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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내 주위엔 만만한 사람이 없지?

아직 이유를 모르는구나. 그건 말이야...

by 작가 전우형

말 잘 듣고 고분고분한 생명체는 없다.


그런 생명체가 존재할리 없다. 두 뼘 길이도 안 되는 흰둥이 치와와도 고분고분함과는 거리가 멀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 따위가 제 세상처럼 곳곳을 휘젓고 다니는 요즘이다. 하지만 치와와도 고분고분해질 때가 있다. 간식이 눈 앞에 아른거릴 때나 원하는 것이 있을 때면 평소의 오만하고 도도한 모습과 다른 모습을 보인다. 다소곳한 표정으로, 양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한쪽 앞발을 살짝 든 상태로 그 큰 눈을 끔뻑이며 나를 바라볼 때도 있다. 언제든지 '손!'이라는 명령어에 응할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를 내게 보내는 것이다.

강아지 치와와 기분좋은 표정.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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턱 밑이나 가슴, 배 등을 살살 긁어줄 때도 마찬가지로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뒤로 벌러덩 돌아눕는다. 계속해달라는 것이다. 눈을 살짝 감은 채 그 순간을 즐기기도 하고 입 끝이 미묘하게 말려올라가 웃음을 자아내기도 한다. 하지만 눈곱을 떼어주려 할 때나 이를 닦을 때, 발톱을 깎을 때는 짤 없이 객기를 부린다. '나 그거 싫어!'라는 말을 온몸으로 표현하며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거나 온몸을 비틀어대기도 한다. 물론 그런 투정 섞인 객기 따위 아랑곳하지 않는 주인에게 온갖 것들을 당해야만 하는 입장이지만.




고분고분함을 선택한 사람들


한낱 미물이나 생명체도 이럴진대, 사람은 오죽할까. 원래부터 고분고분하고 말 잘 듣는 사람은 없다. 관계를 맺어가는 여러 가지 방식 중 하나로 고분고분함을 선택한 사람들이 있을 뿐. 나 역시 구분하자면 내성적이랄까, 조용조용하달까, 가끔은 회의자리에 참가하고 있었는지조차 모르다가 "너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라고 느낌표인지 물음표인지 모를 질문을 받을 '고분고분한 사람'의 카테고리에 포함될 수 있겠다. 이런 삶의 방식이 철저히 자의에 의한 선택이었는지, 살다 보니 그렇게 되어버린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존재하겠지만, 고분고분함을 선택한 배경은 대략 몇 가지로 압축될 수 있을 것 같다.


1. 싸우는 것이 싫다.


첫 번째 이유는 싸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다. 주먹이 오가는 싸움이든, 말싸움이든 가급적이면 싸움을 피하는 편이다. "싸움을 좋아서 하는 사람도 있어?"라고 따져 물을 수 있겠다. 싸움을 즐기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테니(그렇겠지!...?).


그들의 이야기 속에는 각자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 "잘못은 상대방이 먼저 했고 나는 '피해자'다. 시비는 상대방이 먼저 걸었고 나는 '정당방위'였다. 고로 나는 '억울'하다. 싸우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싸울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싸움이란 결국 국경을 넘어오는 이민족에 대한 항쟁이며 '자존심'이란 마지막 보루를 지키기 위한 투쟁이다. 이혼상담받으러 온 부부처럼 그들의 관계가 결국 파국에 도달한 것은 언제나 '항상 내 맘도 몰라주는' 상대방의 탓이다. 그래서 싸움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어도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에 꽤 자주 처하는 사람은 많다.


그런 메커니즘은 나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간혹 '저걸 확 죽여?' 하고 진지하게 고민할 때도 있지만 실행에 옮기는 일은 드물다. 싸움 자체도 싫지만 그 이후에 불편해지는 상황이 나에게는 더욱 달갑지 않기 종류의 고통이다. 물론 나 역시 도저히 참고 넘기지 못하는 몇몇 상황이 있다. 예를 들면 시끄럽게 소리 지르는 것이다.


