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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dy Jan 05. 2020

젊은 꼰대의 변명


나는 자율형사립고를 졸업했다. 야구로 유명한 학교였다. 학교 야구단이 황금사자기 고교 야구 대회 결승에 올라가면 학교 차원에서 아예 버스를 대절했다. 서울 동대문운동장으로 응원을 가기 위함이다. 학생들은 각자 1만원씩 내고 버스에 올라탔다. 서울의 교통 체증에 욕도 하고, 바쁘게 돌아가는 서울의 거리를 목도하며 감탄사도 냈다. 경기장에 도착하면 알수없는 경쟁심이 몰려왔다. 주로 광주제일고등학교와 많이 붙었는데, 우리가 지면 점심으로 나온 된장국 통을 던지는 등 해선 안될 행동도 저질렀다. 가끔 패싸움이 나기도 했다. 스포츠로 하나가 되는 동시에 또 스포츠로 남과 철저히 갈라지는 기이한 경험을 일찍부터 했다.


학교는 반 강제적으로 야구 경기 응원을 시켰다. 500여명 전교생 가운데 꼭 10명 정도는 갖가지 이유를 들어 응원을 가지 않았는데 이들은 암묵적으로 학생들 사이에서 왕따를 당했다. 응원단은 오후 늦게 학교로 돌아오면 서로 영웅담을 나눴다. 어떤 선수가 잘했느니, 된장국을 던져서 광주일고 학생이 맞았느니 하며 떠들어댔다. 그러면서 은근히 남아있는 아이들을 비꼬았다. 응원을 포기하고 학교서 자습한 아이들은 대부분 소심하거나 조용한 친구들이었다. 그런 애들을 두고 학생들은 "공부도 썩 잘하는 것도 아니면서 유난"이라고 비판했다. 애교심을 강요하는 면학분위기는 그렇게 조용히 학생들을 전체주의에 무덤하게 만들고 있었는지 모른다.


하이라이트는 대천임해수련이다. 우리 고등학교는 1학년 여름방학 때 대천으로 수련회를 갔다. 말이 수련이지, 실상은 2박3일간 정신교육 명목으로 체벌을 받았다. 이 수련의 악명은 대단했다. 특히 따가운 8월의 햇볕아래 이뤄지는 맨몸 수련의 두려움이 컸다. 등에 화상을 입고 피부가 벗겨져서 1년간 고생했다는 선배들의 증언이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난 수련을 가지 못했다. 사춘기를 겪고 있던 나는 어린 치기에 싸움을 벌였고 뒤지게 얻어맞았다. 코뼈가 뿌러져 근신중이었다. 교무실 옆에서 책상을 두고 벌을 받고 있다가 몰래 핸드폰을 봤다. 이를 목격한 학생주임이 내 싸대기를 때렸는데 무너진 코뼈가 다시 주저앉았다. 학교는 고의적 책임을 지고 수련회 명단에서 내 이름을 뺐다. 나는 수련이 진행된 2박3일간 학교에 나와 자습을 했다.  


수련을 마친 친구들이 복귀하던 그날이 생생하다. 모두가 등에 시뻘건 화상같은 자국을 안고 돌아왔다. 훈장같은 거였다. 서로 약을 발라주며 대단했던 체벌의 현장을 이야기했다. 은근한 승리감과 완연한 뿌듯함이 공존했다. 미묘한 거리감을 느끼며 나는 깨달았다. 남들과 달라서는 안 된다. 아무리 내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해도 철저히 나를 숨기고 전체에 녹아들어야 내 인생이 편하겠다는 점을 자각했다. 군대에서도, 군대보다 위계서열이 심한 언론사에서도 내 지론은 똑같았다. "더러워도 중간만 하자. 나대지 말자. 비난받을 일을 최소화 하고 눈치빠르게 움직이자"는 것이었다.



