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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dy Jul 25. 2019

청년의 눈물


참 좋은 소재이긴 했다. 젊고 패기넘쳐야 할 청년의 눈물. 누가 그를 울게 만들었나. 어찌보면 어렵고 엄숙한 자리에서 터져나온 청춘의 격한 감정이 누구 때문인지, 누구를 향하는지 궁금하긴 했다.


대통령 간담회에서 "정권이 바뀌었지만 청년 문제는 달라진 게 없다"는 엄창환 청년정책네트워크 대표의 모습은 모두의 이목을 끌었다. 그는 간담회 이후 언론을 통해 "각 지역에서 어렵게 청년들을 위해 활동하는 분들이 떠올라 눈물이 나왔다"며 "내 눈물을 정치적으로 활용하지 말아달라"고 호소했다는데 글쎄. 내가 감수성이 모자란 것인지는 몰라도 그의 눈물에 쉬이 공감하기가 힘들었다.


"함부로 눈물을 흘리는 약한 심정으로 청년을 대표하나? 그런 감성적 태도로는 고단한 인생에 성공할 수 없다"는 이병태 교수의 꼰대질에 공감하는 게 아니다. "멀쩡한 젊은이가 정부에 대놓고 무언가를 해주기를 바라는 자체가 한심스럽다"는 정규재 주필의 훈계는 어른같지도 않은 어른들의 정신승리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들은 본인들이 자수성가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원서만 넣으면 합격하던 좋은 시대에 태어나 우리보다 훨씬 더 쉽게 좋은 자리를 꿰찬 것 뿐이다. 배울 것 없는 꼰대들의 헛소리를 심각하게 들을 필요는 없겠다.  


엄 대표는 부산 동아대 기계공학과를 2011년 졸업하고 청년과 지역을 연결하는 실험거점인 '심오한집'과 '부산청년들', 부산청년정책네트위크 지역단장을 거쳐 2017년부터 전국청년정책네트워크 대표를 맡고 있다. 지역에서, 또 청년으로서 주류(라고 하긴 뭣하지만) 사회와의 괴리를 많이 느낀 모양이다. 찾아보니 이 단체는 청년기본법 연내 통과를 주력으로 하고 있다.


청년기본법은 19세 이상 34세 이하를 청년으로 지정하고 국무총리로 하여금 5년마다 청년정책의 기본계획을 수립·시행하도록 하고 있다. 법은 중앙행정기관과 지방자치단체 소속 공무원 중에서 '청년정책책임관'을 지정하고, 이 사람은 청년 고용촉진과 일자리의 질 향상, 청년창업 지원, 청년 능력개발 지원, 청년 주거지원, 청년 복지증진, 청년 금융생활지원 등을 담당하도록 규정했다. 제정안은 청년단체와 청년시설에 대한 조세감면의 근거를 마련하고, 청년발전 유공자에 대한 포상과 청년정책에 대한 국회보고 의무 등도 규정하고 있다. 대통령령으로 '청년의 날'을 지정하며, 청년의 날이 포함된 달은 '청년의 달'로 정하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고 한다.


우리 사회에서 청년은 분명 소외 계층이다. 기성세대는 청년의 젊음을 부러워하고, 나라를 이끌어갈 기둥이라고 내세우지만 속내로는 어리고 어리석으며 부모의 품안에서 배부른 소리만 하는 풋내기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분명 개선해야할 지점이지만 내가 보기엔 청년기본법의 실효성은 0이다. 청년단체는 자꾸 일자리 정책의 하위 개념으로 청년을 넣지 말라고 하는데, '19~34세'의 가장 큰 관심과 현안은 일자리 아닌가? 청년보다 더 지원이 필요할 수도 있는 노인과 장애우, 기타 소외계층 지원책은 어쩌고? 재정은 한계가 있는데.


난 자꾸 청년기본법 내의 ' 청년단체와 청년시설에 대한 조세감면의 근거를 마련한다'는 구절에만 눈이 간다. 청와대 내부에서도 청년들의 민심 이반에 대해 관심이 많다지만 엄 대표의 눈물엔 정말 정말 공감이 안 간다. 내가 벌써 기성세대의 논리에 젖어버린건가? 청년 단체들은 과연 자신들이 청년들을 명확히 대표하고 있는지, 그럴 자격이나 깜냥이 되는지, 청년이 원하는 바를 제대로 캐치해 정계나 어른들에게 요구하고 있는지 되돌아봐야 될 것 같다. 청년이 아닌 청년 활동가만 대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도.


법과 정책을 새로 만드는 게 능사는 아니다. 청년 현안은 일자리와 주택, 복지, 여가, 입시 등 기존 제도와 겹치는 부분이 많다. 그렇다면 정부는 기존 정책을 어떻게 활용해야 진학과 졸업, 취업과 결혼, 육아에 신음하는 청년층에 도움이 될지 고민해야 한다. 그래야 고용과 일자리에만 치중해온 청년 문제 해결의 지평을 넓힐 수 있다. 무작정 판을 벌리기 전에 청년에 대한 철저하고 세밀한 분석이 선행돼야 하는 이유다.


청년은 명확한 세대 개념이 아닌 추상적인 이미지다. 몇 살까지가 청년인지 기준이 애매한 상황에서 청년은 ‘우리 사회의 미래’ 등으로 받아들여진다. 기성세대는 그런 청년의 젊음을 부러워한다. 나라를 이끌어갈 기둥이라 치켜세운다. 다만 속으로는 어리고, 어리석으며, 부모의 품 안에서 배부른 소리만 하는 풋내기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한 야당 지방의회 의원은 “청년들은 피시방에 온종일 있다”고 했다. 다른 여당 의원은 20대의 정부 지지율 하락 원인을 교육을 제대로 못 받은 탓으로 돌렸다. 여당 수석대변인은 “(현 20대의 중·고교 시절) 학교 교육이 거의 반공교육이었다”며 20대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보수적이라는 취지로 발언했다. 전직 청와대 참모는 “젊은이들은 여기(한국) 앉아서 취직 안 된다고 헬조선이라고 하지 말라. 신남방 국가를 가면 해피조선”이라고 했다. 


망언이나 실수가 아니다. 이념과 진영을 넘어 기성세대가 청년을 보는 시각을 여과 없이 보여줬다. 이들이 칭송하는 청년은 성공한 1%의 젊은이들이다. 간담회에 부르고, 각종 행사에 초청한다. 반면 나머지 99%는 계도해야 할 대상이다. 그러니 생색 내듯 던지는 청년 정책에는 진심이 없다. 당연히 성공할 수도 없다. 젊은이의 열화와 같은 지지로 탄생한 정부 아닌가. 충격과 자각이 모여 2003년 ‘청년실업 종합대책’ 이후 16년간 이어진 청년 정책 실패사가 이제 좀 끝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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