을 다해 뛰어야 하며,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해선 지금보다 두 배는 빨리 달려야 한다.” 남들 하니까 안할수가 없다는 거다.




과외를 잡으려면 공교육의 품질이 좋아져야 한다. 그러나 모두가 학창시절을 떠올려보자. 수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교육 시장과 공교육은 상대가 되지 않는다. 물론 학교는 성적뿐 아니라 인성교육을 담당하는 곳이고 노력하는 교사들도 많지만 현실이 그렇다. 있는 집 자식들이 더 좋은 과외를 받고 좋은 성적으로 좋은 학교를 나와 좋은 직장을 가진뒤 돈을 많이 벌고 잘 산다. 100미터 차이나던 출발점이 1km, 2km씩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자본주의 시대에 자유로운 수요-공급에 의한 교육비 지출이 문제될 것은 없다만 그래도 좀 찝찝하다. 학생으로나 선생으로나 과외의 일부 수혜자였던 내가 할말은 아니지만 과외를 매개로 돌고도는 이 인생의 문이 언제쯤 더 넓어질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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