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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dy Dec 18. 2019

기자 리영희


기자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각종 사고ㆍ사건, 정치ㆍ경제 소식, 생활 정보 등을 신문, 잡지, 라디오, TV, 인터넷 등을 통해 일반인에게 신속하게 알려주는 사람이다. 해외의 경우, 전설적인 종군기자 ‘로버트 카파’나 워터게이트 사건을 보도한 ‘칼 번스타인’ 기자등이 대표적이다. 한국의 경우, 눈을 맞는 모습이 화제가 됐던 KBS 박대기 기자나 촌철살인의 클로징 멘트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은 MBC 신경민 기자(현 국회의원)처럼 수많은 기자가 각자의 영역에서 발로 뛰고 있다.     


‘기자’는 단순히 글 쓰는 직업이 아니다. 기자는 사회의 문제를 포착하고 그 어두운 면을 대중에게 공개해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사명을 띤다. 당연히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사회의 기득권이나 부패 세력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이승만 정부당시, 자유당 정권의 횡포를 비판하던 경향신문이 폐간된 것도 이러한 까닭에서다. 칼보다 강한 기자의 펜은 독재시절부터 약자를 강자로부터 지켜왔고, 보다 밝은 세상을 만들어 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사실을 “전달하는 순수한 기자관이 사라졌다”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기자는 프레임을 보도한다. 사실을 거르고, 선별하는 동시에 적절히 가공해 기사를 쓴다. 겉으로는 객관적인 입장을 견지하지만, 결국 특정 언론사의 논조와 이념이 투영된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압박과 압력이 들어온다. 논란이 될 만한 기사는 데스크(부장)를 거치며 ‘킬’된다. 따라서 기자는 갈등과 고뇌의 시간을 거친다. “진실을 은폐하려는 권력에 기댈 것인가, 과감히 신념을 지킬 것인가”하는 고민이다. 부와 영예, 그리고 양심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는 것이다. 사회를 움직이는 지식인으로서 기자에겐 올바른 선택이 필요하다.  현직 기자들과 언론사 지망생들의 롤모델 1위로 꼽히는 리영희의 기자생활과 가치관을 분석하여, 한국 언론이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방향을 모색해 보겠다.


리영희의 기자 인생     


1. 이승만 정권기     

리영희는 제대를 앞둔 1957년(29세)에 합동통신 채용시험에 합격했다. 통역장교 노릇을 하며 닦아온 영어실력이 큰 도움이 됐다. 우연히 신문에서 본 합동통신 기자모집 광고가 그의 인생을 바꿔 논 셈이다. 리영희가 언론사에 입문할 무렵은 이승만 대통령이 영구집권을 위해 만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영국<타임>지가 “남한에서 민주주의를 기다리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고 논평할 정도였다. 이승만 정부는 선거를 앞두고 진보적 월간지 <중앙정치>11월호를 발매금지하고, 조봉암 등 진보당 간부들을 검거한데 이어 진보당의 정당 등록을 취소했다. 이어 진보당 당수 조봉암을 간첩으로 처형하고 <경향신문>을 폐간시켰다. 리영희는 이승만 정권의 포악성을 지켜보면서 통신사 외신부 일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1959년부터 1961년까지 <워싱턴포스트> 익명의 통신원으로 활동했다. 동시에 1959년 ‘풀브라이트 장학계획’의 일원으로 미국에 건너가서도 흑인인권운동단체인 NAACP 본부를 방문하는 등 인종차별, 약자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리영희가 귀국한 이후 이승만 정권은 3·15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리영희는 4월 혁명의 현장에서 펜을 놓고 서슴없이 시위대열에 몸을 던졌다. 4월 19일 학생시위대가 광화문에서 경무대(청와대)로 돌진할 때도 리영희는 그 속에 끼었다. 리영희는 언론인으로서 4·19 혁명의 중심에 서서 ‘진리에 복무’했다. 대부분의 언론이·지식인이 이승만 독재에 복무하면서 4월 혁명 대열에 참여를 꺼릴 때였다. 리영희는 낮에는 시위대열에 참가하고, 밤에는 한국의 실정을 알리는 평론을 작성해 <워싱턴포스트>지에 기고했다. 결국 4월 26일에는 100만명 서울시민이 궐기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이승만이 하야를 발표했다. 이 과정에서 리영희는 비겁한 언론인들을 질타했다.      


