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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dy Jan 18. 2020

바람직한 대변인의 조건


고민정 청와대 대변인이 4월 총선 출마를 위해 사퇴했다. 2년간 그가 해온 브리핑을 직접 듣고, 전화 통화를 하고, 밥도 먹으면서 정이 많이 들었다. 고민정 대변인은 매일 새벽부터 밤까지 이어지는 강행군을 견디며 대통령을 보좌해왔다. 그가 총선에서 원하는 성적을 거둬 우리 사회를 위해 좋은 역할을 하길 기대하고, 또 응원한다. 


대변인은 정부의 정보·선전의책임자다. 청와대 뿐 아니라 정부 각 부처, 공공기관 등은 대변인을 두고 있다. 정정당의 공보시스템은 좀더 복잡하다. 원내대변인과 청년대변인, 부대변인 등을 둬서 공보라인을 세밀화하고 있다. 정부 부처 등은 민감한 정보를 다룬다. 설익은 정보가 언론에 나가고, 여론에 공개될 경우 국가안보나 이익에 치명적인 위해를 초래할 수 있다. 그래서 정부는 대변인으로 창구를 일원화 하고 정제된 답변을 통해 각 부처 혹은 기관을 넘어 국가를 위한 방향을 모색한다. 대변인은 정보 전쟁의 최일선에서 기자들을 상대하고, 정보를 얼마나 어떻게 풀지 고민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대변인은 노련해야 한다. 능수능란하게 언론을 주도하며 적극적으로 공보에 임해야 한다. 대변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기사가 되고, 전 국민에게 VIP 또는 해당 부처장의 입장처럼 퍼지기 때문에 매사에 조심할 필요는 분명 있다. 다만 방어적인 전략만 구사하면 좀더 강조해야 할 국정 사안을 효과적으로 국민들에게 알리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기자와의 관계 설정, 또 조직 내부에서 어떻게 처신하고 행동할 것인지 분명한 철학이 없다면 그 대변인은 실패할 수 밖에 없다.


문재인정부 청와대 대변인은 총 세명이었다. 정치인 출신 박수현 대변인에 이어 기자출신 김의겸 대변인이 있었다. 아나운서였던 고민정 대변인은 이번정부 세 번째로 대통령의 입이 됐다. 그가 떠난 자리는 아직 공석이지만 곧 누군가 네번째 대변인이 될 것이다. 


박수현 초대 대변인


김의겸 전 청와대 대변인


청와대 출입기자로서 경험한 대변인들은 각자 스타일이 조금 달랐다. 박수현 전 대변인은 정치인 출신으로 기자들과 스스럼없이 지내는 친화력이 돋보였다. 김의겸 대변인은 원칙주의자였다. 평소 이성적인 논평과 함께 언론을 향해 날선 발언도 많이 했다. 고민정 대변인은 "앞서 두 명의 대변인의 장점을 배우겠다"는 말로 대변인직을 시작했다. 아나운서 출신 답게 현안에 대해 명쾌히 정리하고, 성실하게 대변인직에 임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누가 대변인을 맡든 본인의 성격에 맞춰 업무를 잘만 수행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대변인이 좋은 대변인일까. 우선 본인이 몸담은 조직의 이익을 최대한으로 생각하되, 유연하게 사고해야 한다. 청와대에도 뭔가 사안이 터졌을때 기자들의 요구사항과 청와대 내부 비서관실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경우가 많다. 대변인은 청와대 소속이니, 기자들에게 무작정 "해당 사안에 대해서는 국가안보에 의거해 알려드릴 수 없다"고 해버리면 편할 거다. 다만 대변인은 조율하는 자리다. 일방적인 정보 전달자로 기능한다면 대변인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거다. 기자들의 needs를 100% 만족할 수 없겠지만 어느 정도까지 충족하는 동시에 조직 내부도 설득하고 이해시켜야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다. 그러니 대변인은 언론의 속성을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언론과 척지지 않고, 그들을 잘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이 좋다.




지난해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역구와 비례를 합쳐 내년 21대 총선에서 260석 확보가 가능하다고 발언한 적이 있다. 언론 보도가 쏟아지자 부랴부랴 이재정 민주당 대변인은 입장을 냈다. "이 대표의 현장 발언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하에 우리 당의 원외 지역위원장들이 모두 분발해 최대한 좋은 성과를 거두기 바란다는 독려 차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일부 언론이 마치 민주당이 특정 의석수를 목표로 설정했다는 방향으로 보도하는 것은 발언의 경위와 맥락, 현장 분위기를 고려치 않은 보도로, 허위의 내용을 포함한 것에 다름 아니다”며 “이에 유감을 표한다”고 전했다. 그런데 도대체 분위기는 어떻게 파악해야 하나? 대표님이 해당 발언을 하며 한번 웃으셨으면 화기애애? 모두가 박수를 치고 호응하면 독려? 대표님은 농담을 했는데 청중의 분위기가 엄숙하면 이건 당췌 농담인지 진담인지?


이재정 의원이 좋은 대변인이었다면 발언 직후 재빨리 상황을 파악하고, 문자 그대로 나온 워딩이 있으니 발언의 경위와 맥락, 현장 분위기를 기자들에게 곧바로 전파했을 거다. 수십 수백건의 기사가 나오기 전에 상황을 깔끔하게 마무리 했을 터다. 그게 당을 대변하는 중책의 역할이다. 그러라고 대변인과 공보라인이 있는 것이다.


