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까지가 '사랑'이고, 어디서부터가 '통제'일까?
사랑과 통제, 그 미묘한 간극에 대하여
사랑과 통제, 조언과 잔소리. 부모와 자식 간에 이건 '무엇'이라고 정의 내리기 어려운 말이나 행동들이 있다. 부모는 사랑이라 말하고 자식은 통제라고 말한다. 부모는 너를 위해서라 말하고 자식은 나 좀 그만 내버려 두라고 말한다. 그렇게 조언은 잔소리가 되고 사랑은 통제가 된다. 어디까지가 사랑이고, 어디서부터가 통제일까? 두 단어의 영역은 구분해내기 어렵다. 그것은 받아들이는 사람과 행하는 사람, 때로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체감하는 정도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참 어려운 부모와 자식 관계
삶의 가이드라인은 누가 정하는 것이 맞을까? 이 문제에 대해 의견이 분분할지 모른다. 살면서 해도 되는 것과 해서는 안 되는 것. 이런 논의는 '만 19세가 되기 전까지는 음주와 흡연을 해서는 안된다.'와 같은 사회적 규칙을 지키는 것과는 결이 다른 문제다. 사회적 규칙은 그 사회를 살아가는 이상 선택의 여지없이 지켜야만 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불이익을 통해서라도 준수하도록 강제한다. 하지만 삶의 가이드라인은 가정 또는 사적인 영역에서 형성되고 때때로 강제성을 갖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들이 더 많다. 즉 논의와 합의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의 삶을 '간섭'하는 의도가 부모의 개인적 취향이나 호불호가 아닌, 순수하게 자식의 미래와 건강, 안녕, 혹은 직업과 같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삶의 범위를 제한하는 문제는 결국 상호 '동의'의 문제로 이어진다.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이 '전무'한 채로 태어난 아이를 최소 수년에 걸쳐 부모가 모든 것을 챙기며 키워온 탓에, 부모는 그토록 어렸던 자식의 그림자를 쉽게 떨쳐내지 못한다. 어느 정도 나이가 차서 스스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시기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모에게 자식은 여전히 어리고, 부족하고, 서툴러 보인다. 모든 것이 아슬아슬해 보이고, 미래를 설계할 능력도 없어 보인다. 또한, 부모는 누군가의 자식으로서 그런 시기를 먼저 경험해본 탓에 스스로의 시행착오를 밑바탕 삼아 자식에게 조언을 하고 적극적으로 개입하거나 통제하려 하기도 한다. 물론 이는 다 '자식이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시기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시기를 설정하는 기준은 아무래도 부모보다는 자식의 성장 정도를 따른다. 혼자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시절에는 분명 부모가 모든 것을 대신해주고 챙겨주어야만 한다. 그것을 등한히 한 부모는 적절한 보호와 양육을 제공하지 않은 것이고, '방임'이며 '학대'가 된다. 하지만 자식이 성장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게 되면 부모는 적극적으로 삶의 주도권을 자식에게 넘겨주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가 삶의 궤도를 스스로 찾아갈 수 있도록 잡고 있었던 끈을 조금씩 풀어주는 것이다. 그때부터는 부모라고 해도 자식에게 강제로 무언가를 지키도록 '강요'할 수 없으며, 결국 이것은 '삶의 주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과도 연관된다.
결국은 '존중'
결국 '사랑'과 '간섭'의 차이는 자식의 의견을 존중하는가 존중하지 않는가의 문제로 연결된다. 부모가 생각하기에 아무리 좋은 삶의 방식이라고 하더라도 결국 그 방식을 실행해야 하는 사람은 자식이다. 방법론에 있어 자식이 다른 의견을 갖고 있다면, 결국 부모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의견을 '존중'해주는 것뿐이다. '설득'해볼 수는 있어도 '강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강제'를 선택하는 부모가 있다. 그래서 갈등이 일어나고 어떤 갈등은 정리되지 못한 채 평생의 부모 자식 관계에 상처로 남기도 한다.
부모는 종종 자식의 의견이 나와 '다른' 것을, 여전히 인생 경험이 부족하고 서툴다는 가정하에 '틀린' 것으로 여기고 존중하지 않는다. 이것은 인생의 주체자로서의 자식의 선택을 부모가 스스로 무시하는 것과 같다. 자식이 무시당하는 상황을 반기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부모 스스로가 자식에게 그런 경험을 심어줄 수도 있다. 바로 끊임없는 간섭과 통제를 통해. 무시당하는 느낌을 받은 자식의 입장에서 부모의 조언이 달가울 이유가 없다. 아무리 나를 사랑으로 키워준 부모라고 해도 선을 넘었다는 느낌이 든다. 그때부터 조언은 '잔소리'가 된다.