“부패·타락으로 이름난 이승만 정권이 악명 높은 폭정을 12년씩이나 계속할 수 있었던 배후세력은 두 가지였다. 4·19 학생혁명의 기운이 수평선 위에 그 심상치 않은 모습을 드러내기가 무섭게, 여태까지 ‘국부 이승만 대통령’ ‘세계적 반공주의 지도자’를 외쳐댔던 이 나라의 기자들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이승만과 자유당 정부의 부정·부패·타락을 폭로하는 데 앞장섰다. 우리나라의 신문은 역대 정권과의 관계와 존재양식에서 무법적인 강압 정권에겐 한없이 약하고 총칼을 차지 않은 문치성 정부에는 폭력적으로 포악했다. 같은 하나의 정권에게도 양면적으로 대응했다. 그 권력집단이 눈을 부라리면 언론인은 두손을 비벼가며 정권을 찬송했다. 그토록 찬송을 바쳤던 권력이 기울기 시작하면 비방과 매도를 일삼았다.”       


리영희의 기자 초년병 시절은 말할 수 없이 어려웠다. 그는 서울에서도 가장 월세가 싼 변두리에 방을 얻었다. 시내버스도 다니지 않고 전화를 걸려면 청량리역까지 나가야 하는, 동대문구 제기동의 미나리 밭 가운데에 얻은 두 칸 전셋집에서 부모를 모시고 어렵게 살았다. 그러던 중에 첫아이가 병으로 사망하기도 했다. 리영희는 아침 8시 반에 합동통신 외신부 일을 끝내자마자 국군연합참모부에서 ‘일일 국제정세 분석’을 보고하는 부업을 맡았다. 만약 리영희가 국제부 외신기자를 고집하지 않고 정부기관이나 경제부처를 취재하는 출입기자로 나섰다면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됐다. 당시 출입기자들은 대개 그랬기 때문이다. 그만큼 리영희는 궁핍을 팔아 기자정신을 지키고자 했다. 그의 평소 생활신조가 ‘검소한 생활에 높은 도덕적 추구’였기 때문이다.         



2. 박정희 정권기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를 비롯한 반란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장면 문민정부를 전복시켰다. 5·16은 양심적인 언론인으로 올곧게 살고자 하는 리영희에게 청천벽력이자 가시밭길의 시작이었다. 리영희는 7년간의 군 생활을 통해 당시 군집단의 야만성을 몸소 체험했었다. 그는 막내임에도 불구하고 합동통신 선배 기자들에게 “우리는 모든 힘을 다해 군대의 정권 탈취에 반대해야 한다”고 일갈한다. 또한 합동통신 건물 앞으로 찾아온 군인을 쫓아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쿠데타에 성공한 반란군은 국가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바꾸고 6월 6일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을 공포하여 최고권력 기구로서 ‘법적’ 근거를 마련하게 된다. 5·16 쿠데타는 국가 전체에 엄청난 변화를 불렀다. 언론계도 다르지 않았다. 언론인들의 기회주의적 속성을 다시 한 번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4월 혁명 공간에서 과거 경제부처 등을 출입하면서 흥청거리는 선배 동료 기자들 중에 리영희를 고급술집으로 초청해 술을 사거나 밥을 사는 등 호감을 보이다가 사태가 바뀌자 표변하는 이들도 많았다. 

 

① 박정희–케네디 회담 특종     

박정희 정권기 리영희는 두 가지 특종기사를 보도한다. 그 중 하나가 박정희-케네디 회담 특종이다. 박정희의 미국방문을 따라가게 된 리영희는 동아/조선 기자들과는 달리 박정희-케네디 회담 공식발표 뒤에 깔린 미국 정부의 속셈에 주목했다. 리영희는 기고를 통해 사귄 <워싱턴포스트> 주필의 도움으로 미 국무부 정상회담 실무자를 만나 케네디가 한 발언을 소상하게 듣게 됐다. 케네디는 박정희에게 선거를 통한 민정이양, 군의 정치참여 금지와 원대 복귀를 요구하고, 베트남 사태에 대한 남한의 협력 등을 요구했다. 리영희는 취재한 내용을 영문으로 작성해 합동통신 본사로 보냈고 이 기사는 국내의 신문에 그대로 보도됐다. 쿠데타 주모의 실권자인 김재춘은 리영희에게 “서울에 가서 보자”고 으름장을 놨다고 한다. 리영희는 귀국 후 경무대(청와대)에서 열린 방미외교 성공 축하파티에도 초대받지 못했다. 이때 함께 수행취재에 나섰던 동아·조선 기자들은 그 뒤 국회의원, 부총리, 국회의장으로 출세의 가도를 달렸다. 리영희가 이런 기사를 쓰고도 무사할 수 있었던 건 기사 내용이 미국과 관련됐기 때문이다. 이후 박정희는 반공법을 공포하고 언론계의 ‘자가 숙정’을 요구하고 나왔다. 군부의 민정 참여를 위해 거추장스러운 언론기관을 굴복시키려는 계획이었다. 리영희는 “언론사 내에서 자가 숙정을 위해 서로 눈치를 살피고, 돌을 맞지 않기 위해 추악한 작태를 벌였다”고 당시를 회고한다.         