우리 집에 서식 중인 몇몇의 생명체 중 유독 목소리가 큰 둘째가 있다. 그래서 그 녀석은 나와 갈등이 가장 잦다. 아직은 내가 혼을 내고 있지만 크는 속도를 보면 조만간 나를 위에서 내려다볼 판이라 내가 '깨갱' 하게 될 날도 머지않았지만. 아이가 자유분방하고 구김살 없이 자랐으면 하는 바람에도 불구하고 습관적으로 소리 지르는 것은 나와 공존할 수 없는 삶의 방식이다. 어긋난 톱니를 맞춰가는 데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리고 있으며, 앞으로도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여전히 그는 틈나는 대로 소리를 빽빽 질러대고 있으며, 나는 주먹을 불끈 말아 쥔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예전보다는 덜해졌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이 사는 것은 '원래' 어렵다.'라고 하는 것 같다.


2. 그냥 져줄 때 돌아오는 이득에 익숙해졌다.


고분고분함을 선택한 다른 이유는 그것으로 얻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이득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래 후술 하겠지만 타인의 말을 경청하고 일리 있는 것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만으로도 얻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소득이 있다. 어느새 나는 그런 방식에 익숙해졌고 그래서 더더욱 싸움에 말려들지 않으려 노력한다. 하지만 그런 이유들로 내 주변에는 만만한 사람이 없다. 하나같이 자기주장이 강한 존재들. 심지어는 사람뿐 아니라 강아지마저도.




어째서 내 주변에는 만만한 사람이 없을까?


언젠가 내 주위에는 왜 하나같이 드센 사람들뿐일까 고민에 빠진 적이 있었다. 왜 내 주변에는 만만한 놈이 없을까? 내가 세게 나가지 않아서 그런 걸까? 상대방을 거칠게 몰아붙이지 않아서 그런 걸까? 물론 나도 소리 지를 줄 알고 성질도 부릴 줄 안다. 고분고분한 척할 뿐이지 속내는 꽤나 이기적이다. 하지만 결국 내가 입을 다무는 이유는 싸우고 고집부린 이후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이기도 했다. 사방을 가득 채울 불편한 공기는 숨이 막혔고, 내 마음대로 밀어붙였을 때 돌아올 뒷감당도 두려웠다.


1. 지랄 맞은 공감능력


나도 모르게 다른 사람의 생각에 '공감'해버리는 탓도 있었다. 인간관계에 있어 공감의 중요성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지만, 나처럼 자동으로 공감이 '되어버리는' 것도 당혹스럽기는 매한가지다. 왜 살다 보면 때때로 투쟁에 나서야 할 때도 있지 않은가? 싸움실력은 적개심의 총량에 비례하고 말싸움은 일단 상대방을 까야 이기는 법이다. 하지만 나는 일단 상대방의 말을 '말도 안 되는' 것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잘 되지 않는다. 특히나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일들에 있어서는 적개심에서 아예 밀려버리고 만다. 그런 고로 나는 종종 말싸움에서 지거나 말문이 막히는 일도 있었고, 아마도 지는 것이 싫은 탓에 싸움 자체를 회피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언제부터인가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에는 '절대'가 배제되어 있었고, 내게는 절대 맞는 말도, 절대 틀린 말도 없었다. 예를 들어 고조선의 '8조법'에 언급된 살인, 강도, 절도 등의 범죄는 분명 나쁜 것이라는데 이의는 없지만, 죄질에 있어서는 각자의 해석이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각자에게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고, 그 이유는 다른 사람의 납득 여부와는 별로 상관이 없었다. 그러니 상대방과 싸워봐야 무엇하겠는가. '맞는 말'을 형성하는 지분 중에는 당사자의 마음이 99%인 것을.