하지만 마냥 두고 보기도 힘든 것이 현실
물론 이 지점에도 부모와 자식 간에 의견이 갈릴 수 있는 부분이 존재한다. 어떤 경우에는 단순히 부모의 오해나 독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누가 생각해봐도 자식의 선택이 위험하거나 잘못되고, 무모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정말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줘야 할 것 아닌가? 부모라고 해서 '통제광'이 되어 사사건건 자녀의 인생에 간섭하고 싶은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대부분의 부모는 정말 '최소한'으로, '꼭 필요한 것만' 말하려고 노력한다. 혹은 그렇게 노력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여긴다(자신만의 착각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자식의 잘못으로 인해 부모가 뒷감당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서류상 '성인'이 된 이후에도 이러한 책임의무는 한동안 지속된다. 법적으로 아무런 책임이 없더라도 부모의 입장은 또 그렇지가 않다. 자식은 부모를 버려도 부모는 자식을 버리지 못한다는 말처럼, 자식의 어려움은 모른 체할 부모는 흔치 않다.(간혹 불거진 사건들로 인해 아주 없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겠다.) '가족'이라는 이름 안에는 사랑뿐 아니라 책임도 존재한다. 결국 자녀의 문제는 누구 한 사람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가족 전체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심각한 문제들은 부모조차 책임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기도 하며, 부모에게도 대면하기 꺼려지는 종류의 사건들도 있다. 종종 그런 문제들은 부모의 '체면'과 연결되기도 한다. 이때부터는 문제가 조금씩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내 자식이 누구에게나 인정받고 올곧은 사람으로 자라주었으면 하는 마음. 부모에게는 그런 마음이 존재한다. 자식의 모습에서 부모의 됨됨이를 짐작하는 경향도 여전하고, 특히 한국에서 '인성'문제라 함은 곧 가정교육의 문제와 연결 짓는 문화도 존재한다. '부모가 똑바로 안 가르쳤으니 저런 모습을 보이지'라는 말이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는 사회인 것이다.
부모에게도 자식에 대한, 아니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기준은 있고, 적어도 내 자식이 '인성' 문제로 쓴소리를 듣거나 버릇없이 자랐다는 말은 듣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존재한다. 하지만 사람은 사람의 바람을 종종 배신하고,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은 인간관계의 참모습일 것이다.
처음부터 윽박지르기로 시작하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또는 없었으면 한다.) 대부분 처음에는 육아서적에 흔히 기술되는 문구들처럼 '좋은 말'로 타이르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좋은 말을 귀담아 들어주는 사람이 몇 없고, 내 자식도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함을 체감하고 마는 사건들이 누적된다. 사용하려고 노력하던 '좋은 말'은 점점 단어 선택조차도 '잔소리'로 정의 내리기에 합당한 형태로 변질되어가고, 답답함과 짜증, 분노와 같은 감정들이 잔소리의 감성까지 완성시켜준다. 높아지는 언성과, 약 올리듯 더욱 엇나가는 아이의 모습. 결국 화를 낸 나도 싫고 내 마음을 몰라주는 아이에게도 화가 난다. 아이는 아이 나름대로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 부모에게 성질이 난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 진정한 사춘기가 찾아오는 것이다.
잘못된 사람은 없다. 대화가 충분치 못했던 것일 뿐.
자식이 올바른 사람으로 자라주었으면 하는 부모의 바람. 이제는 내 인생은 내가 결정하고 싶다는 자식의 바람. 이 두 가지 바람 중 잘못된 것은 없다. 다만 서로의 대화가 충분하지 못했던 것일 뿐. 합의점에 도달하는 것은 원래부터 어려운 일이고,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라고 해도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부모가 자식을 어리고 부족한 존재로 단정 짓는 한, 자식의 의견을 온전히 존중하기 어렵다.
사람은 무시받는 느낌을 귀신같이 알아차린다. 이것은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적대감을 알아차리는 능력은 생존본능의 영역이고, 내가 상대를 무시하려는 의도가 없었더라도 상대방이 그런 느낌을 받았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사건을 차분하게 재구성해보면 나의 어떤 말이나 행동, 표정, 몸짓 같은 것이 그를 건드렸는지 알아낼 수 있다. 아이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할 뿐, 엄마 아빠 말에 귀를 기울이지 못할 만큼은 충분히 기분이 나쁘다. 교과서에 예시로 나올 만큼 정중한 말도 무시가 밑바탕에 흐르면 듣는 사람은 기분이 상한다. 기분이 상한 사람은 방어적이 되고, 방어적이 된 상태에서는 어떤 사람도 상대방의 말을 귀담아듣기 힘들다. 방어모드에서는 오로지 상대방의 말을 반박해서 나를 지키겠다는 생각뿐이어서 이런 상태의 상대방에게 동의나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결국 대화가 이루어지려면 동등한 관계가 선행되어야 한다. 스승과 제자 또는 상사와 부하 사이가 되어서는 대화가 한쪽으로 흐를 뿐 오가지 못한다. 자녀를 부모의 눈높이로 끌어올릴 수 없다면(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부모가 눈높이를 맞추는 수밖에 없다. 결국은 '존중'이다. 사람에 대한 존중, 그리고 자식에 대한 존중. 존중받는 느낌이 들 때 마음도 열리고 귀도 열린다.