② 그레고리 헨더슨 특종     

한국은 1961년 여름의 대홍수로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논밭이 침수됐다. 이로 인해 1962년 쌀농사가 흉작이 나고, 식량은 바닥을 쳤다. 미국정부는 1961년 의회에서 통과시킨 1962년도 책정 2000만달러 상당의 대한국 식량 원조를 해가 바뀌도록 집행하지 않고 있었다. 한국의 심각한 식량위기사태를 고려할 때 지나친 처사였다. 여기에는 반드시 미국 정부의 어떤 배경이 작용하고 있을 것으로 꿰뚫어본 리영희가 그 배경을 확인하기 위해 주한 미국 대사관 문정관 그레고리 핸더슨을 찾아갔다. <워싱턴포스트>와 <뉴리퍼블릭>의 기고가인 리영희를 매우 신뢰한 핸더슨은 그만 속사정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말았다. “박정희가 케네디와 약속한 민정이양을 지키지 않아서 미국 정부가 식량 원조 집행을 보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은 식량 원조를 통해 저개발 국가들의 내정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다. 리영희는 이를 지체없이 기사로 썼다. 이 기사는 박정희 정권으로서는 해머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충격이었다. 케네디 정부도 국가 기밀이 폭로되어 충격을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기사가 나가고, 핸더스는 48시간 내에 본국으로 귀환하라는 미국 정부의 소환명령을 받고 부리나케 한국을 떠났다. 결국 그는 면직되고 말았다. 리영희는 언론인으로서 의무와 개인적 의리 사이에서 무척 갈등하고 고민해야했다. 결국 리영희의 투철한 기자정신으로 살아난 이 기사는 박정희로 하여금 형식적이나마 민정이양을 위한 선거를 치르게 만들고, 그동안 창고에서 잠자던 미국의 잉여농산물이 들어와 굶주린 국민의 허기를 채우는 데 기여했다. 리영희는 그로부터 25년 뒤 핸더슨의 부음을 듣고 신문에 <25년전의 마음의 빚>이라는 칼럼을 썼다.       

③ 한-일 국교정상화 본질 특종     

박정희 정부는 비밀리에 한·일 국교정상화 교섭을 벌였다. 리영희는 다른 기자들과 다르게 일제강점기 동안 조선인 개인과 법인체들이 소유했던 저금·보험·증권·부동산·일본국채 등의 문제에 주목했다. 이러한 국민재산권의 대가를 박정희 정권은 대일재산청구권이라는 이름으로 슬쩍 받아 챙겨 해당 개인과 법인체에 주지않고 몽땅 정부 자금으로 사용하려던 참이었다. 한·일 두나라 정부가 장막에서 합의한 내용은 청구권 자금이 ‘독립축하금’이라는 이름으로 제공되고 그 금액을 원 권리자에게 직접 현금으로 상환하는 것이 아니라 두 나라가 합의한 경제개발자금으로 제공된다는 것이다. 한·일 양국 정부는 이런 사실을 전혀 밝히지 않아서 정작 피해 당사자들은 모르고 있었다. 리영희의 기사가 전국 신문에 대서특필되자 박정희는 새벽에 국무회의를 소집해 이 문제에 대처했다. 당시 외무장관을 겸임하고있던 정일권 국무총리는 앞으로 주요 기사는 아침 일찍 총리관저에서 식사를 하며 얘기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3. 조선일보 외신부 시절 - 필화사건     