2. 알고 보면 '상성' 탓


결국은 '상성' 탓이라는 다른 결론도 있었다. 나의 주변에 만만한 사람이 없는 이유는 만만하지 않은 사람들과 내가 상성이 잘 맞기 때문이었다. '만만하다'는 말이 유사한 특징을 지닌 분들께 기분 나쁘게 들릴 수 있으니 '굳이 사사건건 이기려 들지 않는'정도로 해석하면 되겠다. 그렇다면 '만만하지 않다'는 말은 '자기주장이 강하고 목소리가 큰 사람들'정도로 볼 수 있겠다. 그들의 특징을 객관적으로 짚어내었다기보다는 그저 내가 그렇게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살다 보면 이런 사람도 만나고, 저런 사람도 만나기 마련이지만, 그중에서도 관계가 깊어지는 사람들은 따로 있는 것 같다. 결혼상대가 그동안 추구해왔던 이상형과 괴리가 상당한 경우가 있는 것처럼, 유사한 종특을 지닌 사람들끼리는 의외로 상성이 좋지 않을 때가 많다. 예를 들어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들이 만나면 서로 본인 얘기만 하다가 끝장이 난다. 때때로 한쪽이 말싸움에 지쳐 제풀에 나가떨어지더라도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앙금이 남는다. 그러니 관계가 더 진전될 확률이 낮다. 하지만 고분고분한 사람들은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을 만나도 대개, 웬만하면 고개를 끄덕여주고 그들의 생각에 동조해주는 경우가 많다. 하다 못해 반박을 하더라도 일단 들어주고 나서 꽤나 조심스럽게 '그런데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시작하기에 무자비한 방어기제가 튀어나올 확률을 줄여준다. 불필요한 갈등이나 앙금의 소요도 상대적으로 적고 그래서 누구와도 '대화'가 된다. 대화가 성립하려면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모두 필요하기 마련이다.


조용한 두 사람 사이에서도 대화가 통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말이 적은 사람은 대체로 쓸데없는 말을 아끼고 속으로 조용히 생각하는 것을 즐기는 경우가 많다. 그런 두 사람이 만나면 서로 조심하고 접근을 꺼리다 보니 접점을 만들어내기가 의외로 쉽지 않다. 누구 한 사람은 말을 걸어야 거기에 동조해주든 반문을 던지든 하면서 '공기라는 매질을 통해 전달되는 특정 주파수의 진동 따위'가 오갈 것인데, 다른 사람의 세상에 좀처럼 끼어들지 않는 사람들끼리는 경계에도 고요함만이 맴돈다. 말하는 사람이 없고 듣는 사람만 있어도 대화는 성립되지 않는다. 서로 건드리지 않으니 싸울 일도 없지만 관계가 깊어지기도 어렵다.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인연들 중에서 그런 관계가 깊어질 확률이 드물다는 것이 올바른 해석일 수도 있겠다.


그러니 옳고 그름의 가치판단보다는 그저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이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그리고 의외로 나와 잘 맞는 사람은 나와 '같지 않은'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런고로 주변에 만만하지 않은 사람들이 즐비한 이유는, 내가 그런 사람들과 상성이 잘 맞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3. 부족한 실행력


주위에 만만한 사람이 없는 또 다른 이유는 실행력이 부족한 탓일지도 모른다. 선택을 내리기 전에 확실한 무언가가 필요하거나, 안개에 많은 것이 가려진 상태에서는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편이라면 실행력은 분명히 떨어지기 마련이다. 신중함은 분명 쓰임새가 많으며, 위험하고 크리티컬한 업무를 처리하는 직종에게는 필수적인 능력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과하면 독이 되고, 과도한 신중함 역시 일상적인 상황에서는 오히려 시간을 지체시키거나 쉬운 일도 어렵게 하는 역효과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여러 선택지 중에는 어느 쪽을 선택해도 상관없는 일들도 많다. 하지만 그런 일조차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면, 심지어는 결정을 내리고 나서도 미적미적하며 실행을 미룬다면 어떻게 될까? 결과가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발걸음이 묶이는 것은 나의 오래된 약점 중 하나였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에게 답답함이나 체기를 유발하거나, 그깟 일쯤 나서서 해결해주고픈 욕구가 치밀어 오르게 했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것들이 모든 '고분고분한' 사람들에게 똑같이 적용되지는 않더라도,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은 사람은 다른 가능성들에 생각보다 많은 고민 비용을 지불하기 쉽다. 어떤 일들은 그냥 해버리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데, 그런 일들이 당사자에게는 상당히 곤혹스럽고 어려운 일로 느껴지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누군가에게는 별 것 아닌 도움이 꽤나 크게 다가온다. 관계는 폐를 끼치는 과정에서 깊어지기도 하고, 의외로 사람은 자신이 무언가를 채워줄 수 있는 관계를 선호한다고도 한다. 누군가의 진심 어린 감사는 상대방에게 자신감을 심어줄 좋은 촉매제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들이 서로에게 강력한 자력을 발휘하는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귀결일 수도 있다. 물론 부작용도 있겠지만 즐겁기만 한 관계는 '비정상'이다.