이해찬 대표가 참석한 행사는 오후 2시30분에 있었고, 현장에서 기자들이 발언을 모두 들었다. 민주당 공보실도 발언 그대로가 담긴 총회 인사말을 오후 4시1분에 발송했다. "황당무계하다"는 자유한국당의 논평은 오후 5시47분에 나왔다. 이재정 대변인은 오후 6시33분과 8시28분에야 비로소 논평을 냈다. 언론 탓을 하고 허위보도니 유감이니 했다. 대표의 말 실수를 기자 책임으로 돌린 것이다. 조율을 못하는 대변인, "우리는 잘못한게 없다"는 식으로 배짱만 부리는 대변인은 문제만 더 그르칠 뿐이다.




항상 공부하고, 부지런한 대변인이 필요하다. 기자들이 질문하기 전에 발생한 사안을 빨리 파악하고 내부 조직과 소통해 대응안을 머릿속에 그려둬야 한다. 그래야 기자들이 대변인을 신뢰하고, 조직도 대변인을 믿고 정보를 나눌 수 있다. 실수는 바로 인정하고, 노력하는 기자들에겐 좀더 서비스하려는 마인드가 있으면 좋다. 언론을 두려워하지 않고, 말솜씨가 유창하기 보단 진심이 담긴 논평과 브리핑을 하는 대변인이 종국에는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


대변인은 또한 솔직해야 한다. 노무현 정부 청와대 대변인을 지낸 윤태영씨는 저서 '대통령의 말하기'에서 이렇게 강조한다. "엄연한 사실을 은폐하거나 고의로 누락하려다가 나중에 사실이 밝혀지면 오히려 더 크고 거센 역풍을 맞게 된다. 청와대 대변인직을 수행하는 동안 이와 유사한 사례를 자주 겪었다. 최선의 방법은 가장 빠른 시점에 가장 먼저 솔직하게 사실대로 이야기하고 양해를 구하는 것"이라고. 


조시어니스트 백악관 대변인와 오바마 대통령.


조시 어니스트가 좋은 예다. 그는 불과 마흔의 나이에 백악과 대변인 자리에 올랐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그를 향해 "찬사를 받을 만한 사람이다. 터프하고, 기자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주지도 않으면서 항상 준비돼 있고 정중하며 우리의 생각과 정책, 비전을 여러분들과 최대한 많이 나누고자 했다"고 평가했다. 또 "그는 훌륭한 대변인일 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좋은 사람이었고, 나는 그가 진심으로 자랑스럽다"고 했다. 


어니스트 대변인은 고별사에서 기자들을 향해 이렇게 남겼다. "당신들이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국민이 알아차린다. 여러분의 일에 대한 열정이야말로 민주주의의 구심점이며, 바로 그것이 오바마를 더 나은 대통령이자 더 나은 공직자로 만들었다. 그건 여러분이 결코 우리를 살살 다루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평가했다. 그도 언론과 싸우고, 때로는 목소리를 높이는 게 일이었을 것이다. 다만 끝까지 언론의 역할을 강조하며 사회의 공기가 되달라고 주문했다. 백악관 출입기자들이 그를 역대 최고의 대변인으로 꼽은 것은 비단 그의 대 언론 서비스가 좋았기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대통령의 입이라는 막중한 책임감을 본인의 철학에 녹여 하루하루 성실하게 대변인직에 임한 결과였다.


모든 대변인이 조시 어니스트 같지는 않을 것이다. 현재 백악관 대변인인 스테퍼니 그리셤은 취임 후 한번도 언론 브리핑을 하지 않았다. 미국의 인기 작가들이 브리핑 개최를 조건으로 거액 기부를 약속하고, 전직 백악관과 정부 부처 대변인들이 브리핑 재개를 촉구했지만 묵묵부답이다. 본인은 백악관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지만, 대변인의 역할이 굳이 언론브리핑만 있는건 아니라고 항변하고 있다. 맞는 얘기지만 언론이 무서워서 피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스테파니 그리셤 미국 백악관 대변인(좌)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이제 곧 우리 청와대에도 새로운 대변인이 부임할 것이다. 기자, 아나운서, 정치인, 미디어 업계 출신 여러명이 후보군으로 거론되고 있다고 한다. 이번 대변인은 앞선 세명의 장점을 배우는 동시에 자신만의 강점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대통령의 진심을 가감없이 전달하되 그저 전달자에 머물지 말고 기획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집권 중반기를 맞아 총선 이후 흐려질 국정운영 동력을 다시 일으킬 수 있는 전략과 비전이 있는 사람이 대변인이 되었으면 한다. 때로는 언론과 싸우면서도 종국에는 함께 가야한다는 기치하에 노련하게 기자 혹은 여론과 접촉하는 전문가가 필요하다. 조직 실무자들이 주지 않는 정보를 직접 취재하며 어떻게 가공하고 그림을 그릴 것인지 능동적으로 사고하는 대변인이 정부의 성공을 좌우한다. 사명감으로 똘똘뭉친 스마트한 대변인의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가 춘추관 2층 브리핑룸을 가득 채우기를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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