리영희는 1964년 10월에 <조선일보> 외신부로 직장을 옮겼다. 합동통신 시절의 유명세 때문에 ‘스카우트’를 받게 된 것이다. 이때는 박정희 정권의 굴욕적인 한·일 회담 추진으로 국내 정세가 어수선한 시기였다. 궁지에 몰린 박정희 정권은 언론 탄압의 강도를 더했다. <경향신문> 발행인과 기자를 구속하고, 같은 날 <동아일보>간부 6명을 반공법 등 위반혐의로 구속했다. 또한 ‘언론윤리위원회법안’을 만들어 국회에서 이를 반대하는 야당이 불참한 가운데 일방적으로 처리했다. 이에 적응해 정치부 기자들이 권력의 해바라기가 되어가는 <조선일보>에서 리영희는 그들과 다른 길을 걸었다.      


리영희의 투철한 기자정신은 곧 필화사건으로 이어졌다. 리영희는 국제정세를 분석해 <조선일보> 1964년 11월 21일자에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제안 준비>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다.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 안건을 아시아·아프리카 외상회의에서 검토 중”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 날 새벽 리영희는 네명의 과한에게 붙잡혀서 중구 저동의 쌍용빌딩 맞은편에 있는 일본식 건물로 끌려갔다. 국내법으로 ‘적성국가 및 반국가단체 고무찬양죄’가 적용된다는 논리였다. 그 악명높은 반공법 제 4조 2항이다. 리영희는 비밀장소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그는 두 달 동안 감옥생활을 하다가 불구속으로 석방됐다.     


석방되어 정치부에 근무할 때 또 한 차례 필화사건이 벌어졌다. 일본의 ‘미쓰야 계획’을 폭로한 것이 계기였다. 일본은 1963년부터 마련한 ‘유사시 일본이 취할 수 있는 일본군의 한반도 개입 사상 작전계획’을 작성했다. 일본에서는 5개월 동안 모의작전훈련을 실시하는 등 도발적인 훈련은 실시했는데도, 웬일인지 한국 언론에는 토막기사로도 취급하지 않았다. 리영희는 일본 언론과 잡지를 분석해 기사를 썼다. 그런데 회사에서 엉뚱한 일이 벌어졌다. 외신부장 남재희가 자기영역을 침범했다고 기자들이 보는 앞에서 리영희의 뺨을 때린 것이다. 동시에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들이닥쳐 리영희를 끌어갔다. 이들은 자기들도 모르는 일본군의 비밀계획을 어떻게 알았느냐고 따졌다. 또한 리영희를 잡으려는 음모는 신문사 내부에서도 진행됐다. 낙하산으로 <조선일보>에 입사한 기자가 그를 주의 깊게 감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리영희는 이러한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지켜나갔다.     


1966년 가을 중앙정보부는 리영희에게 후한 조건으로 베트남 전쟁 특별취재를 제의했다. 국군 파병으로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여론이 악화되고, 베트남에서 한국군의 행위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중앙정보부는 “한국군이 베트남인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는 글을 써달라고 종용했다. 월급의 몇 배에 해당하는 돈과 반공법 기소 취하, 막강한 정권과의 화해와 포용이 그 조건이었다. 또 한 차례의 제안은 서울의 모든 신문·통신 외신부장들과 함께 베트남으로 ‘위로출장’을 가라는 것이었다. 이미 정치부·사회부 부장들이 다녀오고, 그 중에는 녹용 등을 가져오다가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그들은 다녀오자마자 “용맹무쌍한 국군” “베트남 국민의 환영과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국군”을 대서특필했다. 리영희는 진실을 써야 하는 언론인으로써 차마 거짓을 쓸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제안도 거부했다. 그는 잠시 망설였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저널리스트로서, 직업적 양심과 훈련된 격식에 따라, 본 대로 있는 대로 쓸 수 밖에 없습니다. 거짓은 못 쓴다는 말입니다.” 외신부에 있으면서 베트남 문제에 천착해온 리영희는 베트남전쟁을 ‘인류의 양심에 그어진 상처’로 인식했다. 그 때문에 당시 <조선일보> 편집국장이던 선우휘는 리영희를 조사부장으로 발령시켰다. 리영희는 “국가예산으로 이루어지는 호화스러운 위로출장의 맛에 구미가 안당긴 것은 아니었으나, 자신의 직업역사에 오점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결국 그는 1968년 7월 31일 조선일보에서 퇴직했다.           