알고 보면 '실속파'


말수가 적고 조용조용한 사람들은 매번 손해만 보고 산다고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누구나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면이 존재하기 마련이며, 그것은 '고분고분함'을 선택한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먼저 나서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칭찬과 인정의 제스처를 취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들도 의외로 많다. 자신이 하고 싶은 방향에 대한 의지가 강한만큼, 그들은 내버려 두면 많은 일들을 해내거나 의외의 성과를 내기도 한다. 때때로 그런 일들은 실행력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어려운 일일 때도 있다.


달리는 말에 올라타면 내가 원하는 방향과 속도를 100% 맞출 수 없더라도 그 에너지에 편승해 힘들이지 않고도 어딘가에 도착할 수 있다. 그러니 주위에 다소 조용하고 내성적으로 보이거나 존재감을 뿜어내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사회생활에 대해 걱정스러워하거나 안쓰러워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타인과의 적절한 관계 속에서 자신을 보호하며, 큰 갈등이나 불화는 피해 가면서도 자신의 지분은 적절히 챙겨가는 '실속파 관계 9단'일지도 모른다.


가끔 이런 내가 답답하거나 무시당하는 느낌이 든다면


물론 유사한 종특을 가진 사람들에게 간혹 닥쳐오는 위기 상황들이 있다.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내가 보자기로 보이나?!"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날이면 스스로에게 화가 나거나 자괴감이 치솟기도 한다. 만약 그런 기분들로 인해 힘든 경우를 겪고 있다면 좋은 방법 한 가지를 알려드리려 한다.


나의 경우에도 그런 날은 온종일 화가 나고 복잡한 감정들로 마음속이 우중충해졌지만 요즘은 그런 날이면 글을 쓴다. 사실 글이라기보다는 넋두리를 글로 풀어내는 것에 가까울 수도 있다. 'Writing Therapy'와도 유사한 이 방법의 골자는 글 속에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여과 없이 담아내는 것이다. 왜 상대방의 말이 '말이 안 되는지'를 조목조목 쓰다 보면 고소하기도 하고 대단하지도 않은 것에 날을 세우려 했던 내가 우습게 여겨지기도 한다. 한마디로 싸움에 대한 '김이 빠지는' 것이다.


물론 이런 글을 상대방에게 보여주는 것은 좋지 않다. 나 혼자 고소해하거나 즐거워하면 그것으로 되었다. 이런 방식은 프로 비판러였던 링컨도 즐겨 쓰던 방식이라고 하니 누군가에게 화딱지가 나거나 비난을 퍼붓고 싶을 때는 그 비난을 글로 잔뜩 써 내려간 후 상대방에게 전달하지 않고 파기해버리는 방법을 써보기 바란다.


분노는 독 묻은 화살과 같고, 그 화살은 상대방에게 쏘아지지 않으면 오히려 내 마음이 상하게 한다. 하지만 우리는 쉽사리 상대방과의 관계를 내려놓기 어려운 입장에 있을 때가 많고, 독화살을 상대방에게 쏘아 보내는 것 역시 지혜로운 방법은 아닐 것이다. 그런 진퇴양난의 경우에 선택할 수 있는 방법으로 분노를 글로 표출해버리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독 묻은 화살은 어느새 나에게도 남지 않고 상대방에게도 전달되지 않는 '지면'이라는 제3의 공간으로 사라져 버린다. 상대방을 비난할 에너지는 글 속에 모두 담겼고, 이제는 그 사람을 다시 만나더라도 이전처럼 한 방 먹이고 싶은 욕구를 도저히 참아내기 어려울 정도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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