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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dy Jul 25. 2019

영어와 포장


지난해 3월 브리핑을 받아 치다 미국 대통령의 집무실을 oval office라고 부른다는 걸 처음 알았다. 아무것도 몰라서 '오바 오피스'라고 타이핑했다가 망신을 샀다. 리비아식 해법에서 CVID, CD, FFVD, CVC, 아그레망, 빅딜, 스몰딜 등 공부해야 할 용어가 많았다. 'PG 언제 내실거에요'라고 묻는 기자들 사이에서 애써 아는 척했다. Press Guideline의 준말이라고 최근에야 알았다. '별거 없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냥 청와대나 정부 입장이라고 해도 되는 거였다.


근데 최근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브리핑에서 나열한 end state / operational definition / no deal is better than a bad deal / nothing is agreed until everything is agreed / diplomacy is very much alive / formula / all or nothing / small deal / good enough deal / early harvest / undermine·underestimate / regrouping 가운데 일부는 도저히 왜 영어를 썼는지 이해하기가 어렵다. '충분한 수준의 합의'가 도대체 무슨 말인가. 빅딜을 고수하는 미국과 단계적 합의를 강조하는 북한 사이의 절충안이라고들 해석하는 데 과연 맞는 해석인지. 미국을 향한 메시지라고 남들 따라 고개를 끄덕이기엔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성완종 사태 때 검찰 티타임에 땜빵 들어갔는데 당시 담당 검사는 기자들에게 수수께끼 같은 말을 했다. 수사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그림을 그리듯이 묘사했다. 하나의 상자를 비유하며 이걸 끝내야 다음 상자로 넘어갈수 있다고 했다. 베테랑 검찰 기자들은 이걸 듣고 대략적인 수사 현황을 알아듣는다는 말에 멋지다고 생각했다.


근데 조금씩 생각이 바뀐다. 자꾸 영어로 포장하고, 어려운 용어를 쓰며 뭔가 있어 보이듯이 묘사하는 건 자신이 없다는 뜻이다. 생각이 정리되고, 상황이 마무리되며, 수사나 외교에 자신이 있다면 알릴 수 없는 내용을 제외하고는 분명하고 정확하게 말해야 하지 않을까. 나부터가 꾸준히 공부하고 노력해야 겠지만 그네들도 자신이 없으니 자꾸 둘러대고 포장하는 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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