 

4. 언론계에서 퇴출당하다     

1971년 10월 4일 고려대에서 특권층 부패자로 이후락, 김진만, 윤필용 등의 명단을 공개하면서 박 정권의 부정 부패를 규탄하는 철야 농성이 벌어졌다. 10월 5일 새벽 수도경비사 헌병대 30명이 고대에 난입해 농성 학생들을 구타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학생들의 학원자유 수호 시위는 한층 격렬해져 10월 12일, 14일에는 1만여 명의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10월 15일 박정희는 특별법령 9개항을 발표하면서 서울 8개 대학에 무기휴업령을 내렸다. 10월 16일엔 고려대 무장군입 난입에 항의하는 ‘64인 지식인 선언’이 발표되었다. 언론계에서는 리영희와 <동아일보> 주필 천관우가 참여했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리영희는 언론계에서 추방되었다. 1971년 1월의 일이다.      


5. 한겨레 신문 창간     

1987년 6월 민주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쟁취했지만 이어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는 군부세력과 그에 유착한 수구언론, 재벌기업, 관료층의 협력 그리고 야권의 분열 때문에 전두환과 더불어 군부쿠데타를 주도했던 노태우가 당선됐다. 국민의 실망과 좌절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선거과정에서 수구신문과 관제방송의 패악이 극명하게 드러났고 그만큼 대안언론에 대한 여망에 높아갔다. 오래 전부터 한국 언론의 타락상을 지켜보면서 대안언론의 필요성을 절감해온 리영희는 <한겨레>창간의 주역 중 하나였다. 1974년 자유언론투쟁에 앞장섰다가 각기 조선/동아/한국일보에서 추방된 임재경·이병주·정태기와 함께 리영희는 강남의 한 대중사우나 휴게실에서 맥주를 마시며 <한겨레>창간을 구상했다. 진정한 민주주의를 표현하고 민중의 뜻과 희망이 반영되고, 구태에서 벗어난 통일 지향적이고 혁신적인, 그것도 값이 싼 신문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때까지 없던 가로쓰기와 한글전용, 활판인쇄가 아닌 컴퓨터 편집인쇄, 국민주주 모집, 편집국장의 민주적 선거방식도 언론계에 새바람을 일으키자는 아이디어였다. 세계 언론사상 처음으로 국민모금으로 설립한 <한겨레>는 1988년 2월 25일 국민주주 5만 9000명이 십시일반으로 창간기금 50억원을 모금했으며, 같은 해 9월 발전기금(목표 100억원) 모금에 나서 이듬해인 1989년 5월 15일 창간 1주년 기념일에 목표액을 초과한 115억원을 모금함으로써 물적 기반을 마련했다. 
 

1988년 5월 15일, 마침내 <한겨레>가 창간됐다. 리영희는 논설고문과 이사직을 맡았다. 이날 윤전기에서 갓 인쇄되어 나온 창간호를 펴든 리영희는 창간 주역들과 더불어 환한 미소와 함께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1면 백두산 천지 사진 옆에 창간사가 실렸다. “우리는 따ᅠ갈리는 감격으로 오늘 이 창간호를 만들었다. 이 신문은 ··· 오로지 국민대중의 이익과 주장을 대변하는 그런 뜻에서 참된 국민신문임을 자부한다. 결코 어느 특정 정당이나 정치세력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을 것이며, ··· 특정 사상을 무조건 지지하거나 반대하지 않을 것이며, 시종일관 이 나라의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분투노력할 것이다.” 리영희는 1988년 창간부터 1989년 12월 말까지 월 2회씩 격주로 칼럼을 기고했다.  그 유명한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칼럼도 이 무렵 <한겨레>에 실렸다. “··· 인간보다 못한 금수의 하나인 새들조차 왼쪽 날개(좌익)과 오른쪽 날개(우익)를 아울러 가지고 시원스럽게 하늘을 날고 있지 않은가? 그것이 우주와 생물의 생존원리가 아닐까? ··· 인류가 수천 년 수만 년에 걸쳐서 창조한 지식과 축적한 경험은 ‘극좌’에서 ‘극우’까지 다양하고 무쌍하다. 그리고 그 사이는 끝없이 풍부하다.”     