부모 스스로도 '사랑'을 빙자해 체면과 자존심을 지키려 하지 않는지 되돌아볼 필요도 있다. 물론 이런 고민들이 갑작스럽게 가정의 평화를 되찾아주거나 사건의 극적 해결을 이끌어내지 못할 수도 있다. 당장은 부모 자식 관계가 평행선만 긋는 것처럼 느껴지거나, 그래서 답답한 마음이 들고 초조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노력의 의미는 뒤늦게 발현되기도 한다. 자식이 부모가 된 이후에라도 그 심정을 이해하길 바란다면 지금 '화해의 씨앗'을 심어둘 필요는 있다. 부모의 입장에서 되돌아보았을 때 '그때 엄마 아빠가 이 정도 노력은 했었구나' 하고 뒤늦게 납득하는 과정에서 오래된 상처가 치유되는 경우도 있다. 더불어 아이와 가족에게 윽박지르기밖에 하지 못하는 최악의 부모를 피하는데도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실망하지 말자. 부모는 원래 난도가 높다.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만 한다. 그 어떤 말로 포장하더라도 부모는 '힘들다'. 부모 노릇을 하다 보면 숱한 인생공부를 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는 최악의 부모조차도 면하기 어렵다. 한 사람을 길러내는 것, 그리고 누군가를 책임져야 하는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기 때문이다. 부모가 되어보지 못한 사람을 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부모가 되어보지 않고는 결코 알 수 없는 것들이 분명 존재한다.
'사랑'과 '통제', '조언'과 '잔소리'. 이 두 가지를 결정지을 역량도 결국 '부모'에게 있다. 풀어나가는 과정은 자식과의 상호과정이 필요하지만, 문을 여는 것은 부모만이 할 수 있다. 만약 내가 사랑으로 한 행동을 아이가 '통제'로 여긴다면, 그것이 '사랑'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는 사실을 잘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부모밖에 없다. '통제'로 여기는 아이를 혼내거나 억압해 '사랑'으로 느끼도록 바꿀 수는 없다. 설사 아이를 혼내서 "이건 사랑이에요"라고 스스로 대답하게끔 하더라도 아이에게 그것이 사랑으로 느껴질 리 없다.
생각과 느낌, 감정은 분명히 의지를 벗어난 영역이고, 부모가 아이의 '생각'을 임의로 바꿀 수도 없다. 결국 통제라고 느꼈던 것이 사랑이었음을 깨닫는 것은 아이이며, 그 과정에서 부모는 조력자이자 조언자의 역할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부모는 어렵다. 내 인생도 감당하기 힘든데 다른 사람의 인생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현실적인 부분 외에도 부모 자식 간에 해결해야 할 관계의 난제들이 수도 없이 많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부모의 역량은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 처음 부모가 된 후 한동안 헤매고 허덕이는 것도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부모의 삶은 난도가 높다.
부모가 자식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인간관계의 '열쇠'
부모와 이런 문제들을 해결해나가는 과정이 결국 아이가 성인이 된 후에 경험할 새로운 인간관계를 풀 열쇠가 된다. 생각해보면 사랑과 통제, 조언과 잔소리에 대한 미묘한 차이는 연인 또는 부부관계, 직장에서의 인간관계에서도 흔히 경험하는 문제들이다. 연인관계에서도 나는 사랑이라고 생각하지만 상대방은 통제받는다고 느끼는 상황들이 많다. 직장에서도 상사는 조언이라고 하는 말들이 하급자에게는 라떼나 잔소리, 자기 자랑으로 들리는 경우들이 허다하다. 부모 자식관계와 다른 여타의 관계는, 시작만 다를 뿐 결국은 인간관계라는 점에서 그 궤를 같이한다.
사회 역시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형성하며 살아가는 '관계의 장'일뿐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인간관계를 풀어갈 수 있는 열쇠일지도 모른다. 부모 중심으로 아이의 인생을 '설계'해주려고 하기보다 아이가 '사람'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역량을 길러주면 좋겠다. 그것은 결국 '사랑'과 '통제' 사이에 존재하는 미묘한 간극을 아이와 함께 이해해보고자 하는 노력에서 시작된다.