입사 후 3년쯤 지나자 90년대생이 회사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굳이 세대로 나누기는 그렇겠지만 정말 80년대생인 나와는 뭔가 달랐다. 신입들을 모아놓고 술자리를 하는데 질문이 많았다. "연봉에 만족하시느냐" "다른 언론사에서 이직 제의 받으신 적 없느냐" "우리 회사가 큰 회사도 아닌데 왜 다니시느냐"는 어찌보면 답하기 난감한 것들이었다. 대충 얼버무리고 술자리를 빠져나왔는데 많이 놀랐다. 너무 많이 혼나서 감히 선배 눈도 잘 쳐다볼수 없던 내 신입 시절이 떠올랐다. 한참 '젊은 꼰대'라는 용어가 유행하던 때라서 세상이 변했구나 하고 말았다. 내가 당한만큼 후배에게 푼다면 그거야말로 구악이 아닐수 없었다. 내가 당한게 억울하더라도 혼자 감내하고 말아야지 안 그러면 내가 혐오하고 증오하던 선배와 똑같이 되고 말테니까.


굳게 다짐을 했건만 가끔 거슬리는 게 있다. 야근이 땜빵나서 무조건 부서에서 한명은 야근을 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예전같으면 부장이 카톡방에서 누구누구 야근하라고 지정했을 테지만 요새는 '오늘 야근 할 사람' '하루만 희생을 해줄 사람? 그에 대한 보상은 하겠다'고 한다. 10분이 지나도록 아무도 답을 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40대인 차장이 "다들 바쁜 것 같으니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하고 야근을 들어간다. 눈치를 보고 선뜻 손을 들지 못한 내 책임도 있겠지만 젊고 어린 친구들이라고 해서 힘들고 지치는 일에 대해 먼저 나서서 하지 않는 분위기가 됐다.


회사 안에서 선배와 눈이 마주쳐도 인사를 안해서 내가 먼저 한다. 서로 카톡을 할 때도 말을 끝까지 맺지 않는다. 예를 들어 "선배 진짜 상황이 어렵겠다"거나 하는 식이다. 내 옹졸한 마음탓에 조금씩 신경이 쓰인다. 나보다 더 선배를 향한 뒷담화를 내게 하는 90년대생 후배도 있었다. 나와 친하다고 생각해서일까, 그 정도로 친근하진 않은것 같은데..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잠자코 있었다. 입이 무거운게 꼭 좋은건 아니지만 반대로 시원시원하고 남의 눈치 안보는 새로운 신인류도 조금 당황스러웠다.


술자리도 같은 선상이다. 지금 내 출입처는 아니지만, 아끼는 후배가 해당 부처를 출입하기에 공무원 아저씨를 만날때 몇번 부른적이 있다. 굳이 꼰대라는 욕먹으면서 그럴 필요도 없었지만 정말 선의였다. 높은 분이었기에 후배가 따로 만나기 어려울것 같아 인사라도 하고 안면 트라고 부른 것이다. 근데 해당 후배는 한번도 오지 않았다. 바쁘다는 이유였다(그런데 일주일여 동안 그의 기사를 볼 수가 없었다..). 새벽이든 휴일이든 시시 때때로 나를 불러내던 악질 선배가 떠올랐지만 이건 그와 경우가 좀 다르지 않은가. 친구들이 내 얘기를 듣고 "너 벌써 젊은 꼰대가 됐다"고 놀려댔다.


회사는 회사일뿐 내 관심도 거기에서 그쳐야하겠지만 잘 되지 않는다. 모두가 나와 같은 마음이 아니기에 좀 기대를 내려놔야겠다만 나이차이도 채 10년이 안 나는데 나만 악질 꼰대의 영역에 들어선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그냥 신경을 안 쓰는게 답일까? 카톡 하나, 문자 하나에도 그들에게 상처를 줬을까봐 신경이 쓰여서 일적인 것 이외에는 아예 말을 안하게 된다. 모든 후배에게 다 잘해줄 수 없고 그들 모두가 나에 대해 마음을 여는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최근 한 후배가 결혼했는데 청첩장을 받지 못해서 서운했다. 별로 친하지는 않아도 부르면 당연히 결혼식에 참석해 축하해줄텐데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무관심과 과잉 관심 사이에 현명한 타협지점이 있을 터인데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선배들과 만나는 게 편하다. 젊은 꼰대로서 인간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할지 고민되는 요즘이다. 전체에 편승하면 편하다고 배웠던 삶이 통째로 전복되는 그런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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