6. 언론계를 질타한 리영희     

리영희는 평생에 걸쳐 현실과 타협하는 기자를 질타해왔다. 그는 ①기자의 부르주아적 관점 개선 ②빼앗은 쪽의 입장이 아니라 빼앗긴 쪽의 입장에 서자는 점 ③권력에 한눈팔지 말라는 주문 ④‘주의화’된 반공이데올로기를 덮어버리자는 점 – 마르크스의 논문 한 편이나 저서 한 권 읽어본 일도 없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 관한 진지한 이해의 노력도 해보려는 지적 탐구심 없이 뭐든지 좌로 가르고 우로 나누는 식의 흑백논리를 경계하자는 것 ⑤보도 자료로 주어지는 행정부·정보(안기)부·경찰·군의 발표문을 기사화할 때는 독자적인 판단을 가져달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를 위해 리영희는 3가지 원칙을 가지고 글과 기사를 썼다. 새로운 지식과 정보가 있어야 하며, 독자들의 판단을 위해 가장 균형 잡힌 형태로 여러 가지 자료를 제시하고, 자료들이 뜻하는 관점과 의미를 밝히는 것 말이다.      


리영희는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말도 발표도 하지 못하고 있던 언론이나 지식인이 문제를 자유롭게 논할 수 있는 객관적 상황의 변동이 생기자 말하지 않고 있던 비굴은 제쳐놓고 알고 있었다는 것을 내세우는 유형은 지식인과 언론의 소임에 있어서 치명적이다.”, “운명을 같이할 수밖에 없는 한 사회의 대중이 오도된 사고방식이나 정세판단을 하고 있을 때 그것을 깨우쳐야 하는 것은 언론과 지식인의 최고의 책임이자 의무이다.”, “언론과 지식인이 알고 있는 지식과 갖고있는 사상을 발표해야 할 때는 내일이 아니라 바로 오늘이다.”라고 누누이 말해왔다. 리영희는 “한 사회의 건전하고 양심적이며 창조적인 언론은 죽이고 살리는 것은 권력이 아니라, 언론인 자신이다”라고 밝혔다.      


“기자는 경제, 재계, 정계의 상층부에서 어울리는 동안 자기의 물질적 소속이 그 사회의 하층민중임을 망각한다. 수습기자로서 선배기자들의 무력과 타락과 민중에 대한 배반을 소리 높이 규탄하던 사람이 내일은 벌써 ‘골프는 결코 사치가 아니라, 건전한 국민오락이야’라는 말을 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되면 이 나라의 현 체제의 수익집단인 지배계층과 자기를 동일시하게 된다. 여기서부터 그의 의식구조와 가치관은 지배계급의 그것으로의 동화과정을 걷는다.”      


“차장/부장/국장에 이르면 ‘무료 해외여행’, ‘생활보조’의 혜택으로 이미 기자이기보다는 어떤 뜻에서 권력 측에 가까운 예도 드물지 않다. 기사 재료를 독점으로 준다는 미끼로 그 ‘죽음의 키스’를 받게 되고, 이권청탁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 폭력 앞에 무력해지고 만다. 그 지위가 되면 벌써 생각은 행정부의 국장/차관/비서관이니 국영기업체의 자리에 가있다.” 리영희의 일갈은 오늘날의 기자와 언론계에도 유효하다.



리영희가 한국 언론계에 남긴 것들     

1997년 11월 외환위기 이후 언론계에도 신자유주의 바람이 불었다. ‘기사 경쟁’ 아니라 ‘기업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독재 정권의 보호막 아래 안정적으로 기업 운영을 꾀했던 각 언론사들은 민주 정부 수립과 동시에 벌판에 내던져졌다. 그것은 민주적인 것 이전에 시장적인 것이었다. 공영방송조차도 시청률로 대표되는 시장 논리의 강력한 압박에 봉착하게 됐다. 언론의 가치는 정의가 아니라 상품의 영토에 귀속되기 시작했다. “언론사가 망한다”는 경계경보가 발령되는 순간, 언론사를 망하게 할 수 있는 일은 금지됐다. 그것이 진실보도라 할지라도.     


