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해졌다. 창문을 살짝 내린 채 달릴 수 있을 정도로. 두터운 패딩점퍼가 부담스럽게 여겨질 정도로. 약간 춥지만 그렇다고 발끝이 아리지는 않은 날씨. 포근함의 끝자락에는 겨울 조각이 걸려 있다. 손을 흔든다. 이제는 조금 덜 추웠으면 하는 바람으로. 호 하고 바람을 분다. 겨울 조각을 날려버리려고. 하지만 이내 싸늘함이 찾아온다. 부르르 떨며 지퍼를 턱밑까지 올린다. 내가 변덕스러운 건지 겨울이 변덕스러운 건지 알 수 없다.
내가 아는 건 하루 24시간 동안 벌어지는 일의 극히 일부임에 분명하다. 일부를 통해 전체를 판단하는 것은 편평한 지구 위에 선 채 한정된 하늘만을 볼 수 있었던 우리 인간의 고유한 생각 방식일지도 모른다. 나를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그리고 나를 기준으로 상대방을 생각하는 것. 생각의 기준을 잠시 상대방에게 옮겨두는 공감의 기술이 그와 나의 거리를 우주의 좁쌀만큼 줄여줄 수 있다고 해도, 결국 우리는 서로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고야 만다. 서로 다른 존재. 이성보다는 사랑. 결국 명백히 존재하는 영혼의 거리를 좁힐 방법은 '사랑' 뿐일지도 모른다.
사랑은 대체 뭘까? 나조차 사랑하지 못하는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그리움 역시 사랑의 일부일까? 나만을 바라봐 주었으면 하는 마음은 사랑이라 이름 붙일 수 있을까? 누군가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 느낄 수 있을까? 커피를 마실 때 생각나는 사람. 그저 잘해주고 싶은 사람. 주책없이 자꾸만 떠오르는 사람. 좁아터진 시내버스 옆자리에 앉아도 불편하지 않은 사람. 힘들 때 기대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줄 수 있는 사람. 짓궂은 농담도 통하는 사람. 손을 잡고 걸어도 부끄럽지 않은 사람. 함께 누군가를 욕할 수 있는 사람. 내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 사람.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른 사람. 운전대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 그가 내 곁에 있다면, 혹은 그런 누군가가 떠오른다면 나는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일까?
촌스런 말일지 모르지만 '완벽한 사랑'은 그런 것을 가능케 할지도 모른다. 사랑을 몰랐던 사람에게도 사랑에 대한 통찰이 피어나고, 사랑을 믿지 않던 사람도 사랑에 대한 믿음이 싹트는 그런 일들이.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런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저 평범한 사랑을 하기로 했다.
한 사람은 내게 사랑을 알려주었고, 그 사랑이 나를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그 사람은 지금 옆에 없지만 그의 사랑은 언제나 옆에 있었다. 보이든 보이지 않든 언제나 존재했던 고유하고 독특한 반짝임. 그 가느다란 빛줄기에 기대어 밤길을 걷는다. 한 글자씩 써 내려가는 손편지처럼 우리는 매일 새로운 사랑을 써 내려가고 있다. 그래서 사랑을 모르는 사람도 사랑에 빠질 수 있고, 사랑받을 수 없다고 스스로를 단정지은 사람에게도 사랑은 찾아온다고 믿는다. 문을 두드리는 그에게 커피 한 잔을 대접할 용기만 있으면 된다.
하지만 '완벽한' 사랑을 할 수도, 알 수도 없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고야 마는 거리 때문이다. 그 공간은 결코 채워지지도, 채우려 해서도 안된다. 상대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아버린 뒤에는 결코 사랑을 시작할 수 없는 것처럼. 그의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을 만큼 사람은 깨끗하지도, 아름답지도, 마음이 넓지도 못하다.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그의 일부에 지나지 않고, 그 일부마저도 때로는 버겁고 질려버릴 만큼 힘이 든다. 완벽한 사람이 없는 것처럼 완벽한 사랑도 없다. 완벽한 사랑은 하려 해서도, 받으려 해서도 안된다. 완벽함에서 벗어날 때 사랑은 비로소 숨을 쉰다.
바람이 통해야 썩지 않는 것처럼, 꽉 잡은 두 손은 힘이 들고 아프다. 힘들고 아픈 사랑은 오래가지 못한다. 같은 곳을 보는 날도, 다른 곳을 보는 날도 있다. 나는 그를 보지만 그는 좀처럼 나를 바라봐 주지 않을 때도 있다. 섭섭해도 어쩔 수 없다. 그는 다시 당신을 보기 위해 잠시 다른 곳을 보는 중이다. 당신에게 선물할 꽃다발을 찾고 있을 수도 있지만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루 24시간을 당신만 떠올릴 때도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날이 더 많다. 계속해서 당신만을 생각했다가는 머리가 터져버릴지도 모른다. 한눈을 파는 것이 아니라 잠시 딴생각을 하는 것뿐이다. 결코 당신이 보고 싶지 않거나 사랑이 식어서가 아니다. 그의 머릿속은 그렇게 심각하지 않다. 그는 단지 심하게 배가 고파 땡초 김밥에 라면 국물이 먹고 싶은 것뿐이다.
'너 없는 나는 아무것도 아닌 걸까? 그렇지 않아. 네가 없어도 나는 나야!' 내가 그를 보고 싶어 하는 것만큼 그도 나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도, 왠지 배가 아프고 속이 상해도. 하지만 괜찮지 않을까. 그가 '지금' 내 옆에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 곁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라 했다. 그를 사랑할 수 있다면 누가 더 보고 싶어 하는지 비교하고 잴 필요가 있을까? 불안해하고 초조해할 이유가 있을까?
편안한 마음으로 낮잠이나 자면 돼지
사랑이 그러하듯, 이별의 이유도 어느 한 사람에게 있지 않다. 그가 내 곁을 떠난 것일 수도 있지만, 내가 그를 위한 작은 공간도 내어주지 않은 탓일 수도 있다. 완벽한 사랑을 요구하며 그를 지치게 만든 것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수없이 문을 두드리고 기다리던 그는 결국 허기지고 지친 마음으로 뒷걸음질 쳤을지도 모른다. 혹여라도 당신이 문을 열고 나와줄 것을 기대하며. 하지만 당신은 뒤늦게 그를 부르는 작은 바람마저도 무시했을지도 모른다. 늘 그 자리에 있었지만 그뿐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담장 밖의 세상은 분리되어 있었으므로.
사랑을 찾는 것은 결국 '사람'을 찾는 것과 같다. 세상 속으로 한 발짝 내딛는 것이 두렵더라도 문을 걸어 잠그지는 않았으면 한다. 이도 저도 싫다면 혼자에 익숙해지는 것도 방법이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자꾸 담장 밖에서 들려오는 사람 소리에 귀가 쫑긋 세워진다면, 문을 살짝 열어두었으면 좋겠다. 커피를 내리거나 고기를 구우면 더욱 좋다. 사람 냄새가 나는 곳에 사람은 문을 두드리기 마련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