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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추억을 머금고 살아간다

17년 만의 동학사 여행

by 작가 전우형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는 한없이 평화롭다고 한다. 먼 우주에서는 국경, 분쟁, 갈등, 인종, 종교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푸르고 찬란한 지구만이 보일 뿐. 그 광경은 우주비행사들에게 안도감과 더불어 허무함을 느끼게 한다. 무엇을 위해 그토록 아등바등 살고 있는 걸까? 무엇을 얻기 위해 그토록 남을 짓밟고 올라서려 했던 걸까? 멀리서 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우리가 자신의 삶을 우주에서 바라보듯 멀리서 볼 수 있는 시점이 있다. 바로 추억을 떠올려볼 때다. 긴 시간은 당시의 상황으로부터 거리감을 형성하고 자신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다른 사람의 눈길로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당시의 나와, 지금의 나는 많은 것이 변했을 것이다. 어쩌면 이름 외에 모든 것이 달라져있을지도 모른다. '그때는 내가 왜 그랬을까? 뭐 그리 심각하고 용서할 수 없는 일 투성이었을까?' 추억 속의 그림은 아름답고, 그래서 용서할 수 없었던 것도 용서가 된다. 그 바탕에는 수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넓어진 내 마음이 있다.


추억의 영향일까? 그런 용서와 이해, 수용을 바탕으로 사랑을 되찾고 나면 현재의 갈등도, 분노도 사그라들고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당시의 아름다운 감정이 현재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일까? 그래서 우리는 동학사를 다시 찾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가을의 동학사는 추웠지만 그 추위를 녹여줄 가족들의 온기가 옆에 있었다. 아내의 손이 내 호주머니에 있었고 막내는 힘들다며 업히곤 했다. 딸기 사탕 같은 이상한 간식은 모두에게 버림받았지만 '바로그집' 떡볶이는 향수에 젖은 느끼함을 여지없이 선사해주었다. 두 사람이 2인분을 먹지 못하니 다이어트 음식으로 딱이라는 것이 내 지론이다. 느글거릴 정도의 치즈향에 이 정도면 됐다 싶다가도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면 다시 생각나는 것이 그 집 떡볶이의 묘미다. 마치 적절한 거리가 필요한 사람과의 관계와 똑 닮았다.


동학사는 아내와의 첫 데이트 장소였다. 정식으로 사귀기 전이었고 나는 전날의 숙취 탓에 컨디션이 엉망이었지만 같은 방향을 보며 걷던 4월의 동학사는 풋풋한 꽃내음과 풀내로 가득 차 있었다. 점심으로 먹은 산채비빔밥에 제대로 체한 탓에 나는 한동안 허리를 펴지 못했고 첫 만남에 그런 모습을 보이는 나를 재밌다는 듯 쳐다보는 아내의 표정이 떠오른다. 기념품샵에서 연보라색 부채를 선물했고 그 부채는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오랜 시간이 흘렀고 아내와 나는 연인에서 부부로, 또 부모가 되었다.


기억은 추억을 머금고 살아간다. 동학사는 나에게 첫 연애의 풋풋한 감정을 가득 담고 있는 곳이다. 아내와 함께 걷던 그 길은 겹겹이 쌓인 시간을 통과해 나를 17년 전의 그 장소로 데려가 주었다. 20살의 어린 그때는 모든 것이 새롭고 흥미진진했다. 사랑을 몰랐기에 사랑에 대한 기대가 컸고, 그런 감정이 무엇인지 이름 붙이지 못한 채 무작정 아내를 만나겠다며 버스에 올랐다. 사랑은 내가 가보지 못했던 곳으로 나를 이끌었고 동학사는 그중 첫 번째 여행지였다.


무슨 말을 나누었는지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긴장했었고 가만히 걸음을 내딛는 것조차 어지러웠지만 심장의 두근거림과 가벼운 어지럼증조차 기분이 좋았다. 구름을 딛고 선 기분. 바닥과 발 사이에 특정할 수 없는 공간이 존재하는 기분. 어떤 때는 깊이, 어떤 때는 얕게, 매 걸음이 다르고 조심스럽고 어쩔 줄 모르게 되는 기분. 시야가 수직으로 흔들리고 가끔 공중에 붕 뜨는듯한 기분. 사랑에 처음 빠졌을 때의 기분이었을까?



당시의 동학사는 봄이었고, 올해의 동학사는 가을이었다. 스무 살에 바라본 봄의 동학사와 삼십 대 후반에 접어드는 지금 바라보는 가을의 동학사는 다르면서도 비슷했다. 자연에 비해 인간의 수명은 짧고, 변화의 폭은 크다. 아무렇지 않게 나를 맞아주는 동학사길을 이제는 달라진 내가 걷고 있다. 변해버린 것이 단지 몸무게와 나이만은 아닐 것이다. 세월은 나를 차분하게 만들었고 모난 부분을 둥글게 깎아주었다. 어쩌면 나는 나와 더 어울리는 시기에 이곳을 다시 찾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단풍도 자취를 감춰가고 있었고, 그에 비례해 낙엽은 점점 더 쌓여가고 있었다. 나무 그늘이 시원하던 계절이 가고 오후의 햇살이 싸늘함을 걷어내지 못하는 시절이 왔다. 입동(立冬)이 지났으니 추워질 만도 하다. 겨울은 올해 초에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다음 겨울이 오기 전에는 끝나길 바랐던 코로나는 여전히 위세가 맹렬하다. 그 차가운 바람으로부터 한국 사람들은 그나마 따뜻한 계절 속에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마스크를 쓰기 위해 다시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야 했던 부적응의 기간이 지나 이제는 자연스럽게 마스크를 두르고 집 밖을 나선다. 코로나 시기에 적응해버린 것은 반가운 일일까, 불행한 일일까? 사람은 좋은 것에도, 나쁜 것에도 잘 적응한다. 적응에 성공해야 덜 괴롭고 덜 불편하다. 하지만 어떤 것들은 물들기 전에 멀리 밀어내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코로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물리적 거리를 벌려두게 했지만, 정말 고통스러운 것은 정서적 유대의 상실이다. 코로나보다 더 무서운 바이러스가 인간관계에는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당연함'이다. 시간을 걸어가는 것이 세월을 쌓아 산고개를 하나씩 넘어가는 것이라면, 두 사람의 꼭 잡은 손이 떨어지는 순간은 산 중턱을 오르다가 숨이 턱끝까지 차오를 때일 것이다. 힘들 때마다 나는 스무 살의 동학사를 떠올리곤 한다. 그때 나는 어떤 마음으로 아내를 대했던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풍화되는 것도 있지만 어떤 것은 더욱 선명해져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초심'과 '추억'이다. 반질반질하게 공들여 닦지 않으면 먼지가 쌓이고 닳아 헤진다. 당연함을 이기는 힘은 먼지 쌓인 사진첩을 펼쳐보는 부지런함에서 나온다.


긴 시간 속에 관계는 편안해지고 무던해지지만 그 안에도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소중함이 존재한다. 사랑의 모습은 시기에 따라 변화되지만 그 바탕에는 상대방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있다. 그것이 사랑의 초심이었고, 추억은 초심을 기억하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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