조직의 명운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면, 그 조직에 속한 개인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집단 전체가 달려드는 과업 앞에서 개인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자신의 지향과 요구를 잠시 미뤄 두게 된다. 그것이 싫으면 언론사를 그만둬야 한다. 현재 한국 언론의 사정이 딱 이렇다. ‘단독자’기자는 사라지고, ‘부속품’기자만 넘쳐나는 배경이 여기에 있다. 어느새 각 매체마다 정형화된 기자 타입이 분명해졌다. 기자마다 서로 다른 기사를 쓰는 것이 아니라 매체마다 다른 기사를 쓴다. 담당 기자가 바뀌어도 그 매체에 실리는 기사 내용은 다르지 않다. 매체가 기자를 그렇게 복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자 본연의 정신에 따라 독자적으로 사회를 바꿔나가려던 리영희의 기자정신이 빛을 발한다.     


리영희는 독서를 통해 취재의 바탕을 마련하는 기자였다. 대부분의 기자들은 고관대작과 술 마시며 흉금을 터놓으면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꿰뚫을 것이라 믿는다. 기자 리영희는 술 대신 책을 파고들었다. 정보와 지식을 따라잡으며 권력가/명망가/권위자들의 머릿속을 간파했다. 그는 지적 중심을 확고히 잡고 권력가들을 공략하는 독창적 기자였다. 시민사회에서 비롯한 기자의 뿌리를 잊지 않되, 그것을 단순히 대변하지 않고 한 발 앞서 권력과 긴장했다. 출입처의 경력에 기갈들지 않았고, 주요 출입처를 섭렵하는 길을 마다했다. 권력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악성 바이러스에 스스로를 노출시키지 않았다. 보는 눈이 넓으니 남이 보지 못한 사실의 연쇄 고리를 끄집어 냈고, 그것이 진정한 특종의 바탕이 됐다.     


경향신문이 창간 65주년을 맞아 신문 1면에 ‘기자윤리강령’을 실은 적이 있다. ‘기자윤리강령’은 한국기자협회가 공표한 일종의 기자 십계명이다. 기자들이 들고 다니는 기자수첩 첫 장에 인쇄되어 있다. 기자들은 누구나 기자윤리강령을 잘 안다. 강령에는 기자가 해서는 안 될 일과 해야 할 일 등 10가지의 금과옥조가 들어있다. 기자라는 직업은 사명감이나 보람 없이는 하기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만일 국민이 매일 기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면, 그리고 기자가 쓴 한 글자 한 글자에 독자들의 생각과 감성이 얹히고 그로 인해 한국의 문화와 역사가 1도씩 달라지고 있다면, 그만큼 심장이 요동치는 일이 또 어디에 있을까. 리영희가 꿈꾸던 기자의 모습 - 기자의 윤리를 충실히 지키면서 사실위주로, 권력자들의 반대편에서 약자를 대변하는 - 을 갖춘 언론인들이 절실한 시점이다. 제2, 제3의 리영희가 등장할 때 우리 언론계도 본연의 기능을 회복할 것이라 확신한다.                                                                                                                               

<참고문헌>     


1. 단행본     

- 리영희,「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두레, 1994).

- 리영희·임헌영, 「대화 :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한길사, 2005).

- 조유식, <리영희 그 독한 기자정신의 역정> 「월간 말」(1995).

- 김상웅, 「리영희 평전 : 시대를 밝힌 사상의 은사」(책보세, 2010).

- 강준만, 「한국 현대사의 길잡이 리영희」(개마고원, 2004).

- 리영희, 「역정-나의 청년시대」(창작과비평사, 1988).

- 리영희, 「인간만사새옹지마」(범우사, 1991).

- 리영희, 「동굴 속의 독백」(나남출판, 1999).

- 김경재, 「혁명과 우상: 김형욱 회고록3」(전예원, 1991).

- 리영희, 「자유인(自由人)」(범우사, 1990).

- 안철홍, “화제의 작가,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펴낸 리영희 교수”, 「월간말」(1994).

- 안수찬 외, 「리영희 프리즘 : 우리시대의 교양」(사계절, 2010).

- 김만수, 「리영희, 살아있는 신화」(나남출판, 2003)     


2. 언론     

- 2005년 11월 16일자 한국일보

- 2005년 11월 14일자 오마이뉴스

- 2008년 3월 4일자 아이뉴스

- 2006년 6월 28일자 한겨레 21, “사장님 그래도 됩니까?”

- 1989년 1월 1일자 한겨레신문

- 1988년 5월 15일자 한겨레신문

- 1988년 9월 15일자 한겨레신문

- 2011년 10월 5일자 경향신문 1면     


3. 인터넷     

- 네이버 백과사전 (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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